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문룡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중국]]에서는 당대에도 '''부패한 장군''' 혹은 '''오랑캐를 막아내던 명장'''이라고 의견이 갈렸으며, 현대에도 대략 비슷한 설로로 나뉘어져 있다.[*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689|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글 / 주가웅]]] 모문룡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전을 회피하고 [[청나라]]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청군이 공격해 왔을 때 결전을 회피하고 섬에 틀어박힌 것도 군사력을 보존하고 청을 견제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 부하들 중 상당수가 변방의 [[해적]]이나 부랑인 출신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것은 모문룡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이다. 중국은 중앙권력이 약화되면 지방의 비적이나 유협집단, 호족들이 군벌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이는 [[한고조]]나 그 주위인물들, [[유관장]], [[주원장]]도 이런 부류였고, 20세기 들어서 [[중화민국]] 시절의 [[군벌]]들도 상당수가 이런 자들이었다.], 이들은 군사적 재능이나 지휘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들의 활약으로 후금은 보급로 안전 및 요동해안 방비를 위해 후방에 일정 병력을 남겨둬야했다. 이는 명나라의 산해관 방어선의 압력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모문룡의 부하들은 모문룡 사후 후금에 귀순하여 후금의 선봉장이 되었고, 결국 이들의 손에 [[이자성]]군과 [[남명]]이 멸망하는데, 이들을 발탁해서 장수로 부리던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의 견해처럼 단순한 해적두목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 외에도 모문룡이 비록 부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났고 상업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서 [[명나라]]와 [[조선]] 간의 사무역을 촉진시켰다는 관점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업수당으로 벌어들인 자금의 상당부분은 동강진의 군사력에 쓰였고, 이것은 후금을 긴장시켰다. 동강진 - 조선 간의 무역으로 인하여 동강진만 일방적으로 수혜를 본 것은 아니었다. 양자 간의 무역은 조선에게도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동강진에 대한 지원 및 거래가 한창이던 1625년, 조선은 기근으로 인하여 양곡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던 등주에서 양곡을 매수하였는데, 이때 곡물을 구매하기 위하여 동강진과의 무역을 통해 확보했던 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무역 사례는 아니지만 같은 해, 인조 책봉을 위한 詔使의 접대를 위해 동강진에서 은을 빌린 다음, 현물로 상환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당시 화약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염초를 얻기 위해 동강진과 무역을 한 사례도 있었으며, 동강진으로 들어온 상당한 물량의 염초가 조선으로 밀매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출처: 명청교체기 동강진의 위상과 경제적 기반, 서원익.] 모문룡 처형 이후 [[청나라]]에 투항한 모문룡의 부하들이 결과적으로 청의 화포 역량 발전에 영향을 끼쳤고 막강한 수군을 이끌고 투항하여 청이 갑자기 해군력에서도 명과 맞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던 경중명, 상가희 등은 뒷날 [[청나라]] 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모문룡 처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원숭환]]의 화포를 쓴 수성 전략은 적군이 강한 공성포로 맞서면 쓸모 없었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무엇보다 모문룡의 처형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모문룡을 죽인 것이 왜 원숭환의 패착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모문룡이 죽은 후 가도를 이어받았던 진계성은 그의 부하인 유흥치에게 죽고, 유흥치는 다시 등주와 조선을 약탈하고 다녀서 조선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가도를 토벌하려고 하기도 했다. 결국 유흥치는 후금에 투항하려다가 부하인 심세괴에게 죽었는데, 만약 유흥치가 이 당시 후금에 투항했다면 후금은 가도의 수군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모문룡의 다른 부하들인 공유덕과 경중명은 그 이전에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죽을 때 등주로 도망가 손원화의 밑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나중에 등주의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후금에 투항해 버린다. 이런 것들을 보면 모문룡이 생전에 했던 패악질이나 줄타기와는 별개로 요동에서 그의 전략적인 위치나 부하들을 통제하는 능력 자체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모문룡은 현대뿐만 아니라 당대 명나라 유신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으로 인물평이 엇갈리는 사람이었지만, 그 부하들의 면면을 보면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의 주장처럼 전혀 군사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잉여라고 보기는 힘들다. 청나라의 산해관 입관 이후 [[남명]]을 진압하여 멸망시킨 것은 오삼계를 제외하면 모두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다. 청나라의 장강 이남 장악은 오삼계를 제외하면 이들 모문룡의 부하들[* 상가희, 경중명, 공유덕]의 활약으로 가능했으며, 모문룡이 잉여였다면 그 부하들들도 전혀 군사적으로 무능했어야 하지만, 그 부하들은 남명과 정성공군 격파라는 군사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청조에서도 그 세명을 번왕으로 봉한 것이다. 일부 역덕들은 모문룡의 조선왕조에 대한 패악질을 강조하면서 군사적 잉여였다고 주장하지만, 애당초 명나라 본토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해상보급이 쉽지도 않은데다가 생산력이 부족한 가도에 주둔하면서 1~2만명의 병력을 유지하려면 해적질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는 명나라가 망한 후 모문룡과 비슷하게 [[대만]]에 주둔하면서 중국 남부를 세력권으로 두고 청나라를 습격했던 [[정성공]]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공]]도 한때 현재의 [[저장성]], [[장쑤성]], [[푸젠성]] 등의 화동 일대 해안지방을 모두 자신의 세력권으로 넣었으나, 정성공과는 달리 부하들은 명실부흥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망이 더 강했다. 대만은 가도보다 훨씬 넓고, 농지도 훨씬 많은데도 정성공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하들의 해적질을 용인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중국 남부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복명을 외치던 정성공을 지지했지만 해적질 때문에 민심이반이 일어났고, 그 결과 멸망했다. 모문룡의 부하들은 그의 사후 [[다롄시]]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으며, 이 비석은 높이가 3미터에 달하며 현재도 전해진다. 모문룡의 고향인 [[항저우]]에도 그의 무덤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