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오사화 (문단 편집) === 무오사화 정리 ===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폭정이 종식되고 과거 연산군 시대의 패악들을 정리하면서 무오사화 또한 조정에서 뒷수습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무오사화에 대해 사림들은 무오사화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이 일들을 야기한 자들(특히 유자광과 이극돈)에 대해 결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무오사화의 뒷정리는 상당한 시간과 수많은 정쟁을 거쳤다. 왜냐하면 훈구파들도 똑같이 얻어터진 갑자사화의 경우 복수심에 불타오른 훈구파들도 집단으로 가세해서 책임 추궁과 피해자들의 신원,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큰 난관 없이 이루어졌지만 무오사화는 세조의 정당성 논란이 있기 때문. 중종 또한 세조의 후손이기에 자신의 선조의 정당성 논란에 대해서 용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하나씩 정리됐다. 우선 중종은 무오사화에 대해 신원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의제문의 문제로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파악한 뒤, 중종은 김일손과 같은 직접적 피해자와 연좌된 사림, 관료들의 신원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피력하며 신원을 간접적으로 보류했다. 이에 대해 반공 공신들조차도 김종직 김일손이 세조를 모욕했으니 처벌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말과 글로 인해 한 것이니 당사자들만 처벌해야지 연좌제로 인해 연좌된 사람들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함을 피력했다.[* 과거와 달리 강성해진 사림에 대한 유화적 정책과 사림에 대한 포용의 일환이였다.] 결국 중종도 납득하여 공신들의 주장을 수용했다. ''''하지만 사림들은 이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사림은 무오사화의 참사를 야기한 유자광을 집중적으로 성토했고, 자신이 타겟팅이 되었음을 직감한 유자광은 적극적으로 자신은 세조의 은덕을 받은 충신이며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한 김종직과 자손들은 마땅한 처벌을 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무오사화를 야기한 자신의 행적을 변호했다.([[중종실록]] 2년 2월 2일). 즉 유자광은 무오사화가 세조의 정통성 문제 제기에 대한 진압임을 주장하며 세조의 정통성 비판을 용납할 수 없는 중종의 입장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사림의 분노는 유자광의 간접적인 협박과 무오사화 정당성에 대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거세게 불이 붙어 대간에 의해 무오사화의 참사에 대해 유자광의 책임과 처벌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결국 사림의 거센 반발에 견디지 못한 중종이 항복하였고, 유자광과 유자광의 자식들에 대한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 와중에 사림에서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핵심적인 사안을 찌른다. 사실 무오사화는 조의제문으로 인한 세조의 정통성 문제에 대한 사실 지적과 함께 사초 기밀이 함부로 누설된 사건이었다. 실제로도 조선 역대 임금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중대함을 인식하여 사관들이 외부의 간섭 없이 기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연산군 때 이것이 어지럽혀진 것이다. 사림들은 무오사화 본질은 김종직, 김일손의 세조에 대한 정통성 비판이 아니라 사국이 누설된 것이며, 이렇게 누설된 사례는 앞으로도 부정적인 전례로 남아 이후 사관들이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사관들이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수 있다며 무오사화에 대한 세조의 정통성 문제에만 집착한 유자광과 훈구들의 논리를 깨버렸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닌 게 전례가 중요시되었기에 이 일로 사관들이 제 기량을 못 펴고 왕의 입맛에 맞는 글만 올리면 그건 공정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사관의 존재가 유교 정치의 근간 중 하나라는 점을 보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문제는 김일손은 그 권한을 남용하여 왕실을 비방하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어 올렸으며 쓰잘데기없는 잡글을 싣는 등 3번째는 그냥 사관 자리에서 쫓겨나기만 해도 될 일이지만 첫 번째외 2번째는 [[영응대군]]부인 이야기만 빼면 당시로서는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지나치게 권한이 축소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방기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김일손의 경우엔 그 권한을 남용한 정도가 무려 왕실에게까지 이르렀고 그 점은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는 절대 묵과할 수 없으며 특히나 세조의 정통성까지 건드리며 세조 관련 [[가짜뉴스]]급의 이야기까지 올린 것은 당시에는 사형은 못 피할 일이다.] 이후 무오사화의 뒷수습이 마무리됐다. 김종직, 김일손을 신원하라는 [[중종(조선)]]의 명이 내려졌고, 신원되면서 김종직은 우의정으로 벼슬을 올려 증직하였고 시호도 되돌려 받으며 기존의 무오사화에 대해 김일손, 김종직, 관련 인물들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추궁하던 것에서 180도 바뀌어서 최종 승자는 사림으로 막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