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문룡 (문단 편집) ==== 인조 ==== [[인조반정]] 세력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던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것이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승인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이를 도운 것은 모문룡이었다. 당시 후금이 요동반도까지 모두 차지했기 때문에 북경으로 가는 육로는 막혔고, 조선의 항해력은 형편 없어서[* 임진왜란때도 조선과 일본의 해전은 대부분 육지에서 30-40km 근처의 근해에서 치뤄졌다.] 육지가 보이는 바다에서 항해하는 연안항해만 가능했고, 인천이나 서해안에서 바로 북경의 외항인 [[천진]]까지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광해군 때만 하더라도 해로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 여러명이 실종되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세력은 모문룡에게 조선사신의 안전한 항해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고 모문룡은 이것을 기회로 조선조정에 더욱더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인조반정 세력은 모문룡에게 빚을 진게 있었기 때문에 모문룡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축하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물이 [[나체]]의 여인을 [[상아]]에 조각해서 만든 춘의(春意)라는 [[누드]] 조각상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상대국으로부터 받은 경우에도 논란이 될 마당에 [[조선시대]]에 이런 걸 보냈으니 기겁할 노릇이었다. 춘의를 받아든 권진기는 모문룡이 무례하다고 꾸짖으며 돌려보냈다. 중국은 당대 한국보다 성적으로 개방되어서[* 당장 금병매 같은 야설도 이미 [[원나라]] 때부터 나온 작품이었다.] 저런 것도 용납이 되는 것이었으나 문화 차이를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 무례가 맞았다. 부하 모유견이라는 자는 말을 타고 조선 궁궐에 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모문룡은 자신이 많은 [[명나라]]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로, 조선과 명나라에서 자금지원을 받았으나, 명나라는 당시 각지에 농민반란이 일어나 각지의 진압군을 조직하느라고 자금이 없었고[*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재정난을 보충하기 위해 중과세를 했고, 이 중과세가 농민을 유민, 또는 반란세력으로 으로 만드는 악순환을 만들어서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결국 이 재정부담은 고스란이 조선 몫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정작 명나라 난민들에 대한 식량 지원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도의 명나라 난민들이 기아로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에서는 급히 식량을 추가 지원하였지만, 난민의 규모에 비해서 엄청난 식량이 지원되는데도 굶주림이 발생하는 기묘한 일이라, 모문룡이 식량을 [[횡령]]하여 후금에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모문룡이 죽고 나서 조선 조정에서 그동안 모문룡한테 보내준 식량을 계산해 보았더니 무려 26만 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모문룡은 정작 자신 때문에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온 [[정묘호란]] 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가도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문룡군은 대부분 수군인데다가 바다를 낀 게릴라전을 전문으로 했으므로, 기병 중심인 후금군과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전술적으로는 이해해줄 수는 있지만, 모문룡에게 수탈당하던 조선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한 행위였다. 1624년 12월 22일, 그의 패악이 어찌나 심했던지 [[인조]]가 장만, 남이흥 등과 접견하여 국토방비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중에 모문룡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특히 도원수 [[장만]]의 언사는 다른 이들과 달리 더욱 과격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전략) >[[인조|상]](上)이 이르기를, >“1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있어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1달 양식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힘을 다해 꾸려나가야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놔둘 수 있겠는가.”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서쪽의 근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는데, 신(臣)은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평안도|관서(關西)]]에 가면 그 쪽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드릴까 하는데, 묘당에서 선처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독]](都督)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우리나라를 침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모병(毛兵 : 모문룡의 [[병사]])이 갈수록 더 침해하고 있는데, 조만간 내지(內地)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뒤에는 격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승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격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난 다음에 장차 국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평안도|서관(西關)]]은 옛적부터 번화하다고 일컬어져[* 평안도는 명나라와 면해 있어 무역이 발달했으며, 전통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중심지이자 평안도 감영 소재지였던 [[평양부]]는 조선 제2의 대도시였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이런 평안도에서 마음만 먹으면 비리를 마음껏 해먹을 수 있는 평안도 관찰사는 꿀보직 중의 꿀보직으로 유명했다.] 사행(使行)이 오갈 적에 혹 주색(酒色)에 빠지는 등 일대의 고을에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텐데, 더구나 이러한 때이겠습니까. 이번에 남이흥이 내려가게 되었으니 계칙(戒飭)해서 보내는 한편 방백에게도 하유하소서.” (후략) 결국 1627년 1월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의 장수 아민이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범하였다. 이때 후금의 군대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는데, 모문룡은 패하여 신미도로 도망쳤다. 이후 3월에는 의주에 주둔한 후금의 군대를 습격하여 60명의 병사들을 죽였다. 4월 17일에는 모문룡의 군사들이 용골산성의 첩서를 가져가던 사람을 살해했으며, 안융창에 있던 난민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마구 죽였다. [[평안도]] [[정주시|정주]]에 피난 갔던 조선 백성 1만여명을 공격하였으며, 이들은 물에 뛰어들어 3백여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급히 병력을 보내 모문룡을 막도록 했고, 충돌이 벌어졌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묘호란]] 3개월 뒤인 6월에는 군선 50여 척을 이끌고 [[평안도]] [[의주부]]로 향했으나, 후금군 기병 20여명을 만나자 모문룡의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군선에 올라타서 도망가버렸다.[* 이것이 모문룡 군사들이 가진 진짜 약점이었다. 세상에 정상적인 군대라면 고작 적군 기병 20여 명을 만났다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는 모문룡이 거느린 군사들이 얼마나 기강이 엉망이고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중에는 조선에 대한 횡포가 점점 심해져서 [[인삼]]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 고관이나 후금에 보내는 [[뇌물]]로 쓰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를 접견한 회례관 황호는 “남의 재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과 같다.”고 혹평했다. 황호가 “지금 [[조선]]도 국고가 탕진되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하자 모문룡은 앙심을 품었다. 1628년 2월 26일, 모문룡은 "내가 하늘의 [[점성술|별자리를 보니]] 매우 불길한 징조가 있어,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선의 종묘사직이 망한다"는 악담을 보냈다. 11월 22일에는 [[명나라]]로 파견되는 조선의 사절단인 동지사 일행이 가진 [[은]]과 인삼을 강탈했다.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조공]]물을 마음대로 빼앗아간 것이다. 급기야 모문룡의 하인 왕학승이 같은 집 종 15명을 거느리고 [[평양]] 인근의 군현들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약탈을 하고 심지어 고을 [[수령]]을 붙잡아 가두고 모욕하는 짓까지 벌였다. 1629년 3월, 가도에 가서 모문룡의 동정을 살피고 온 조선의 특진관 [[이경직(1577)|이경직]]은 “그의 군세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으며 군대 수를 과장하고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명나라]]에 거짓 보고나 올리고 있습니다. 도망쳐 온 명나라 백성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군율도 엉망이며, 병력과 장비도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경직은 모문룡군은 전혀 군사적 잉여라고 생각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