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위안훙 (문단 편집) === 중화민국 북양정부 대총통 복임 ===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직예군벌]]의 승리로 끝나자 우페이푸는 안복국회에서 선출된 [[쉬스창]]을 몰아내기 위해 안복국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법통중광' 즉, 구국회 복구를 주장했다. 이러면 쑨원의 [[호법운동]]도 정통성을 잃을 것이니 중국 내부의 다른 정권들을 견제할 수도 있다는 것이 우페이푸의 논리였다. 량치차오와 정학회, 익우사, 헌정연구회 등의 국회의원들도 동조하였다. 우페이푸가 비밀전문을 보내 위협하고 국회의원들이 베이징에 모여 쉬스창의 퇴진을 요구하자 쉬스창은 6월 2일 칭병하여 퇴진하고 톈진의 사저로 돌아가버렸다. 절강독군 [[루융샹]] 등 [[안휘군벌]]의 잔여세력은 리위안훙의 추대가 직예군벌의 득세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두세사람의 군인의 논리로 법률을 변경할 수 없으며 두세사람의 의원의 주장이 전체 국회를 대변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전문을 보냈지만 쑨원 역시 우페이푸의 법통회복 주장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표하는 등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후 리위안훙이 1922년 6월 11일 다시 대총통에 선출되어 6월 13일 구국회 복구를 선언했다. 8월 1일 국회가 개막하고 이후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으나 [[황옌페이]], [[우페이푸]], [[탄옌카이]] 등 주요 내각 구성원들이 취임을 거부하였는데다가 중의원 의장 [[우징롄]]이 내각 불신임을 천명하면서 1922년 8월, 구국회 개막과 함께 붕괴되었다. 8월 6일, 리위안훙은 신임 국무총리로 [[탕사오이]]를 임명하였으나 탕사오이 본인이 취임을 거부하였는데다가 우페이푸가 탕사오이의 임명에 극렬히 반대하면서 내각이 임명동의안 심의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9월 14일, 탕사오이 내각도 붕괴되었다. 그 다음을 이은 총리는 탕사오이 집권 시기에 국무총리를 대행하고 있던 [[왕충후이]]의 내각이었는데 왕충후이는 우페이푸의 친위파벌인 낙양파와 더불어 [[뤄원간]] 등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입각시켜 낙파내각, 호인정부라 불렸다. 왕충후이는 [[후스]]로부터 연성회의를 즉각 소집하여 남북통일과 군축을 실시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직예군벌의 눈치를 살피느라 실행에 옮기지 않았고 이 때문에 지식인들로부터 군벌의 똘마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1922년, [[량스이]] 내각의 붕괴 이후로 겉잡을 수 없던 북양정부의 국고 고갈이 절정에 달하여 교직원, 군인, 공무원들이 모두 파업을 선언하는 등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쳐왔다. 결국 중의원은 우페이푸의 측근인 내무총장 손단림과 교통총장 고은홍을 낙하산 출신이라는 이유로 탄핵했다. 하지만 우페이푸의 비서장 손단림의 입각은 왕충후이 내각이 우페이푸의 지지를 받는 결정적 증거요 상징이나 마찬가지였고 왕충후이는 내각임명동의안을 아예 제출하지 않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려 했으나 결국 국회의 분노를 사서 10월 중순에 총사퇴했다. 리위안훙은 왕충후이를 설득하여 사퇴를 막았으나 중의원의 계속된 공격과 조각문제에 시달리던 왕충후이가 자신은 정식 내각이 아니라면서 [[뤄원간 사건]] 후인 11월 25일에 불명예스럽게 총사퇴해야 했다. 이 시기에 그와 큰 관련은 없지만 [[2.7 사건]]과 [[임성 사건]]이 일어난 바가 있다. 이후 차오쿤을 옹립하려는 직예군벌의 보정파는 헌법 제정을 위해 리위안훙의 중임을 요구하는 제헌파와 리위안훙을 물리치기 위해 리위안훙을 수비하는 경비대를 철수시키고 수도와 전화를 끊어 외부와 연락을 끊게 했다. 이어 육군검열사 펑위샹이 군비를 달라고 리위안훙을 위협하고 세관을 점령해 정부의 수입을 끊었다. 이어 공민단이 리위안훙의 집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벌였으며 각국 외교관들이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애초에 군비는 직예군벌이 장악하고 있는데 재정권도 없는 리위안훙에게 군비를 달라고 위협한 것부터가 리위안훙을 쫓아내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짓이었다. 노골적인 하야 압박에 분노한 리위안훙은 1923년 6월 13일 하야하여 톈진으로 떠났고 하야 직전, 직예군벌에 대한 보복으로 국무총리 장소증을 면직시키고 농상총장 이근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후 총통의 직인을 프랑스 병원에 숨겨버렸다. 이에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 고능위는 직예성장 왕승빈에게 지시하여 6월 13일 톈진으로 가는 기차 안에 있던 리위안훙을 기차 안에 구류시킨 후 직인이 있는 곳을 실토하게 한 다음에 6월 14일 새벽 4시에야 기차에서 내리게 해주었다. 이후 고능위가 총통 권한대행을 한 후 1923년 10월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선거를 통해 대총통에 당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