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궁 (문단 편집) ==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호 변경 ==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호를 변경하게 된 경위에 대해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또 문화재청이 발간한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전략) 궁호에 '수(壽)'가 포함된 것은 선왕의 [[장수#s-3|장수]]를 기원하기 함이다. (중략) 이들 궁호는 건물이 남아있다고 해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왕의 붕어와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고종의 경우도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양위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궁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때 순종은 태황제의 궁호로 '덕수(德壽)'를 택했고,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은 그 때부터 덕수궁이 된 것이다. (중략) 국민들은 나라를 뺏긴 국민으로서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종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다.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2009, p.311 그런데 순종실록을 보면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전부터 쓰이고 있었고, 순종이 덕수를 지어올린 게 아니라 궁내부 대신 [[이윤용(1855)|이윤용]]이 덕수로 정하였고 순종이 윤허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윤용(李允用)이, ‘태황제궁의 호망단자(號望單子)를 덕수(德壽)로, 부(府)의 호망단자를 승녕(承寧)으로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궁내부에서 태황제궁의 칭호를 덕수로 하고 부의 칭호를 승녕으로 할 것을 아뢰다[[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2_001|#]] 그리고 8월 6일 신기선의 상소에서 덕수궁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 종묘의 축문에도 옛 규례를 준행하여 ‘신’ 자를 쓰고 폐하께서도 또한 태황제 앞에서 반드시 ‘신’이라고 일컬을 것이며, 이번 덕수궁(德壽宮)에 공손히 올리는 책문(冊文) 가운데서도 전례대로 ‘신’ 자를 쓰소서. >----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6일 양력 2번째기사 1907년 대한 융희(隆熙) 1년장례원 경 신기선이 관례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6_002|#]] 덕수라 정한 궁내부 대신 [[이윤용(1855)|이윤용]]이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면 [[이완용]]에 의해 궁내부 자리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복동생이 이완용으로 그 역시 매국행위로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이토는 [[헤이그 특사]]를 보낸 고종의 퇴위작업을 이완용에게 일임하였고 이완용 등은 고종에게 황태자에게 정사를 대리할 것을 건의하였다. 강압에 못이긴 고종은 대리청정을 하게끔 하였으나 이완용은 대리를 황제 양위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 실제 양위식에 고종도 순종도 당사자는 참여하지 않고 대리인 2명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희한한 즉위식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송병준의 협박과 폭언으로 고종이 자리를 뜨자 그 후 내각은 일치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날 제3차 어전회의에서 이병무가 칼로 위협하여,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날 결심을 하고 결국 7월 19일 오전 양위식이 거행되었다.[3(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62-63쪽. ISBN 978-89-86072-03-7.] 양위식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직접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 하였다. [* 순종의 개인적 의지는 궁내부와 내각의 친일관료는 둘째치더라도 일본인 관료들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순종이 보위에 오른 것은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의 강제적인 고종의 양위로 이루어졌으므로 내각은 물론 궁내부의 관원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17) 서영희, 2003,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360~362쪽.] >각 부문의 유사(有司)들은 자기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겠으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박영효(朴泳孝),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前弘文館學士) 남정철(南廷哲)은 직책이 더욱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거세게 직책을 회피하였으니 그 진상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21일 양력 3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이완용, 조중응이 직책을 회피한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등을 탄핵하다[[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7021_003|#]]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민희(趙民熙)의 보고서를 받아보니, ‘피고 박영효(朴泳孝), 이도재(李道宰), 남정철(南廷哲)의 죄안을 심리한 결과 피고들은 모두 궁부(宮府)의 중임을 띠고서 황태자(皇太子)가 정사를 대리함을 진하(陳賀)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들어와 참가하지 않고 혹은 병을 핑계대기도 하고 혹은 통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들로 공술하였습니다. 더없이 중대한 예식을 태연히 회피하였으니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피고들은 모두 《형법대전(刑法大全)》 제226조의 관리들이 임명받았거나 재임 기간에 일을 당하여 사고로 핑계대거나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회피하는 자는 중한 법조문에 의하여 각각 태형(笞刑) 80대에 처한다는 율문을 적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평리원에서 원래 제기한 법조문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2일 양력 3번째기사[[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8022_003|#]] 이완용은 대리작업을 회피한다는 이유로 박영효 등 궁내부 대신들을 탄핵하였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복서형인 이윤용을 앉혔다. [* 일본군의 출동으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내부 대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 이완용은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주신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사태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을 했다. 순종은 물론 그대로 허락했다. 순종이 한일병합 때까지 3년여 동안 황제로 재위한 기간에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 또는 보완을 지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올린 대로 처리하라."는 것이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순종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보완을 지시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토가 기를 쓰고 그를 황제로 올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2페이지] '덕망 높이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를 가진 덕수궁은 역사적으로 퇴위한 군주가 머무는 궁궐에 붙여지던 이름들 중 하나였다. 남송의 [[송고종|고종]]이 [[송효종|효종]]에게 양위한 후 머문 궁을 덕수궁이라고 했다. 조선에서도 태조 [[이성계]]가 퇴위한 후 머문 궁의 이름이 덕수궁이었는데, 이 때는 [[정종(조선)|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하여 덕수궁 역시 거기에 있었으나, [[태종(조선)|태종]] 즉위 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한 후 이 곳에서의 이성계의 거처도 덕수궁으로 불렸다. 이처럼 덕수궁은 퇴위한 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다. 상왕의 거처를 항상 덕수궁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덕수궁 외에도 태종의 퇴위 후 거처인 '수강궁'이나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양위 후 머문 '덕자궁'(德慈宮)처럼 다른 명칭도 존재했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어러한 몇 가지 명칭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덕수궁 명칭은 퇴위한 군주가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붙는 명칭에 가까우며, 해당 상왕(상황)이 사망하면 더이상 덕수궁으로 불리지 않고 원래 궁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이완용이 궁내부에 심은 친일파 이윤용의 의도 하에 고종퇴위작업의 일환으로 물러난 임금에게 부여하는 뜻의 보통명사인 덕수라 이름지은 것이다. [* 1907년 6월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특사로 파견한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일제는 고종에게 황제위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하였다. 고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는 조서를 내렸으나, 일제와 이완용 등 친일파는 대리청정을 선위로 바꾸어 발표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황제가 되었다. 순종이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일제는 순종이 고종의 영향을 받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고종은 덕수궁에 머물게 하고 순종은 창덕궁으로 임어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물러난 황제 고종에게 덕수라는 궁호를 붙였다. 덕수는 조선 초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였다. 말하자면 덕수라는 이름은 물러난 왕에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올리는 일종의 보통명사였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궁궐의 명칭이 아니라 고종에게 강요된 이름이었던 것이다(김종헌, 2004: 113)[[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63275|#]]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