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래인 (문단 편집) == 역사 == 도래인은 [[벼]]농사 기술과 [[청동기 시대|청동기]], [[철기 시대|철기]], 스에키로 대표되는 도기 제작 기술, 말 사육, 치수(강의 범람, 간척 등) 기술, 방직 기술 등을 일본 열도에 전파하였으며, 완전히 자리 잡은 뒤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들(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중국 남조 국가(동진, 송, 제, 양, 진)들과 교류를 통해 [[한자]]와 [[유교]], [[불교]], 건축기술 등도 도입했다. 도래인들의 주요 이주 시기는 대략 4단계로 구별된다. 1단계는 기원전 8C부터 이주한 집단이다. 인구 증가, 내부 갈등, 기온 하강 등의 부정적 압박을 받은 송국리 유형 문화 사람들(오늘날 김해)은 남강과 남해안을 지나 후쿠오카와 카라츠 연안 평야로 확산되었다. 그들과 토착 조몬인들과의 교배로 야요이인이 출현하였다. 일본 열도에 [[벼]] 농법과 금속 제련 기술이 전수되었고 이를 계기로 [[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청동기]]·[[철기 시대]]인 [[야요이 시대]]로 넘어갔다. 야요이인들은 현대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다만 아직 통일된 왕권은 나타나지 않았고, 기원후 3세기까지는 첨단 기술의 흡수 목적으로 왜의 엘리트들(지방 호족)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가야, 백제, 마한에서 긍정적, 부정적 압박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서기 전 194년 고조선의 위만의 반란으로 위만조선이 들어섰을 때, 고조선의 준왕은 마한의 일부를 공격해 그 지역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무렵 청동기를 지닌 익산 지역의 사람들이 규슈 북부에 집단 이주하였다. 2단계는 4~5세기로 [[고분 시대]]이다. 당시 왜는 소국의 왕들을 비롯해 호족들이 영역의 경제 및 문화 발전과 정치지배력을 강화하던 시기였기에 도래인의 선진 기술이 요구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기원 후 4세기 초까지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한 땅에 세운 한 4군 중 낙랑과 대방을 통해 백제와 마한, 가야를 거쳐 청동거울, 금, 은을 비롯한 여러 중국 상품을 수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에 의한 한반도 내 중국 교역센터(낙랑) 소멸과 금관가야 무력화(농공구, 철제 무기)라는 위기가 있었고,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새 터전을 마련하려는 한반도인들을 앞다투어 받아들이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진출한 도래인들은 규슈 북부, 오카야마, 오사카, 나라 일대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호족들을 도와 왜가 중앙집권 국가로 발돋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 천황가를 받들며 일본성씨를 추증받은 신라의 [[하타]] 씨족(3세기 무렵 도래, 씨족신인 [[이나리]]신이 유명)과 백제 아야 씨족이 일본으로 도래하여 선진 문물을 전파하였다. 3단계에는 5~6세기 긴키 일대에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다. [[케이타이 덴노]]를 시작으로 하는 [[일본 황실]]이 이 때 성립되었는데 통일된 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래인들을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의 일부 귀족 씨족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반대로 일본 호족인 모노노베 씨족의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는 등 인적인 교류가 활발했다. 다수의 백제계 도래인들은 오사카와 나라 일대에 정착하였다. 6세기에는 백제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신라, 고구려와도 본격적인 교류를 이루게 되는데 5세기에 건너간 신라계 도래인은 이즈모국 지방을 중심으로 서북 일대에 자리잡았으며 고구려인들은 무사시국 인근의 동쪽 일대에 자리잡았다. 4단계는 7세기 말 [[삼국통일전쟁]]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일부 귀족들과 유민들이 망명하였다. 백제 귀족은 오미에 주로 정착했고 고구려 귀족들은 무사시에 정착했다. [[야마토]] 조정이 668년 신라와 국교를 회복하면서 신라에서도 다시 이주하였다. 815년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당시 교토, 나라, 오사카 등 긴키 일대의 1182개 씨족 중 30% 가량이 도래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고분 시대까지의 도래인은 야마토 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융화되어 야마토인이 되었지만, 이후에 유입된 기술자들과 권력자들은 조상의 정체성을 많이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헤이안 시대가 형성될 때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이런 도래인의 활발한 역사는 [[헤이안 시대]] 때 [[신라구]]의 일본 침입, 일본의 고립주의 등이 겹쳐져 신라인(한반도인)의 이주가 중지되었다. 이후 [[에도 시대]] 때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건너간 포로들이 형성한 마을로 일시적인 재현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자발적이라고 보긴 어려워서 묘하긴 하다. 일본 안에서는 과거에는 [[귀화]]인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는데 이는 [[일본 제국|제국주의 시대]]에 주로 쓰였지만, [[천황|덴노]]의 덕을 흠모해 귀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 표현이었기에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비판이 있었고, 현대에는 교과서를 비롯해 일반적으로 중립적 의미인 도래인으로 바꿔 쓰고 있다. [[분류:도래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