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문단 편집) === 창시 ===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는 [[경주 최씨]]로, 어릴 때 이름은 복술(福述)·제선(濟宣)이였으며 후일 어리석은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자신의 의지의 표현으로 제우(濟愚)라고 개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집안으로 아버지 최옥은 벼슬을 하지 못해 가세가 기운 데다가 그의 어머니 곡산 한씨와 아버지와의 결혼이 재가였기에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그가 10살 때 사망한다. 13세 때 [[울산]] 출신 박씨와 결혼했으나 17세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셔 결국 처가인 울산으로 옮겨간다. 울산으로 옮겨간 후 1855년 을묘년 어느 날 한 승려가 찾아와 자신은 금강산에서 왔는데 백일 동안 치성을 드리던 중 이상한 책 한 권을 얻게 되었는데 해석할 사람을 찾아 다니던 중이라며 그 책을 최제우에게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것을 을묘천서사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비체험으로 최제우는 1859년 다시 구미 용담으로 돌아와 입구에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 써서 붙이고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에 매진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비서를 [[기독교]]의 [[성경]] 혹은 <천주실의>라고 주장하나, 주류 학계와 천도교 측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사상적인 부분에서도 기독교와 동학은 차이가 분명하며, 당시 이미 널리 알려진 기독교계 서적을 굳이 비서로 왜곡할 이유가 없고 최제우는 울산으로 옮겨가기 전 3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갖가지 세상 경험을 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기독교는 물론이고 천주실의가 동아시아 전체에 알려진 상황이었고, (일반인을 위한 한글 번역본과 그 필사본도 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6280&cid=40942&categoryId=31575|*]]) 청의 <천학초징 / 천학재징>, 일본의 <벽사관견록>, 한국의 <서학변>, <천학문답> 등 천주실의와 기독교를 비판하는 서적까지 나올 정도로 널리 퍼진 지 오래였다. 즉 천주실의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책이었던 것이다.] 이후 부분은 [[천도교]] 문서 참조. 남학 계열에서는 그가 수도 생활을 할 때, 조선 후기의 [[도사]]인 연담 이운규의 제자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최제우, 김일부(김항)[* 남학의 분파인 정역(正易)의 창시자. 유교 중심적이다.], 김광화(김치인)[* 남학의 다른 분파인 광화계의 창시자. 불교, 특히 미륵 신앙 중심적이다.]와 동문 출신, 혹은 동문수학한 사이라는 것이며 시천주 주문 또한 이운규에게서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셋의 연령 차이가 있고, 행적 역시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 설은 부정되고 있다. 셋 모두 후천개벽을 자신들의 중심 사상으로 놓았던 점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서학에 대항하는 동쪽의 학문이라는 동학을 창시하였고,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외치고,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동학이 서서히 퍼져나가자 조정에서는 민심을 현혹시킨다고하여 최제우와 그의 추종자들을 압송하여 1864년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