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위안훙 (문단 편집) === 중화민국 북양정부 대총통 계임 ===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단행된 후 참정원 원장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영향력을 견제한 위안스카이에 의해 사실상 연금되어 있었고 보신을 위해 정사에 대해는 함구하고 위안스카이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사돈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군주제에 반대하여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일으킨 후 참정원 원장직에서 사직했고 12월 무의친왕에 봉해졌으나 단호하게 고사했다. 이 때문에 황태자가 되고 싶어했던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이 그를 미워하여 호북 교섭원 호조동 등을 시켜 리위안훙을 감시했다. 리위안훙은 첩 여본위에게 베이징을 탈출할 것을 얘기했는데 여본위는 호조동에게 포섭된 상태라 이 정보가 새어나갔고 500명의 군경이 리위안훙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리위안훙이 목적지를 밝히지 않아서 별 다른 일은 없었다. 이후 위안스카이 앞에서 스스로를 신하로 칭하지 않아도 되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등이 [[운남]]에서 일으킨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위안스카이의 여러 측근들까지도 위안스카이와 단절하는 지경에 이르자 위안스카이는 전국적인 반발에 못 이겨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요독증으로 사망한 이후에 법률에 따라 6월 7일 대리총통에 취임, 돤치루이를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임명했다. 이에 각국 공사단이 방문하여 리위안훙의 취임에 만족을 표시하며 도의적인 지지를 약속했고 특히 일본이 가능한 범위에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원조를 해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후 리위안훙의 계임 근거가 1914년 신약법에 있는지 1912년 임시 약법에 있는지 충돌이 있었으나 남방이 임시 약법의 복구를 강력히 요구하고 펑궈장 등 북양군벌도 임시 약법 지지로 선회하였으며 6월 25일 해군이 임시약법 복구를 요구하며 독립을 선포하자 돤치루이도 임시 약법 부활에 동의하게 되어 남방 군무원의 요구에 따라 1914년의 신약법을 폐기, 임시약법과 6월 29일 구국회 복구를 선포하여 [[호국전쟁]]이 종결되었다. 8월 1일 국회가 복구되자 리위안훙은 국회에서 취임선서를 하였다. 한편, 당시 국무총리였던 [[돤치루이]]와 1차세계대전 참전문제 등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하였는데 이를 [[부원지쟁]]이라 한다. 1917년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서 면직시켰다가 돤치루이가 임시 정부와 임시 의회를 수립하여 안휘의 [[니쓰충]], 하남의 [[자오티]], 직예의 [[차오쿤]], 봉천의 [[장쭤린]], 섬서의 [[진수모]],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등에게 지시, 각 성의 독립을 선동하는 식으로 저항하자 겁을 먹고 장강순열사 겸 안휘독군 [[장쉰]]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베이징에 입성한 장쉰은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강요하였으며 이 때문에 6월 12일 국회를 해산해야 했다. 장쉰은 급기야 7월 1일 [[장훈복벽]]으로 [[선통제]]를 복위시키고 임시 약법 체제를 폐기하였다. 리위안훙은 일등공작에 봉해졌지만 장쉰과 그의 오합지졸 군대의 막나가는 복벽에 동조하지 않고 돤치루이를 7월 2일에 다시 국무총리로 복직시키고 부총통 [[펑궈장]]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준 후 자신은 일본공사관으로 도주했다. 이후 돤치루이가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을 토벌하고 복벽을 취소하였으나 량치차오의 중화민국은 이미 망했으니 새로 건설해야 한다는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국회와 약법을 복구하는 것은 거부하고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등 독재를 일삼았다. 돤치루이의 독재에 반발한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계하여 [[1차 호법운동]]을 일으켰다. 쑨원은 리위안훙에게 광저우로 남하하여 [[호법운동]]에 참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리위안훙은 복벽 진압 후 대총통 자리를 돌려주겠다는 펑궈장의 제의에도 대총통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대원수로 추대되어 호법정부를 구성하였는데 돤치루이가 무력토벌을 감행하면서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호법전쟁은 북에서 주화파가 득세하고 남에서 쑨원이 축출되는 혼란 중에 흐지부지해졌다. 1920년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우페이푸]]의 [[직예군벌]], [[장쭤린]]의 [[봉천군벌]]의 연합이 [[안직전쟁]]을 벌여 안휘군벌이 몰락하고 천하는 직예군벌이 장악하게 되었다. 남방에서는 쑨원이 근성있게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2년 [[천중밍]]의 [[영풍함 사건]]으로 쫓겨나는 등 큰 소득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