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맹자 (문단 편집) === 중국 ===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부터 《맹자》를 공부하는 박사 직위가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가치는 인정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한 무제]] 때 벌어진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에 관한 논쟁을 묘사한 《[[염철론]]》에서도 맹자가 공자, 순자 등과 나란히 언급된다. 또 《[[한서]]》 <고금인표>에서 맹자는 [[자사]], [[순자]], [[양웅]][*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한테 지나가는 말로 까이는 등 후대 평가가 대체로 박하여, 그냥 [[왕망]]에게 아첨한 어용 지식인 정도로 알려지곤 하지만, 나름 유학자로서 《법언》이라는 논어의 형식을 모방한 책을 남겼다. 그래서 이 책이 양웅을 존경한 이들에 의해 '한나라의 논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태현경]]》이라는 유가와 도가를 아우르는 우주론 서적, 고대 언어 연구의 단비와 같은 《[[방언]]》이라는 각 지방 방언집도 남기는 등 확실히 대학자의 면모가 있었다. 또 그는 맹자와 순자를 나란히 존경했고 인성론에서는 이 둘을 절충한 선악혼재설을 제시하였다.] 등과 함께 2등급인 상중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공자의 적통이자 유가 2인자로 확고하게 평가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자가 [[이사]], [[한비자]][* 한비자가 정말 순자의 제자였는가에는 논란이 있다.], 부구백[* 정치에는 나가지 않고 유가 경전의 보존, 정리 및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런 영향으로 《[[예기]]》 등에 순자 학맥이 강하게 흐르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부구백의 제자로 훗날 [[한 고조]]를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야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설득한 [[육가]]가 있다.] 등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고 [[순유]], [[순욱]] 같은 빵빵한 자손을 남긴 데 비하여, 맹자는 뚜렷이 이름을 남긴 제자도 없었고 자손도 상대적으로 시원찮았으므로 영향력이 뒤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당시만 해도 맹자는 결코 성역이 아니어서, 한 무제 때 유교의 국시화를 확정지은 [[동중서]]도 맹자 성선설 등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바 있다. 또 --모두까기-- [[왕충(후한)]]은 《논형》에서 유가의 맹자를 법가의 한비자보다도 더한 강도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기(후한)]]가 맹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그를 아성(亞聖)으로 칭송하며 주석서를 내기도 했다.[* 조기가 <<맹자>>를 다듬은 체계가 오늘날에도 큰 변화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양한(兩漢)과 [[위진남북조]]를 거쳐 유교가 지나치게 위선화하여[* 신나라의 [[왕망]], 위나라의 [[조비]], 서진의 [[사마염]] 이상 이하 기타 등등이 유교 핑계 대면서 어떤 짓들을 자행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지식인들의 자포자기를 낳고, 도교가 흥하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동안 맹자의 중요성도 잊혀져 있었다가, [[당송팔대가]]의 필두인 [[당나라]]의 [[한유]][* 의도치 않게 [[한비자]]를 격하시킨 원흉(?)이다. 한유가 맹자 재발견 등 유교에 공헌을 많이 하여 후대 유학자들에 의해 '한자'로 칭송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원래 '한자'로 불리던 '한비'의 우선순위가 밀려서 '한비자'가 되고 말았다.]가 일종의 유교 근본주의 운동을 전개하여 외래 사상 불교를 배격하고 미신적, 보신주의적, 현실도피적 도교를 질타하며, 정치참여적 전통 사상인 유교를 재평가하면서 맹자를 공자 이래 유교의 적통으로 치켜세운[* 이때 한유는 순자와 양웅은 크게는 순수하되 작게는 하자가 있는 인물, 맹자는 '''순수하고도 순수한 인물'''로 평가했다.] 이후, 서서히 다시 맹자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북송]] 때에 이르러서는 [[구양수]], [[사마광]], [[왕안석]], [[소식]] 등 명사들이 정치개혁을 두고 갑론을박하던 와중 맹자의 취급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며 관심도와 파급력이 더 높아지게 된다. 개혁파(신법당)였던 왕안석의 집권기에 맹자가 공묘(공자 사당)에 공식 배향되고 <<맹자>> 역시 과거 교재로 채택이 되게 되었는데, 보수파(구법당)의 사마광 등은 맹자 특유의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발언들이 (구법당 기준으로) 앞뒤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막 지르고 보는 신법당 정책들의 명분이 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마광이 짐짓 고증학적 비판 형식을 취하여 맹자를 까는 <<의맹>>을 지었다.] 또 당시는 형이상학적 색채가 강한 도교, 불교가 이미 깊이 침투하여 우주론과 인성론이 식자들의 주요 관심거리였기에 자연히 맹자 천명설, 성선설 등이 주목을 받게 된 경향도 있었다. 범구법당 인사들을 보자면 사마광(구법당 영수), 소식 등은 성선설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에서 맹자를 비판했는데, [[주돈이]]의 제자였던 [[정호]], [[정이]] 형제 등은 비록 왕안석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의 태동을 이끌며 맹자를 전방위적으로 옹호했다. 이후 이 성리학을 완성 수준에 이르게 한 인물이 [[남송]]의 [[주자(철학자)|주희]]이다. 주자(주희)는 사서([[논어]], [[맹자(경전)|맹자]], [[대학(경전)|대학]], [[중용]])라는 개념을 만들어[* 사실 이 아이디어 자체는 정호, 정이 형제 때부터 나온 것이다.], 여기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이 《주자집주》이다. 이후 성리학을 공부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주자의 관점으로 맹자를 바라보았기에, 책 《맹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자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주자가 맹자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했다고는 볼 수 없는데, 역성혁명을 주장한 맹자와는 달리, 주자의 [[이기론]]은 기(氣)에 깨끗함과 혼탁함이 있어서 천하고 귀함의 신분질서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펼쳤기 때문. 주자가 맹자를 중히 여긴 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유학의 적통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맹자의 논리는 오히려 반체제적인 면을 보였다. 반면, 주자의 논리는 "학문이 높아 과거제에서 성공한 자는 인격에 있어서도 자신의 혼탁함을 극복한 것이다"고 하여, 귀함과 천함이 태생적으로 존재한다는 기존 체제에 매우 친화적인 주장이었다. 주자의 이기론이 다만 후대에 악용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주자는 이기론을 만들면서 처음부터 천하고 귀함의 차이를 설명하였음이 분명하기에, '귀천의 분류'가 상관없다는 유학자들은 주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한다.] 주자 생전에는 그 학문이 이단스럽다며 탄압받기도 했고, 상산 육구연 등 학문적 라이벌과의 마찰도 있었다. 그러나 육구연도 어쨌든 맹자의 추종자이고 해석을 달리하는 사람일 따름이었고, 성리학을 비롯한 맹자 계열의 의기 높고 정신수양적인 유교 성향은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에 허구한 날 핍박받던 송나라 사람들을 독려할 시대정신으로 적합했기에 크게 확산되었다. 남송 말 [[문천상]][* '공자께서는 인(仁)을 이루라 하시고 맹자께서는 의(義)를 취하라 하시었네! 오직 그 의를 다하여 인에 이르는 것이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서 [[쿠빌라이 칸]]의 여러 년에 걸친 회유를 거부하고서 끝내 순절했다.] 등 충신들은 공맹의 말을 나란히 금과옥조로 부르짖으며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니 송나라 때야말로 중국의 맹자 숭배 절정기였으며, 맹자가 공자의 적통이요 유가의 2인자로 확정된 시기였다. [[원나라]] 때에도 성리학이 권력 공고화에 유용하다는 판단하에 수용되었고 이에 따라 맹자도 계속 숭상되었으며, 추국아성공의 칭호가 이때 공식적으로 올려진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배워 온 유학자들이 [[한국]]에도 본격적인 맹자 숭배 전통을 들여오게 된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은 《맹자》이루장구 하편의 "군주가 신하를 자신의 수족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가슴과 배처럼 여기고,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쓰레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 君之視臣如手足 臣視君如腹心 君之視臣如土芥 臣視君如寇讐.]는 구절을 보고 격노하여, 맹자를 문묘에서 들어내고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려고 했었다. 이에 신하 전당(錢唐)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두 번씩이나 간하면서 말하기를, "신(臣)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도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臣爲孟子死 死有餘榮]라고 맹자를 두둔한다. 주원장이 그 말을 듣고는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자신의 주장에서 한 발 물러나, 맹자의 역성혁명에 관련된 구절만 삭제해서 책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를 '맹자절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주원장 본인이 원나라의 백성이면서 정치가 흔들리던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로 나라를 세워 황제가 된 판이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사상이 바로 맹자였는데 그 맹자를 부정하면 자신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당성 때문에라도 맹자를 복권해야 했던 건 영락제도 마찬가지.] 주원장 사후, [[정난의 변]]으로 즉위한 [[영락제]]가 맹자절문을 폐기함으로써 명나라에서 맹자 탄압은 약 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전당은 이때의 일로 사후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나. 아무튼 이렇게 맹자는 복권되었고, 약 100년 뒤 주희에 버금가는 재해석자 [[왕양명]]도 얻게 된다. [[청나라]] 때는 [[문자의 옥]]으로 인해 맹자적인 의기는 위축되었다. 얌전히 고문헌 연구하는 [[고증학]]이나 파게 되어 [[한비자]], [[순자]] 등의 재평가 등의 성과는 있었으나 맹자 인기는 전에 비해서는 시들해진 면이 있었다. 청 말~개화기가 되면 공자와 도매금으로 묶여서 수구의 상징이 되거나 혹은 혁명론 등에서 착안하여 혁신 정신의 상징이 되는 등 평가가 또 매우 복잡해졌다. 현대 중국에서는 다시 맹자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맹자를 숭배했고, 자신의 혁명론에 맹자를 인용하기도 했다. [[https://baijiahao.baidu.com/s?id=1694172779678634219&wfr=spider&for=pc|#]] --하지만 [[문화대혁명]] 땐 왜 그랬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