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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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omb of King Dongmyeong.jpg

파일:동명왕릉 전경.jpg

파일:동명왕릉 무인상.jpg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이름
한국어
고구려 고분군
영어
The Complex of the Koguryo Tombs
프랑스어
Ensemble des tombes de Koguryo
국가·위치
북한 평안남도·평양시·황해남도·남포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ⅰ)[1], (ⅱ)[2], (ⅲ), (ⅳ)[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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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장.svg



지정번호
제 36호
이름
조선어
동명왕릉
한자
東明王陵
위치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규모사항
지름 34m, 높이 11.5m
시대
고구려 5세기
지정연도
1994년[4]
}}}

1. 개요
2. 사서 원문 기록
2.1. 고구려 기록
2.2. 고려, 조선 기록
2.3. 고려, 조선의 참배 역사
3. 상세
3.1. 북한의 개건(改建)
3.2. 진짜 동명왕의 무덤인가?
3.3. 다른 왕의 무덤일까?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평양시 용산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이다. 고려시대부터 용산의 무덤이 '동명왕묘(東明王墓)'[5]로 등장했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후 1891년 조선 고종 때 '동명왕릉(東明王陵)'으로 추봉되어 지금까지 전해졌다.

이 용산 동명왕릉이 진짜 고구려 시조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실질적으론 '동명왕릉'으로 명명된 용산 무덤을 지칭하는 것으로,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없어 "전(傳) 동명왕릉"이라고도 한다.


2. 사서 원문 기록[편집]



2.1. 고구려 기록[편집]


더 이상 세위를 즐겁게 여기시지 않으시니, 하늘이 황룡을 내려 보내 맞이했다. 왕께선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아 승천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인이 남긴 광개토대왕릉비는 용산을 언급하지 않고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홀본[6] 동쪽에서 왕이 승천했다고 한다. 비문은 이에 앞서 왕이 홀본 서쪽 성의 산 위에서 도읍했고, 이후 홀본 동쪽에서 승천했다 하니 국초의 왕릉은 홀본에 있었다.


2.2. 고려, 조선 기록[편집]


재위 19년째 가을 9월, 왕이 승하했다. 나이 40세였고 용산에 장례했다. 호하여 동명성왕이라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


재위하신 지가 19년 9월에 / 在位十九年九月

하늘에 올라 다시 돌아오지 않으시니 / 升天不復迴雲輧

성스러운 아들 유리[7]

가 뒤를 잇고 / 聖子類利[8]來嗣位

남기신 옥편 장사지내어 봉분을 세웠도다.[9]

/ 葬遺玉鞭成墳塋[10]

-

제왕운기 고구려기


東明王墓在府東南, 中和境龍山, 俗號珍珠墓.

동명왕묘(東明王墓)가 있다. 부(府)의 동남쪽 중화현(中和縣) 경계의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珍珠墓)라고 부른다.

又仁里坊有祠宇, 高麗以時降御押, 行祭, 朔望亦令其官, 行祭. 邑人至今有事輒禱. 世傳東明聖帝祠

또 인리방(仁里坊)에 사우(祠宇)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御押)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라 한다.

-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연혁


東明王墓在府巽方三十里許中和境 龍山。 皆以畫班石營壙, 世云眞珠墓, 李承休記東明王事跡曰: "乘天不復回雲輧, 葬遺玉篇成墳塋。" 卽此也。

동명왕묘(東明王墓)가 평양부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경내 용산(龍山)에 있다. 모두 화반석(畫班石)으로 광(壙)을 영조(營造)하였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이승휴가 동명왕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 가져다 무덤을 이루었다."한 것은 곧 이것이다.

又仁理坊有祠宇, 高麗以時降御押行祭, 朔望亦令其官行祭, 邑人至今有事輒禱, 古老傳云: "東明聖帝之祠也。

또 인리방(仁理坊)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御押)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 · 보름에도 또한 그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邑人)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東明聖帝之祠)이라." 한다.

-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東明王墓。在龍山。俗號眞珠墓。

○世傳高句麗始祖常乘麒麟馬,奏事天上,年至四十,遂昇天不返。太子以所遺玉鞭葬於龍山,號東明聖王。詳見寧邊及成川。

○李承休詩:“昇天不復回雲輧,葬遺玉鞭成墳塋。”

동명왕 묘(東明王墓)는 용산(龍山)에 있는데 세상에서는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 세상에 전하기를, 고구려 시조가 항상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하늘에 일을 아뢰었는데 40에 이르러 결국 승천(昇天)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태자가 남긴 옥편을 용산에 묻어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 영변(寧邊) 편과 성천(成川)에 자세하다.

○ 이승휴의 시에, “승천한 구름수레[雲輧]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남긴 옥편을 묻어 분영(墳塋)을 이루었네.”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2 평안도 중화군 능묘

고구려 이후 고려의 기록부터 왕릉의 소재지가 졸본(홀본)에서 용산으로 바뀌어 나오며, 용산의 왕릉에서 제사가 지내졌다[11]. 조선은 고려의 기록과 제사를 그대로 물려 받았다.

고려시대엔 동명왕릉 외에도 동명성제사[12]가 있었는데, 민간에서 동명왕이 상제와 동급인 신으로 높혀진 것이다[13].

2.3. 고려, 조선의 참배 역사[편집]


王至西京. 謁聖容殿, 分遣人, 祭平壤君祠·東明王及木覓廟.

왕이 서경(西京)[14]

에 도착하였다. 성용전(聖容殿)[15]을 참배하고, 사람을 나누어 파견하여 평양군사(平壤郡祠)와 동명왕묘(東明王廟), 목멱묘(木覓廟)[16]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

고려사 권30 세가 권제30 충렬왕 19년(1293년) 10월


上命召入李寅燁, 從容問西事。 寅燁陳達數事, 皆瑣細, 或申論前所啓請者, 又請收用箕子後裔, 每歲修治江東檀君墓、平壤 東明王墓, 竝允之。

임금이 이인엽(李寅燁)을 명소(命召)하여 들어오게 해서 조용히 관서(關西)의 일을 하문(下問)하니, 이인엽이 두어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모두 잗단 것으로, 더러는 앞서 아뢰고 청한 것을 거듭 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기자(箕子)의 후손을 거두어다 기용하고 해마다 강동현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부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모두 윤허하였다.

-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1697년) 7월 4일 임오 1번째 기사


引見入侍時, 監賑御史李寅燁所啓, 檀君墓在於江東, 東明王廟在於平壤, 今至蕪廢, 行路嗟傷, 宜令本道, 每年修治, 俾無耕牧之患矣。上曰, 分付本道, 可也。

불러다 보고 입시하였을 때 감진어사 이인엽이 계한 바, 단군묘가 강동에 있고 동명왕묘가 평양에 있는데 지금에 이르러 풀이 무성하도록 버려졌으며 가는 길이 많이 무너졌으니 마땅히 본 도(평안도)에 영하여 해마다 수리하게 하고 농목하는 고충이 없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상이 "본 도에 나누어 맡기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

승정원일기 372책 (탈초본 19책) 숙종 23년 7월 4일 임오 17/18 기사


命禮曹, 遣官致祭于中和 東明王墓, 從知經筵金取魯之言, 而以墓新修也。

예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중화(中和)의 동명왕묘(東明王墓)에 치제하게 하였는데,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으며, 묘를 새로 수축하였기 때문이었다.

-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1732년) 1월 12일 경오 5번째 기사


取魯曰, 箕子墓修改後, 自上有遣近侍致祭之擧, 西路士民, 莫不感聳, 而中和, 有東明王墓, 頹圮陵夷, 久未修築者, 誠爲聖代之欠事, 故臣亦狀聞而修改矣。聞役事已訖云, 當初始役時, 旣自朝家, 下送香祝告由, 則今於畢役之後, 似宜有遣官致祭之事, 故敢達矣。上曰, 自禮曹遣官致祭, 可也。

김취로가 아뢰기를,

“기자묘(箕子墓)를 개수(改修)한 뒤에 상께서 근시(近侍)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으므로 서로(西路)의 사민(士民)이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중화(中和)에 있는 동명왕(東明王)의 묘가 무너지고 퇴락한 것을 오랫동안 수축(修築)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성대(聖代)의 흠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신도 장계로 보고하고 개수하였는데, 들으니 역사(役事)를 이미 마쳤다고 합니다. 당초 역사를 시작하였을 때 이미 조정에서 향축(香祝)을 내려보내 고유(告由)하도록 한 만큼 지금 역사를 마친 뒤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에서 관원을 보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737책 (탈초본 40책) 영조 8년 1월 12일 경오 23/23 기사


기자묘의 사초(莎草)를 수개하는 데 대한 평안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제문(祭文)은 때가 되면 내각(內閣)의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라. 수개할 때에는 감사가 직접 나아가 감동하고 이어서 헌관(獻官)이 되어 제사를 행하라고 미리 하유(下諭)하라. 동명왕묘(東明王墓)는 봄철 순찰을 하고 난 뒤로 또한 탈이 잡히는 곳이 있을 것 같다. 이곳은 영문(營門)과의 거리가 조금 머니 수개할 때와 제사를 설행할 때 지방관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하라는 뜻으로 일체 하유하고, 축문(祝文)은 또한 내각의 지제교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 지어 올리게 하라.”

하였다.

-

일성록 정조 5년 신축(1781) 12월 16일(갑신)


고려, 조선 시대엔 해당 무덤을 가리켜서 모두 동명왕묘(墓, 廟)라고 불렀지만 1891년, 조선 고종 때에 동명왕릉(陵)으로 개칭됐다.[17]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부사과 박종선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고, 평양의 기자를 기자으로 높이는 데에 수반한 조치였다고 한다.

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부사과 박종선(朴鍾善)의 상소 내용과 관련하여 의정부에서 복계(覆啓)한 것에 대한 비지 내에 ‘하문할 것 없이 초기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동명왕(東明王)의 묘를 능으로 봉하는 절목을 마련해야 하니, 삼가 기자릉(箕子陵)에 추봉(追封)한 예대로 능호(陵號)를 동명왕릉(東明王陵)으로 칭하고, 관원을 두는 절목도 또한 전례대로 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28년 신묘(1891) 7월 20일(임오) 맑음



3. 상세[편집]




동명왕릉의 자세한 주소는 북한수도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6호로 지정됐다.

무덤 앞에는 고려시대 하마비[18]가 세워져 있다. 둘레의 산 언덕 진파리무덤떼(고분군)에도 고구려 무덤 수십여 기가 산재한데, 북한은 이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동명왕을 이장하면서 함께 데려온 개국공신들의 딸린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무덤 자체는 단군릉과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북한 당국은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했고, 내부에서 고구려 고분 특유의 벽화 등을 발견했다. 만주 통구의 고구려 고분처럼 3단으로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내부에 석실을 만들어 벽화[19]를 그리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덮었다.


3.1. 북한의 개건(改建)[편집]


1993년 5월 14일, 김일성은 용산 동명왕릉을 개건했다.[20] 작은 고구려식 무덤을 거대 피라미드로 개조한 단군릉 수준의 막장은 아니지만 이 쪽도 여러 무리한 추정을 덧붙여서 상당히 큰 규모로 바꿔놓은 편이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38227093.jpg
▲ 동명왕릉의 전경. 당연히 원래있던 석조물들은 아니고 깔끔한 대리석으로 정비하면서 세운 것들이다.

현재 개건된 봉분의 높이는 11 m다. 유홍준의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북한 측 설명에 따르면 봉분 높이는 원래 9 m 정도였는데, 김일성이 "1500년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서 지금의 높이가 된 것이니 원래 높이는 얼마나 더 컸겠느냐." 하며 비바람에 깎이기 전의 원래의 높이를 계산해 그만큼 더 높이라고 교시를 내린 바람에 과학자들이 1400년 동안의 기후 변화 등을 감안하여 지금의 높이를 계산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등 당시 기사에는 동명왕릉 개건 1년 전인 1992년에 남쪽을 방문했던 북한의 부총리 김달현포스코(당시 포항제철)에 이어 경주시를 방문해 천마총을 보고는 "이 무덤을 보니 동명왕릉의 높이를 높여야겠다." 하고 말했다 하므로[출처] 딱히 과학적인 고증을 살리겠단 목적보단 그냥 당시 김일성이나 북한 정권의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즉 고구려 대표 고분이란 곳이 신라 대표 고분보다 크기가 작다는 것을 북한이 남한한테 밀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21][22]


3.2. 진짜 동명왕의 무덤인가?[편집]


북한이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무덤의 구조는 평양 천도 이전인 국내성 시절 고구려에서 무덤을 지을 때 주로 썼던 적석총(돌각담무덤) 양식과 평양 천도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석실분(돌간흙무덤)의 중간 형태를 띤다.[23]
2. 동명왕릉의 무덤 옆에 위치한 절터 우물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이 지어진 목적은 능(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이 '능'이란 왕의 무덤을 의미한다.[24]

졸본(홀본)에서 사망해 졸본에 묻혔을 동명성왕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같이 옮겨온 것으로[25], 외적의 침입 때마다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다보니[26] 수도를 옮기면서 동명왕릉 같은 중요한 무덤은 평양으로 옮겨서 관리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27]

북한 정권의 프로파간다라는 점을 제외하면, 평양 용산의 무덤이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이미 고려, 조선 시대부터 존재해 온 것으로 오래되기는 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및 조선 왕조에서 편찬된 《고려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평양의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이라고 기록했고, 18세기 조선 후기의 사학자 안정복은 자기 저서 동사강목에서 현재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동명(東明) 때 평양은 낙랑군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동명이 어떻게 이곳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주몽이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그 소재는 알 수 없으나 당(唐)의 이적(李勣)이 아뢴 말에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까지 17역(驛)이다.' 하였으니 거리가 서로 너무 멀다. 아마 일찍이 구제궁(九梯宮)을 짓고 와서 놀다가 죽어 이곳에 장례한 것이리라."

하니, 이 말 역시 잘못이다. 대개 고구려가 관구(毌丘)모용(慕容)의 난을 만나 도읍이 잔파(殘破)되고 선왕의 능묘가 헐려 나라를 옮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왕의 능침도 따라 남쪽으로 옮겨서 동명묘를 지금 중화(中和)의 용산(龍山)에 장례하였으므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蒙古)의 난을 만나 강화(江華)로 천도하고 태조 이하 모든 능묘를 죄다 이장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상고하건대 《광여기(廣輿記)》에,

"요동(遼東) 복주(復州)[28]

에 명왕산(明王山)이 있는데 고구려의 왕자 동명을 이곳에 장례하였다."

하였으니, 혹시 처음 이곳에 장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동사강목》 부록 상권 고이(考異) 中 '동명을 용산에 장사지내다'


북한에선 평양에 있는 것이 무덤(墓)이고 졸본(홀본)에 있는 것은 사당(廟)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대형 고구려 고분인 장군총 위에서 사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물 터가 발견된 데다 《삼국유사》에서 수로왕의 무덤(墓)을 두고 버젓이 수릉왕묘(首陵王)라고 표기했고, 고려시대엔 용산 무덤이 동명왕묘(廟)와 묘(墓)로 혼용됐으니 무덤과 사당이 구분됐다고 보기엔 증거가 희박하다.

이 무덤이 정말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면, 실제 유해를 모신 무덤을 평양 코앞에 두고선 고작(?)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 졸본(홀본)까지 갔다는 것이기에 영 부자연스럽다. 이에 대해선 고구려 역대 국왕들이 평양 천도 이후에도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꼭 '평양에는 동명왕릉을 만들지 않았다'는 논거가 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평양 천도 후 가장 왕권이 강력했던 장수왕, 문자명왕과는 달리 안장왕 이후 왕들이 졸본에 간 배경에는 '시조묘 참배'라는 문자적인 명분 외에 졸본이나 국내 지역 세력을 회유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무덤이 진짜 동명성왕의 무덤인가에 대한 사실 여부나 북한 정권 및 학계의 정치적 노림수와는 별개로 고려와 조선에선 이미 평양 용산의 무덤을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고려 시대에 이 무덤은 동명왕의 무덤으로 간주되어 국가가 향축을 내려 제사지냈고, 조선 말기까지 쭉 이어졌다는 점에서 '전승' 자체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 무덤이 시조 동명성왕의 진짜 무덤이 아니라고 한들 무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고구려의 왕릉급 무덤이며, 만약 이 무덤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장수왕릉'으로 확인되면 그 의미가 어마어마해진다.

3.3. 다른 왕의 무덤일까?[편집]


학계에서는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후보들은 본 동명왕릉을 포함하여 길림성 집안시 소재 장군총, 평양 동쪽의 광대산 자락의 토포리 대총, 그리고 한왕묘(경신리 1호)가 있다.

토포리 대총은 장수왕릉 후보에서 많이 뒤쳐진 편이지만 와당이 출토된 본 동명왕릉, 한왕묘, 장군총은 여전히 각 연구자마다 와당의 변천을 기준으로 장수왕릉일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한다. 와당 외에도 묘실의 구조에 따른 판단도 있지만 고구려 석실이 장수왕 시절까지도 통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널리 인정받는 무덤으로 딱 하나를 꼬집기는 어렵다. 거기다가 고구려 왕릉이 왕릉급 고분과 실제 왕들이 딱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정하기가 어렵다. 일부 논자들은 장군총을 일종의 허묘로 축조하고 동명왕릉 또는 한왕묘를 실제 무덤으로 축조했으리라 보기도 한다.

이외에 동명왕릉이 실제로는 문자명왕의 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주홍규 2019).#


4. 기타[편집]


  • 2007년 평양을 방문한 MBC 드라마 주몽 제작진이 방문하기도 했다.


5.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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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걸작이며, 고분의 구조는 정교한 건축 공법을 보여 준다.[2] 고구려 문화의 독특한 매장 풍습은 일본을 포함한 인근의 다른 지역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3] 고구려 고분은 고대 매장 양식의 중요한 사례이다.[4] 1993년 12월 북한최고인민회의의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통해 1994년 문화유물보호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국보, 보물 등의 지정번호를 일괄적으로 갱신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5] 묘(墓)는 혹 묘(廟)로 나온다.[6] 삼국사기에선 홀본은 졸본으로 나온다.[7] 이승휴 주: 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잉태한 아들이다.[8] 이승휴 주: 在扶餘時, 婦所孕者.[9] 이승휴 주: 지금(고려)의 용산묘다.[10] 이승휴 주: 今龍山墓也.[11] 또 왕이 승천했다는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이 시신이 없으니 왕이 남긴 옥 채찍을 대신 장례지냈다는 파생 설화가 생겼다.[12] 인리방에 위치했던 고려시대 신사(神祠)다.[13] 이후 조선 세종이 동명왕과 단군의 합동 사당을 지었고, 이 사당에 세조가 숭령전이란 이름을 내렸다. 숭령전 건설 이후 동명성제사는 쇠퇴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14] 고려는 개경을 중심으로 동, 서, 남경이 있었고 몽고의 침입 당시 강도(江都)를 추가로 설치했다. 이중 서경은 지금의 평양시다.[15] 고려 태조의 어진, 의복, 갓을 모셔둔 제전(祭殿)이다.[16] 평양 목멱산신을 모신 신사(무교)다.[17] 전근대에 무덤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로 '묘'보다 '능'의 격이 더 높았다.[18] 신분이 높은 자라도 이 무덤 앞에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비석이다.[19] 1970년대 무덤을 재조사하면서 벽면의 석회를 씻어 내렸는데 그때 보라색 바탕에 붉은 자색을 칠한 지름 12cm의 연꽃무늬가 4.2cm 간격으로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당시 남아있던 연꽃 무늬는 모두 641개였다.[20] 동명성왕의 생년월일을 기원전 298년 음력 4월 1일로 보고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5월 14일이라, 1993년 5월 14일이 동명성왕의 2290회 생신날이라서 개건일로 잡았다고 한다.참조 북한은 동명성왕이 기원전 298년에 태어나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나라 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출처] 동아일보 1992년 7월 23일자 보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1] 북한 정권은 현재의 북한 영역에 중심지를 두었던 고구려에 지금 북한의 상황을 대입해, 초강대국(당나라, 미국)과 남쪽 같은 민족(남한, 신라)에게 핍박받는 상황을 동일시하는 교육을 하고 있고, 63빌딩 보고 열폭해서 더 높은 류경호텔 건설에 뛰어든 것처럼 별의별 사소한 부분에서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집착을 일관되이 드러내었다.[22] 왕릉 크기가 국력은 아니다. 당장 신라도 위에 말한 천마총진흥왕 이전 시기의 무덤인데, 진흥왕 이후의 전성기에 들어서 임금의 권위와 나라의 체계가 안정되면서 국력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지만 고분의 크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렇게 무열왕릉까지는 아직 좀 컸지만 통일신라가 된 뒤의 성덕왕릉, 원성왕릉을 보면 무덤 크기가 후대의 고려조선만큼 작아진다. 논리나 철학이 미처 발달하지 못한, 무덤이나 궁실을 크게 지어서라도 위정자의 권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후대로 갈수록 '그딴 거 크게 지을 돈 있으면 그 돈으로 백성이나 좀 구제해라.'는 식으로 의식이 성장하기 때문.[23] 북한에서 이런 형태의 무덤은 용강큰무덤 밖에 없다고 한다.[24] 설령 이 무덤이 실제 동명성왕릉이 아니라고 해도, 정릉사 곁에 있으니 그에 준하는 급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25] 북한이 현대에 와서 뜬금없이 내놓은 건 아니고 이미 안정복 같은 조선 시대 실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주장이다.[26] 293년 봉상왕전연모용외가 쳐들어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쳤고, 342년 고국원왕 때엔 모용황환도성을 불태우고 퇴각하면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아예 시신까지 가져가버렸다.[27] 이건 고려나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고려궁지로 천도할 때 세조, 태조의 시신을 함께 모셔갔고, 조선은 선조가 종묘의 신위를 들고 파천했다. 조상을 숭배하는 한국사에선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28] 지금의 중국 요령성 대련시 와방점시(瓦房店市). 요동반도 서안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