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궁 (문단 편집) ===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KUpalacefire.jpg|width=100%]]}}} || || {{{#683235 '''동아시아 제후국[* 대한제국을 선포했어도 궁궐 관제 자체는 예전과 같게 유지했던 듯 하다. 굳이 중국과 똑같이 모방할 필요도 없었다.] 궁궐관제인 3문 3조에 맞춰져 지었던 조원문.[br]대한문 바로 뒤에 있는 금천교 다음의 문으로 중화전 회랑 바로 바깥에 있었다.'''}}} || [[1904년]](광무 8년) 2월 29일에 경운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덕수궁 즉조당|즉조당]]과 [[덕수궁 석어당|석어당]]도 이때 소실 되었다. 화재 직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황실 도서관 건물로 사용하던 ‘[[덕수궁 중명전|수옥헌(漱玉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경운궁 주요부를 완전히 복구하기까지 고종은 수옥헌을 침전 겸 편전(사무실)으로 사용했다. 대화재로 사실상 궁궐이 모두 소실되자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집착)을 보인 고종은 결국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경운궁을 재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 [[창덕궁]]으로 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고종의 반응은 굉장히 신경질적이었던 듯 하다. [[윤치호]]는 [[윤치호 일기|자신의 일기]]에 [[이하영(1858)|이하영]]에게 들은, 궁궐 이어에 대한 고종의 반응을 적으며 경운궁에 유달리 집착하는 고종의 모습을 비판했다. >(전략) 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다고 한다. 언젠가 [[완순군|이재완(李載完)]][* 고종의 사촌동생.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이다.]이 황제에게 [[창덕궁|동궐(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황제는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기를 죽이는 분개한 얼굴로 그 불운한 왕자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순종(대한제국)|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구제불능이다. 절망적이다. >---- >윤치호 著, 《[[윤치호 일기]]》, 1904년(조선 개국 513년, 광무 8년, 갑진년) 4월 23일, 흐림.[[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a&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a_029r_0020_0010_0050&position=-1|#]] [[1905년]](광무 9년)에 [[덕수궁 중명전|경운궁 수옥헌]]에서 [[일본 제국|일제]]의 강압과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로 인해 '''[[을사조약|을사늑약]]'''을 강제 체결당했다. [[1906년]](광무 10년) 경운궁 중건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인해 규모는 [[1902년]](광무 6년) 전성기 때보다 축소되었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단층으로 바뀌어 원래 복층 건물의 장엄함이 사라졌다.[* 참고로 중화문도 중층이었다가 낮아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화문은 처음부터 단층이었다.]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본 제국|일제]]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강제 퇴위시킨다. 이어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덕수궁 돈덕전|돈덕전]]에서 즉위했다. [[순종(대한제국)|순종]]은 한동안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나, 4달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결국 정궁(황궁)[*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의 법통을 잇는다고 고종이 선포하고 태조와 정조 등 고종의 4대조를 황제로 추승하였다는 점과 경복궁을 법궁의 지위에서 폐지한다는 고종황제의 조칙이 없는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경복궁의 법궁의 지위는 대한제국 시기에도 변함은 없었다]의 지위도 함께 옮겨갔다. 이후 중명전은 다시 [[태상황|태황제]] 고종의 집무실 및 접견실이 되었다. 이후 [[이완용]]은 궁내부대신 [[박영효]]가 양위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7월 21일 탄핵 하였고 그 작업을 자신의 이복형제인 [[이윤용(1855)|이윤용]]에게 맡겼다. 이 이윤용이 다음날인 1907년(광무 11년) 8월 2일 올린 건의에 의해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 [[창덕궁]]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고([[경술국치]]), 고종은 [[태상황|태황제]](太皇帝)에서 [[이왕|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당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죽음|붕어]](崩御)할 때까지 계속 덕수궁의 주인으로 남았다. 그해 [[12월]]에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이 착공 10년만에 완공되었다. 사실 [[석조전]]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부터 정전으로 구상했던 건물이었으나, 결국 이 건물은 [[경술국치|망국]] 이후에 완공되었던 것이었다. 완공 후 [[고종(대한제국)|고종 일가]]는 석조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고종은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에 불편함을 느껴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에 주로 기거했다고 한다. 이후 [[석조전]]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영친왕]]이 귀국했을 때 머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