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오사화 (문단 편집) == 실록에 기록된 무오사화의 계기 == >급기야 사국(史局 - 실록청)을 열어 (이)극돈 이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祖)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29일, 후대 중종 때 무오사화의 전말을 밝힌다고 정리한 기사 무오사화는 보통 훈구파 [[이극돈]]과 [[유자광]]이 손잡고 청렴결백한 사림파들을 탄압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 인식이 반영된 기록은 연산군일기에서 무오사화를 총정리한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기록에는 무오사화의 시작을 [[성종실록]]의 편찬을 총지휘했던 좌의정 훈구파 이극돈과 사림파인 [[사관(역사)|사관]] [[김일손]]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 이극돈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고, 성종 사망시 국상 중에도 기생이랑 놀아났으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기록.]을 한 걸 보고 김일손에게 수정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일로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때마침 성종의 사초에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게 된다.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항우]]에게 살해되었던 [[초회왕]]의 사례를 들어 [[세조(조선)|세조]]의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됐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오사화의 시놉시스다. ~~예로부터 [[패드립]]은 왕도 뚜껑 열리게 만들 수 있다~~ 이극돈은 위에서 언급한 일과 그 외에도 사림파와 자주 대립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사림파의 스승격의 위치였던 김종직과 엮어서 사림파를 숙청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을 유자광한테 전해줬다. 그리고 유자광도 《[[조의제문]]》의 엄청난 파괴력을 느꼈고, 마침 [[함양군|함양]]의 학사루에 걸어둔 자신의 시를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자마자 떼어내어 불살라 버린 일로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던지라,[* 다만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일화는 실록에는 있지만 전후 관계를 비추어 보면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일화다.] 어느 날 새벽에 몰래 연산군을 찾아가 이를 고해바친다. 이에 연산군은 유자광의 부추김에 넘어가 당장 김일손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여기서부터 무오사화가 시작된다. 즉, 쉽게 요약하자면 각자 다른 이유로 사림파에게 원한이 있었던 두 훈구파 대신이 마침 조의제문이라는 훌륭한 떡밥을 알게 돼 단순무지한 연산군에게 떡밥을 던져 힘들이지 않고 사림파를 제거했다는 것이 무오사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