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명왕릉 (문단 편집) === 진짜 동명왕의 무덤인가? === 북한이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무덤의 구조는 평양 천도 이전인 국내성 시절 고구려에서 무덤을 지을 때 주로 썼던 [[적석총]](돌각담무덤) 양식과 평양 천도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석실분(돌간흙무덤)의 중간 형태를 띤다.[* 북한에서 이런 형태의 무덤은 용강큰무덤 밖에 없다고 한다.] 2. 동명왕릉의 무덤 옆에 위치한 절터 우물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이 지어진 목적은 능(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이 '능'이란 왕의 무덤을 의미한다.[* 설령 이 무덤이 실제 동명성왕릉이 아니라고 해도, 정릉사 곁에 있으니 그에 준하는 급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졸본(홀본)에서 사망해 졸본에 묻혔을 동명성왕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같이 옮겨온 것으로[* 북한이 현대에 와서 뜬금없이 내놓은 건 아니고 이미 안정복 같은 조선 시대 실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주장이다.], 외적의 침입 때마다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다보니[* 293년 [[봉상왕]] 때 [[전연]]의 [[모용외]]가 쳐들어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쳤고, 342년 [[고국원왕]] 때엔 [[모용황]]이 [[환도성]]을 불태우고 퇴각하면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아예 시신까지 가져가버렸다.'''] 수도를 옮기면서 동명왕릉 같은 중요한 무덤은 평양으로 옮겨서 관리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 이건 고려나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고려궁지]]로 천도할 때 세조, 태조의 시신을 함께 모셔갔고, 조선은 선조가 종묘의 신위를 들고 파천했다. 조상을 숭배하는 한국사에선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북한 정권의 프로파간다라는 점을 제외하면, 평양 용산의 무덤이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이미 고려, 조선 시대부터 존재해 온 것으로 오래되기는 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및 조선 왕조에서 편찬된 《[[고려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평양의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이라고 기록했고, 18세기 조선 후기의 사학자 [[안정복]]은 자기 저서 [[동사강목]]에서 현재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 동명(東明) 때 평양은 낙랑군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동명이 어떻게 이곳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응제시주]](應製詩註)》에, > "주몽이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그 소재는 알 수 없으나 당(唐)의 이적(李勣)이 아뢴 말에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까지 17역(驛)이다.' 하였으니 거리가 서로 너무 멀다. 아마 일찍이 [[구제궁]](九梯宮)을 짓고 와서 놀다가 죽어 이곳에 장례한 것이리라." > 하니, 이 말 역시 잘못이다. 대개 고구려가 [[관구검|관구(毌丘)]]ㆍ[[모용황|모용(慕容)]]의 난을 만나 도읍이 잔파(殘破)되고 선왕의 능묘가 헐려 나라를 옮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왕의 능침도 따라 남쪽으로 옮겨서 동명묘를 지금 [[중화군|중화]](中和)의 용산(龍山)에 장례하였으므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고려]] [[고종(고려)|고종]]이 몽고(蒙古)의 난을 만나 [[고려궁지|강화(江華)]]로 천도하고 태조 이하 모든 능묘를 죄다 이장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상고하건대 《광여기(廣輿記)》에, > "요동(遼東) 복주(復州)[* 지금의 중국 요령성 대련시 와방점시(瓦房店市). 요동반도 서안에 해당한다.]에 명왕산(明王山)이 있는데 고구려의 왕자 동명을 이곳에 장례하였다." > 하였으니, 혹시 처음 이곳에 장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 > 《[[동사강목]]》 부록 상권 고이(考異) 中 '동명을 용산에 장사지내다' 북한에선 평양에 있는 것이 무덤(墓)이고 졸본(홀본)에 있는 것은 사당(廟)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대형 고구려 고분인 [[장군총]] 위에서 사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물 터가 발견된 데다 《[[삼국유사]]》에서 [[수로왕릉|수로왕의 무덤(墓)]]을 두고 버젓이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표기했고, 고려시대엔 용산 무덤이 동명왕묘(廟)와 묘(墓)로 혼용됐으니 무덤과 사당이 구분됐다고 보기엔 증거가 희박하다. 이 무덤이 정말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면, 실제 유해를 모신 무덤을 평양 코앞에 두고선 고작(?)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 졸본(홀본)까지 갔다는 것이기에 영 부자연스럽다. 이에 대해선 고구려 역대 국왕들이 평양 천도 이후에도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꼭 '평양에는 동명왕릉을 만들지 않았다'는 논거가 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평양 천도 후 가장 왕권이 강력했던 장수왕, 문자명왕과는 달리 안장왕 이후 왕들이 졸본에 간 배경에는 '시조묘 참배'라는 문자적인 명분 외에 졸본이나 국내 지역 세력을 회유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9/04/241761/|#]]. 이 무덤이 진짜 동명성왕의 무덤인가에 대한 사실 여부나 북한 정권 및 학계의 정치적 노림수와는 별개로 고려와 조선에선 이미 평양 용산의 무덤을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고려 시대에 이 무덤은 동명왕의 무덤으로 간주되어 국가가 향축을 내려 제사지냈고, 조선 말기까지 쭉 이어졌다는 점에서 '전승' 자체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 무덤이 시조 동명성왕의 진짜 무덤이 아니라고 한들 무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고구려의 왕릉급 무덤이며, 만약 이 무덤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장수왕릉'으로 확인되면 그 의미가 어마어마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