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문룡 (문단 편집) ==== 광해군 ==== 1622년 [[광해군]]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평안도]] [[철산군|철산]] 앞바다인 [[가도]](椵島 또는 皮島)에 주둔하도록 허락한다.[* 광해군은 후금군이 조선 영토내에 들어와 모문룡군을 추격하는 것도 허락했기 때문에, 이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보여주는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본래는 모문룡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다.] 모문룡은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였으며, 명군과 난민 1만명이 모문룡을 따라서 가도에 머물게 된다. 모문룡은 명으로부터 은자 20만 냥을 지원받기도 했지만 20만냥으로는 돈이 많이 드는 수군을 유지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으며, 더욱이 가도는 농사도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좁은 섬이라 군량이 부족했으므로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여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 식량이 매년 10만석에 달했다. 흉년으로 조선 측의 식량 지원이 여의치 않자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모문룡의 부하들이 [[약탈]]을 과도하게 벌이자 [[평안북도]] [[의주부]] 부윤 이완이[* 그 유명하신 [[이순신|충무공]]의 조카이다. 숙부와 마찬가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듯, 조선 조정도 모문룡의 요구를 무시하고 이완에게 경징계만 내렸을 뿐 파직하지 않았다. [[정묘호란]]때 후금군에 맞서 [[의주]]를 수비하다가 전사한다.] 그들 가운데 몇몇을 붙잡아 [[곤장]]을 쳤으나 모문룡은 분노하여 "상국의 병사를 때리냐"며 조선 조정에 항의했다. 결국 이완은 벼슬이 강등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명나라에 대한 저자세로 일관하였다. 일부 역덕들이 병자호란에서 인조의 반청정책을 옹호하면서 청나라의 침략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이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난 때문에 피할 수 없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록을 읽어보면 조선 조정의 대명 저자세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가 많다. 광해군 시절 의주부윤 이극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여진족 대비를 위한 훈련을 하자, 이를 본 명나라측이 오해하여 조선에 항의했다. 이런 항의를 빌미로 사간원과 사헌부는 이극신이 상국(명나라)을 화나게 했으니 처벌해야 하고 광해군에게 주청을 올리기도 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1613) 10월 29일기사) 다만 광해군이 이극신을 옹호해서 별탈 없이 넘어갔다.] 일부 역덕들은 모문룡이 전혀 군사적인 잉여였다고 주장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모문룡은 수군이 없는 후금을 상대로 계속 치고 빠지면서 요동반도에서 후금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후금은 빈집털이를 당한 경험 때문에, 대명전선에 전군을 동원하지 못하고 항상 후방에 병력을 남겨둬야 했으며, 이것은 인구가 적어 병력이 부족한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광해군은 모문룡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모문룡은 가도에서 둔전을 하고, 염전을 개간하여 소금을 만들려고 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영구주둔할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불허했다. 모문룡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심지어는 조선에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