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동성당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동성당 일제강점기 서울역사아카이브.jpg|width=100%]]}}} || || {{{#fff '''일제강점기'''}}} {{{#fff '''명동성당'''}}} || 일제강점기에 가톨릭 교회는 [[니콜라 빌렘|빌렘]] 신부가 [[안중근]] 의사의 동갑내기 사촌 [[안명근|안명근 야고보]]에게 얻은 정보를 일제에 밀고한 대가로 당시 일본인과의 성당 부지 소송 문제에서 이득을 얻고자 했다. 그 결과 일제는 안명근을 포함하여 [[신민회]]소속 독립운동가 105명을 [[105인 사건|일망타진]]하며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명동 성당은 하사 받은 부지로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으며 그 부지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일부이다.[[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1554|#]]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5일에 (황국)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고 [[일본군|황군]] 위문금을 모금한 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민간 쇠붙이 생필품이나 철로 등과 마찬가지로, 군수품으로 쓴다며 종탑의 종을 공출당할 뻔했다. 이때는 가톨릭 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자에게 금속품을 일제에 헌납할 것을 장려하던 시절이다. 이에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는 종을 치는 끈을 거두고 종탑을 폐쇄했다. 그래서 종은 무사했지만, 대신에 성당 제대 앞에 있던 철재 [[영성체]] 난간{{{-3 (제단과 신자석을 분리하는 분리대)}}}이 뜯겨져 목재로 교체해서 지금에 이른다. [[6.25 전쟁]] 때는 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위기를 모면했다. 전쟁 당시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은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국 가톨릭에 제안했다. 하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 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https://news.v.daum.net/v/19990617183900183|#]][[http://mdsd.or.kr/bbs/content.php?co_id=1010&tabs=2&tabs2=5|#]][[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655201&path=201610|#]] 그 후 1947년, 1973년, 2009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B3AH.jpg|width=100%]]}}} || || {{{#fff '''이재명 의사 의거비'''}}} || 그렇다고 20세기의 부끄러운 역사만 있는 장소는 아니어서, 개신교 신자의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12월 22일에는 개신교 신자 [[이재명(독립운동가)|이재명]] 의사가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빠져나오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성당 언덕 아래의 길가에서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력거꾼인 [[박원문]]이 이를 가로막았다가 칼에 찔려 그가 대신 죽고 실패했다. 이완용도 칼에 찔렸지만, 당시 최고 흉부외과 의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이때 이완용이 죽었다면 역사가 묘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