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국사략 (문단 편집) === 특징 === * 1. '''상고사의 단순화''' : [[단군조선]]은 기록되어 있으나 [[마한]]을 [[기자(중국)|기자]]의 후예로, [[진한]]을 [[진나라|진]](秦)의 유망인으로, 변한은 조상 없음으로 기록하였다.[* [[고려시대]] 때 [[삼한]] 70여국을 모두 [[단군]]의 후예로 본 [[제왕운기]]의 서술을 부정하였다.] 또한 중국의 당서(唐書)를 좇아 마한을 백제, 변한을 고구려, 진한을 신라에 비정하였고, [[낙랑군|낙랑]]ㆍ[[부여]]ㆍ[[대방군|대방]]ㆍ[[말갈|흑수]]ㆍ[[옥저]]ㆍ[[가야]]ㆍ[[발해]] 등은 독립적인 국가가 아니라고 간주했다. * 2. '''삼국사의 일원화''' : [[신라]]를 삼국의 주인으로 설정하고 서술 또한 신라의 연기(年紀)를 기준으로 서술하였다. 이에 대해 권근은 신라가 삼국 중 가장 선기후멸(先起後滅)함[*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늦게 사라짐.]을 근거로 들었다. * 3. '''중화대의론''' : 과거 고대국가 및 삼국들이 썼던 명분에 맞지 않는 명호(名號)들을 모두 삭제하였고 비판적인 시선에서 준엄한 역사비평을 가했다. 또한 삼국의 연기를 실제로 그들이 사용한 사실에 맞춰 쓰지 않고 중국의 예를 따라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 선왕이 죽고 다른 왕이 즉위하여도, 즉위한 해는 선왕의 통치기간으로 보고 그 다음해부터 새 왕의 통치기간으로 보아 연도를 셈하는 것. 예를 들어 A왕이 서기 100년에 죽고, 그 해에 아들 B왕이 즉위했다고 해보자. 그럼 B왕의 통치 원년은 언제일까? 신라 등은 즉위한 바로 그해 100년이라고 보았지만,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그 다음해인 101년부터가 통치 원년이라고 본다. 'ㅇㅇ왕 X년'이라는 표현이 언제를 가리키는지 달라지게 하기 때문에 중요한 차이이다.] 으로 기술하였다. 권근은 이에 대해 '하늘에 두 태양이 없듯이, 땅에는 두 황제가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예를 들어 거서간ㆍ차차웅ㆍ이사금 같은 신라의 고유 왕호는 모두 왕으로 고쳐 썼고, 여왕ㆍ태후ㆍ태자 등 칭호도 제후국의 명분에 맞지 않는다 하여 여주ㆍ대비ㆍ세자로 고쳐 썼다. * 4. '''신라정통론''' : 2번의 경우 그대로 갔는데, 800년대에 신무왕을 반역자로 본 것과 달리 여기에선 명군으로 부각했다. 덤으로 삼국사기에선 장보고를 열전에 올렸으나 반역했다고 기록한 것과 달리 여기선 반역설을 일축하고 신라의 충신으로 드높였고, 민애왕의 호를 삭탈해버리고 800년대 신라에 대해서 혹독한 기록을 줄창 적은 기존의 삼국사기를 엎고 800년대를 재평가하는데 이는 고려정통론을 뒤엎기 위한 것이었다.실제로 여기에선 900년대를 멸망기로 본다. 본시 장보고와 신무왕의 이야기는 이러한 신라정통론에 입각해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이는 이후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특징들은 당시 이를 편찬하라고 명한 태종의 정치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즉 요동정벌운동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적실 왕자를 세자로 책봉해 향처 왕자들을 소외시킨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고 집권한 태종과 그를 보좌한 권근·하륜 등이 [[명나라]]에 대한 소국의 충성과 대국이 내려주는 아량에 대해 널리 강연하고 황제의 제후국으로서 지켜야 할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나온 책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