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문룡 (문단 편집) ====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한 이유 ====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요즘 나온 얘기가 아니라 [[명나라]] 말기나 [[청나라]] 초기의 기록에도 이미 이 논란이 나온다. 이는 원숭환이 몰락하는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되었기 때문이다. 모문룡의 비행이나 행패가 많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이런 문제는 사실 숭정제가 현명한 임금이거나 명나라 조정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원숭환이 정당한 경로로 문제를 제기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명나라 말기는 조정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고, 모문룡과 같은 부패한 탐관오리들은 명나라 전역에 널려 있었다. 게다가 모문룡은 조선-후금과의 무역과 조선 및 후금 점령지의 주민들을 약탈하여 얻은 재화를 명나라의 부패한 조정관료에 뿌렸으며, 이 때문에 조정에서도 모문룡의 비호세력이 많았다. 그러므로 원숭환이 숭정제에게 어떻게 상소를 해도 간신들의 농간으로 도리어 원숭환에게 화가 미칠 가능성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원숭환은 모략에 가까운 방법[* [[한고조]]가 [[회음후]]를 제거할 때 쓰던 방법이다.] 으로 모문룡을 처단했는데, 이는 결국 숭정제의 의심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1. 조명 관계에 피해를 끼쳐서 모문룡을 처단했다는 설 모문룡은 [[조선]]에 부리던 행패가 단순한 민폐 수준이 아니어서 조선과 협력하여 [[후금]]을 견제 공략하려는 원숭환에게 모문룡이 엄청난 장애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정묘호란]]이 끝날 때 도우라는 조선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부하들을 보내 청군에 의해 머리가 깎인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다가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 서해안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다가 명과 우호관계인 조선을 약탈을 하고, 심지어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을 터는 등의 악질적이고, 경악스러운 돌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평안도]] 사람들이 "모강도가 쳐들어온다"는 말에 "[[청나라]] 군대가 오는 것보다도 무섭다"면서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원숭환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을 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동맹국이나 다름없는 조선을 거의 적국으로 돌릴 만한 모문룡의 행패를 더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은 모문룡의 목을 친 다음에 조선에 편지를 보내서 "모문룡이 그간 벌인 행패를 참다 못해서 죽였으니, 이제 양국이 힘을 합쳐서 청에 맞서자"는 편지를 보냈다. 모문룡의 횡포로 조선에서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명에 대한 악감정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수군이 강하다는 인식이 명과 청에 퍼져 있었고, 만약 조선이 청과 손을 잡고 명을 적대하게 되면 청은 굳이 산해관을 공략할 필요도 없이 조선 수군과 합세하여 바다를 통해 북경 근처나 산둥 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러면 명의 산해관 방어선은 유명무실해지며 설사 이를 격퇴한다고 해도 그 피해는 막대한 만큼 명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사태이기에 조선이 청과 제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청의 후방을 공략하는 것이 명이 모문룡에게 내린 임무였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조선을 상대로 행패를 일삼아 조선에게 명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고 있으니 이는 명이 청을 상대하는 기본 전략을 뿌리채 뒤흔드는 꼴이었다. 2. 명나라 내부의 당파싸움 설 이건 명말 청초의 야사 등에서 보이는 것. 원숭환은 동림파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인데 전용석은 일찍이 예부 시랑까지 승진했지만 천계년간에 [[위충현]]에 의해 쫓겨난 이력이 있는 인물로, [[숭정제]] 즉위 이후 [[위충현]]을 실각시키고 위충현의 당파인 엄당 제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어느 날 같은 동림파의 선배인 진계유(陳繼儒)가 터럭 하나(一毛)[* 모문룡의 성이 바로 털 毛다.]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게 어떠하냐고 넌지시 권했다는 것이다. 전용석은 처음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후 [[원숭환]]을 만난 자리에서 일모(一毛)가 바로 엄당의 자금줄이던 모문룡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원숭환에게 모문룡 제거를 권했고 원숭환이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명나라는 말기에 당파싸움이 극심했으며, 특히 당파싸움 끝에 집권한 당파가 반대파로 간주된 장수를 전장으로부터 중앙으로 소환해서 문책하거나 처형하는 예가 상당히 많았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문책해 처형한 것이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며, 바로 몇년 후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자성]]군과 싸우고 있던 섬서순무 [[손전정]]을 원숭환이 모문룡에게 책임을 물은 "직무태만" 혐의로 [[탄핵]]했고, 손전정은 파직되어 몇년간 감방살이를 하다가 양사창이 죽은 이후에야 다시 [[숭정제]]의 부름을 받아 전선에 나설 수 있었다. 3. 모문룡이 후금과 내통했거나 그럴 기미가 보여서 처형했다는 설. 모문룡의 주둔군은 한편으로는 후금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금과 계속 밀무역을 했고, 이에 따라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또한 후금은 이전이나 이후로도 명나라 측의 장수들을 회유하여 자신으로의 투항이나 귀순을 권유했으며, 이들은 명나라 때보다 더 높은 벼슬을 받고 이민족을 위해 아낌없이 싸웠다. 후금측은 모문룡에게도 귀순을 권고했을 것이다. 원숭환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자기말을 잘 안듣는데다가 이런 사정까지 있다보니 후금과 내통하고 있는지도 의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28년 10월 17일, 모문룡이 조선 [[역관]] 장예충에게 “후금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유예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북송]] 시절, 제남부의 장관을 지냈는데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초토화되자 [[금나라]]가 세운 괴뢰 국가인 [[제나라]]의 황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에 [[인조]]는 “'''모문룡은 [[짐승]]과 다름없다.''' [[황제]] 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이니 예로써 책망할 수 없다. 그의 뜻을 보건대 이미 발호할 기미가 드러났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명나라]] [[천계제]]가 사망했을 때, 모문룡은 가도에서 이 소식을 듣고도 풍악을 연주하며 주연을 벌였다. 이런 사정은 원숭환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고, 당연히 원숭환은 그가 적에게 투항할 수도 있는 인물로 보았을 것이다. 4. 원숭환의 모문룡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설. [[원숭환]]은 과거의 최종단계인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까지 합격한 진사 출신이었고, 모문룡은 공부가 싫어서 10대부터 군대에 들어가 졸병으로 구르던 자였다. 현대로 따지면 원숭환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엘리트코스를 거쳐 국방장관까지 오른 사람이고, 모문룡은 사병출신으로 구르다가 군공을 세워 장성까지 오른 자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관료중에서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던 원숭환이 군사적으로 재능은 좀 있지만, 동맹국에게 피해를 끼치며 개인적 치부행위를 하던 모문룡을 어떻게 보았을지는 명약관화하다. 특히 원숭환은 모문룡의 [[가도]]진에 문제가 심각하게 많다는 것을 인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원숭환 같은 경우 모문룡에게 5개조의 가도 개혁안, 즉 병사 훈련 좀 제대로 시키고, 부정 축재 하지 말고, 명령 좀 잘 듣고 등등의 개혁안을 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의 반응은 '''"니가 뭘 아냐?!"''' 하고 말했을 것이다. 자존심이 높던 원숭환이 이런 무식한 무인인 모문룡에게 개인적 수모를 느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5. 숭정제의 책임추궁을 두려워한 원숭환이 미리 손을 썼다는 설. 또 하나의 원인 중 하나로 모문룡이 너무 막나가자 원숭환이 숭정제의 감독 부실의 책임 추궁을 두려워해서 미리 처형했다는 추정이다. 명나라 황제들, 특히 숭정제는 유독 전선에 나간 장수들에게 가혹했으며, 조그마한 꼬투리를 잡아 옥에 가두거나 패전으로 처형하는 일이 잦았다. 이미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을 총지휘했던 양호는 [[임진왜란]]때의 활약에도 불구했고[*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왜군을 지휘한 울산성 전투에서 패전해 파직이되었으나, 선조가 내서서 변호해줄 정도로 조선에서 우호적으로 본 명나라 장수이다.], [[사르후 전투]]의 패전의 책임을 물어 10여년간 투옥되었다가 숭정제의 명으로 처형되었으며, 10여년전 모문룡의 상관이기도 했던 광녕순무 (요동의 방위사령관) 왕화정이 요동반도를 상실하자, 병부상서였던 [[웅정필]]도 함께 책임을 물어 처형을 당했는데, [[웅정필]]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원숭환이 아무리 옳은 지휘를 해도 부하가 제멋대로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서 실책을 저지를 경우 '''정작 그걸 말린 상관인 [[원숭환]]도 함께 처형당한다는 점'''에서 원숭환이 모문룡의 행패와 명령 불복종에 대해서 큰 위기감을 느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니지만, 당시 [[막장]]인 [[명나라]] 상황에서 이미 웅정필 이외에도, 자기는 [[천명제|누르하치]]가 쳐들어온다고 정확하게 보고했을 뿐인데 막상 장슴음이 싸우러 나가서 깨지니까 처형당한 이유한이나, [[사르후 전투]]에서 지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예전에 관계 좋을 때 누르하치 동생 딸이랑 결혼했다고 니가 배신해서 진거 아니냐고 추궁당해서 자살당한 이여백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원숭환은 모문룡의 여러 비행들이 자기의 감독부실 책임으로 돌아와 나중에 추궁당할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할 수 있다. 6. 후금이 강화조건으로 원숭환에게 모문룡의 목을 요구했다는 설 모문룡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명청교체기 역사가들은 후금이 원숭환에게 모문룡을 제거하거나 가도의 동강진을 폐쇄하는 것을 강화 조건으로 걸었는데, 원숭환이 숭정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모문령을 처형했다가 화를 입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