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궁 (문단 편집) === [[대한제국]]의 황궁 === [[인조반정]]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274년 후인 [[1897년]](건양 2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에 거처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이어[*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다.]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조차 잊혔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서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명경궁(明慶宮)'으로 소개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으며 이제는 고작 건물 2채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 [[주한미국공사관|미국공사관]], [[주한영국공사관|영국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경복궁]]에 살던 시절에도 궁 내에 양반집 저택의 형태를 띤 건청궁을 지어 거처했다.] 이 인근은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공사관 외에도 [[주한프랑스공사관|프랑스공사관]], [[주한독일공사관|독일영사관]]이[* 1903년(광무 7년)에 공사관으로 승격.]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공사관 구역'''으로 불렸다. 또한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을 비롯한 다른 외국인들까지 주로 이 일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성 내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 점령했던 사건이나 [[을미사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고종(대한제국)|고종]]으로서는 외국 공사관에 둘려싸여서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이 무력 도발을 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였던 경운궁은 특히 각별했다.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면서 내외로 환궁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896년]]([[건양]] 원년) [[경운궁]] 개수를 명하여 환궁을 준비했다. 경운궁은 [[인조]] 원년인 [[1623년]]에 대거 축소되어 원래 민가였던 [[덕수궁 즉조당|즉조당]]과 [[덕수궁 석어당|석어당]] 2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정궁으로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우선 침전인 [[덕수궁 함녕전|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성당(선원전) 등 당장 필요한 건물들을 급한대로 지은 상태에서 [[1897년]](건양 2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정전으로는 [[1902년]]([[광무]] 6년)에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5년 간 즉조당을 활용했다.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정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이어나갔다. 겉으로는 옛 궁궐을 보수 · 중건한다고 했지만 원래 [[경운궁]]에 남아있던 전각이 2채 뿐이었기 때문에 말이 중건이지 그냥 궁궐 하나를 통째로 새로 짓는 것에 가까운 대공사였다. 특히 정전인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은 [[창덕궁]]의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을 본따 지은 복층양식으로 단층인 [[창경궁 명정전|창경궁의 명정전]]이나 [[경희궁 숭정전|경희궁의 숭정전]]과는 격이 달랐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돈덕전|돈덕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덕수궁 정관헌|정관헌]] 등도 이 무렵에 지었다. 그리고 서양식 정전으로 활용할 목적의 [[덕수궁 석조전|석조전]]도 이때 착공했는데 워낙 큰 규모여서 그런지, 후술하겠지만 경술국치 이후에 완공되었다. 당시 경운궁 공사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256780196|이 포스팅]][* 이 포스팅의 명성왕후 표기는 역사적으로 완벽한 오류임으로 이를 감안하고 읽어야한다. 명성황후의 왕비시절을 지칭할 때에 왕후로서 사망하고 명성이라고 시호가 정해졌다는 점을 근거로 명성왕후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명성이란 시호는 황후로서 책봉된 이후에 시호 반포가 이뤄졌기에 명성왕후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명성황후의 왕비 시절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소혜왕후 한씨의 대비시절 존호가 "인수"여서 인수대비로 우리가 부르듯이, 명성황후의 왕비시절 존호는 "효자"였음으로 효자왕비 민씨로 부르는 것이 정확한 호칭법이다] 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건된 건축물들은 회안전, 문경전, [[경복궁 태원전|태원전]] 축대, 흥복전 행각, 다경합, 만화당 등이었다고 한다. 이 중 만화당은 황제의 침전인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으로 개축되었다. [[1902년]](광무 6년) 경운궁 공사는 1차적으로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 [[창덕궁]]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정면 5칸 측면 4칸)을 본 따 만들었다.] 그때까지 5년 동안 경운궁의 정전은 [[덕수궁 즉조당|즉조당]]이었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1902년]]에 완성된 경운궁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KUpalacemain.jpg|width=100%]]}}} || || {{{#683235 '''공사 중인 중층 중화전. 경운궁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아 1902년 경에 촬영한 듯 하다.'''}}} || 또한 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 중심으로 짜여진 도성을 경운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도시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대로]]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대문 운교.png|width=100%]]}}} || || {{{#683235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http://m.cha.go.kr/heri/gungDetail/gogungDetail.do?serial_number=129&detail_code=20&gung_number=4&language=&pageNo=&listFlag=list|#]]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 그리고 [[경희궁]]과 연결하는 [[덕수궁 운교|홍교]]도 건립했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왼쪽에 경희궁, 오른쪽에 경운궁이 있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277940175|어느 블로거가 정리한 홍교의 건립 시기와 건립 의도]] 이 포스팅에 따르면 [[덕수궁 운교|홍교]]는 고종이 경희궁에서 열릴 관병식을 보기 위해 건립했으며 [[1902년]](광무 6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세웠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