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문룡 (문단 편집) === 원숭환과의 불화 및 처형 ===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상관인 원숭환과의 불화 때문에 몰락하고 만다. 1624년에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좌도독에 제수되었다. 이는 현대로 치면 사령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문룡은 고작 4년만에 일개 대대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인 요동 방면 수군 사령관 자리에 오르는 엄청난 초고속 승진을 한 것. 단동을 점령할 때는 겨우 1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유민을 모아 몇년만에 1~2만명의 대병력을 보유하게 된 것을 보면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이나 원숭환의 주장처럼 단순한 떠벌이 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명나라 조정이 모문룡의 전략적 위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숭환은 모문룡을 비루하게 생각했으며, 조선 및 요동의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구실을 잡아서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긴다. 1629년 4월 27일, [[원숭환]]은 모문룡을 [[요동 반도]]의 쌍도로 불러서 군사 관련 문제를 논의한다고 하였다. 두려움을 느낀 모문룡은[* 원숭환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제수되어 모문룡의 상관이었다.] 병선 40여 척에 2만 8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쌍도(雙島)로 출발했다. 1629년 6월 5일, 모문룡은 쌍도에 이미 와 있던 [[원숭환]]과 만났다. 원숭환은 첫날에는 짐짓 주연을 벌여 모문룡을 환대하는 척 했지만, 다음날 모문룡을 즉각 [[체포]]하고 그의 죄를 질책했다. >“장수가 외부에 있을 때는 감독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거부하였고, 있지도 않은 승전 사실을 조작해 허위로 보고하여 감히 황제 폐하를 속였으며, 사사로이 [[재래시장|시장]]을 열어 [[청나라|오랑캐]]와 내통하였고, 상선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조선]] 백성들을 마구 죽여 이웃나라에 피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10년 동안 수만 석의 곡식을 받아 가면서도 한 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너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무엇에 쓰겠느냐?” 그리고 [[원숭환]]은 모문룡을 [[참수]]하면서 "모문룡이 [[가도]]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조선]] 국왕([[인조]])의 덕분으로 호사를 누렸는데,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명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내가 [[황제]]로부터 받은 권한[*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상방 보검을 뜻한다. 상방검은 해당 인물이 황제의 신하들을 재판 없이 즉결처형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주는 의미였다. 중화제국과 조선 등 유교권 국가에서 사형은 반드시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군주의 결재를 받아야만 집행할 수 있었다. [[만력제]]는 일을 안 해서 30년동안 수억 인구의 명나라에 사형수가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할 정도니(…) 상방검의 권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상방검은 [[판관 포청천]]에서 [[인종(송)|송 인종]]이 포증의 측근 전조에게 하사한 검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작중에서도 범죄수사를 위해 고위직 용의자들을 압박할 때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으로 모문룡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흠명출진행변독수계요천진등래등처군무병부 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欽命出鎭行邊督帥薊遼天津登萊等處軍務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 [[원숭환]](袁崇煥)은 삼가 [[인조|조선 국왕]]께 첩문(帖文)을 보냅니다. 지난해 [[숭정제|황제 폐하]]께 주문(奏文)을 올리는 일과 관련, 영광스럽게도 국왕께서 변변치 못한 본관을 잊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를 일러주시며 국휼(國恤)에 대해 잊지 않고 정성껏 교시해 주셨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잊지 못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요동 지역에 나오게 되었으니 국왕과는 숙연(夙緣)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전해오는 국왕의 소식을 들으면, 마치 서로 얼굴을 대하는 듯 설레이기만 합니다. 되돌아 보건대 [[후금|동이(東夷)]]가 제멋대로 포학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우리 중원(中原)의 봉시(封豕)는 그냥 놔둔 채 국왕의 강토만 잠식해 왔습니다. 병인, 정묘년의 전역(戰役)에서 [[누르하치|노추(老酋)]]가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노추(奴雛)가 2번이나 넋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긴 했지만 동쪽의 산하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 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애태웠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황천(皇天)께서 이를 애달프게 여겨주지 않으시고 [[천계제|희종 황제(憙宗皇帝)]]를 앗아갔는가 하면, 나 역시 먼저 참소로 인해 돌아가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위신이 손상되어 떨쳐지지 못했으므로 내가 정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마 국왕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슬퍼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자]]께서 천고에 뛰어난 신성(神聖)함과 영무(英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중흥에 뜻을 깊이 두시어 이 조무래기 [[만주족|오랑캐]]들을 섬멸해 버리려고 하시는데, 불초 본관이 그 길을 안다고 여기시어 특별히 조칙을 내려 시골 가운데에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가 요동 땅을 잊지 못하는 만큼 어찌 국왕의 밝은 덕을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행인(行人)이 왕래하노라면 바닷길이 아득하기만 할 것이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패려한 도수(島帥) 때문에 거듭 사신의 여정이 고달파질 것이기에 공도(貢道)를 서령(西寧)으로 개정할 것을 특별히 청하여 제가 마초(馬草)를 공급하여 국왕의 풍유(風猷)를 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저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신을 쏟아오면서 하동(河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체로 군사 작전은 기세로써 제압하고 기틀을 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 기세를 쌓아두었다가 잠깐 사이에 기틀을 보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므로, 한 순간의 결정을 위해 1백 년 동안 축적하는 것입니다. 국왕께서도 스스로 힘을 축적하시어 기틀을 보아 결판을 낼 준비를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활집을 단단히 잡아 매고 국왕과 함께 동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병진(竝進)하면서 앞 뒤에서 합동 공격을 펼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움을 받게 되면 한 번 북을 쳐서 중조(中朝)의 [[사르후 전투|12년에 걸쳐 쌓인 분노]]를 씻고 국왕의 나라 역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형세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인데, 국왕께서는 이러한 뜻이 없으십니까? 모수(毛帥)는 절도(絶島)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국왕 덕택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성이 없는 무인(武人)이라서 탐욕스럽기만 하여 도둑 떼를 길러내며 국왕의 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나라 망신|우리나라에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에 황상께서 만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고 저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주시어 군중(軍中)에 나아가 그를 주벌토록 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섬에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을 보전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속국의 화란을 해소시켜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밝으신 천자의 깊으신 의도라 하겠습니다. 군대를 해도(海島)에 머물려 두고 멀리 국왕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찾아뵐 수 없는 처지이기에 사자 한 명을 하집사(下執事)에게 보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또 종자(從者)에게 공급하는 일로 번거로움을 끼쳐드릴까 염려되었습니다. 편지만 제대로 통하게 되면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마음이 같아질 것이니, 오직 국왕께서는 더욱 힘써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을 다하시어 단숨에 이 적을 멸하심으로써 왕의 공적을 마무리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빛나고 빛나는 황령(皇靈)께서도 실로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모문룡에 대해서도 따로 편지를 보내 언급했다. ||“[[명나라|성조(聖朝)]]에서 매우 후하게 관심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난수(亂帥)는 패역한 행동을 하여 복주(伏誅)를 재촉하였으므로 삼가 황위(皇威)를 선포하고 함께 동녘을 평정할 것을 맹세하는 일에 대해 자문(咨文)을 띄웁니다. 살펴보건대, 본부원(本部院)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날마다 [[만주족|오랑캐]]를 평정할 일을 강구해 왔습니다만, [[모문룡|우리 내부의 적]]도 아직 조용히 만들지 못한 터에 어떻게 오랑캐를 진압시킬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귀국이 [[명나라|우리 중국 조정]]을 공경하며 따른 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사르후 전투|지난 기미년의 전역(戰役)]] 때에는 [[한타|우리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임했습니다마는]] 귀국 역시 잇따른 내변(內變)이 있어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천계제|선제(先帝)]]께서 모문룡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귀국의 왕을 봉하는 조처를 내리셨습니다.[* 천계제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을 보고 분노하면서 명이 책봉한 왕을 감히 무단으로 몰아낸 것 아니냐고 의심하며 인조를 오랫동안 책봉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광해군|폐조(廢朝)]]를 엎고 새로이 반정한 데 따른 전범(典範)이라 하더라도 모문룡으로서는 생색을 낼 일이 아니라 당연히 명확하게 보고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먼 나라를 자애롭게 대해주시는 인덕(仁德)을 지니셨기에, 변방의 제후국이 조근(朝勤)하는 예절을 삼가 따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안하무인|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 밖에 안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포로 학살|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민간인 학살|난민(亂民)을 살륙한 것으로]] [[원균|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스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 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본부원은 천토(天討)의 명을 봉행하여 장차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필부로 하여금 거만스레 행동하게 하면서 그냥 놔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정을 높이고 사이(四夷)에게 위엄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황명(皇命)을 청하여 동쪽으로 순시나와 해변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참교육|모문룡의 죄를 묻게 된 것입니다.]] 금년 6월 5일 군대를 쌍도(雙島)에 주둔시키고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집결시킨 뒤, 모문룡이 참형(斬刑)을 받아야 할 대죄(大罪) 12개 조목을 뜰에서 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들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전(軍前)에서 효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조정의 난수(亂帥)를 제거한 것일 뿐 아니라 귀국의 화도 동시에 진정시킨 것입니다. 피도(皮島)[* 가도의 별칭.]는 원래 [[중국]]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강(東江)에 주둔시킨 한 부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이동해서 진격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그전처럼 징수하고 토색질하여 귀국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에서도 해사(該司)에 통지하여 각각 강역을 안정시키고 군민(軍民)의 마음을 안온케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전처럼 중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경우 즉시 보고만 해주면 바로 다스려 경계시키겠습니다. 또 공도(貢道)의 경우 바다로 운행하게 되어 있어 실로 사자를 번거롭게 하기에 본부원이 이 점을 매우 염려하여 의논한 결과, 모든 조공을 한 번으로 통일하고 영원(寧遠)의 길로 바꾸도록 하는 동시에 사자 한 사람을 보내 우리의 소식을 통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동의 옛길을 택한 것은 귀국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천부적으로 신무(神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변방의 계책에 관심을 쏟으시니, 필시 변방의 관리들이 일에 태만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원 역시 몸을 기꺼이 나라에 바쳐 기필코 오랑캐를 평정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일을 미지근하게 수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士馬)가 이미 배불리 먹고 사기가 충천하니 일을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 역시 요즘 한가한 때를 이용해서 속히 군비를 정돈하고 우리와 연합하여 잃은 땅을 수복하도록 하십시오. 《시경(詩經)》에 ‘내 그대와 옷을 함께 함은 어찌 그대의 옷 없음 때문이리오. 혹시라도 국가가 위급하면 창을 잡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네.’ 하지 않았습니까. '''모문룡은 [[오랑캐]]나 마찬가지로 귀국에게는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과거 모문룡은 [[개소리|귀국이 은밀히 오랑캐와 내통하며 때때로 도와준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부원은 [[재조지은|귀국이 평소에 의리에 따라 우리를 순종했으니]] 필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상께서도 만리 밖을 내다보시는 명철한 안목으로 흉포한 자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어김없는 천도(天道)이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야말로 또한 당연히 행해야 할 인사(人事)입니다. 우리 황상의 덕은 너르고 너르시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다 하여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의 국왕께서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을 대대로 밝히시면 후손에 이르기까지 왕업(王業)을 향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본부는 거듭 집사(執事)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까기는 정말로 시원하게 까고 있다. 조선은 모문룡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전략} 모수(毛帥)가 스스로 왕법(王法)을 범하더니 과연 [[참형]]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고황에 든 병을 먼저 없앤 것이 되고, 요동(遼東) 백성에게는 호랑이 입을 빠져나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고,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종기]]를 [[사이다|시원스럽게 터뜨려 목숨을 다시 이어 회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 [[원숭환|합하]]께서 [[숭정제|황상]]의 은총에 충분히 보답하고자 은밀하게 계책을 협찬하시어 물샐틈없이 기틀을 마련해 놓은 다음 벼락이 치듯 단호하게 결행한 결과로서 일거수 일투족을 마치 귀신처럼 기묘하게 운용하신 것이었으니, 아무리 날뛰는 간흉이라도 어떻게 계책을 써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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