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궁 (문단 편집) === 경운궁 === 1609년([[광해군]] 원년)에 마침내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광해군]]은 보충 공사를 재차 명하여 약 2년 간 더 정릉동 행궁에 계속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다시 정릉동 행궁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거처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을 꺼렸기 때문인 듯 하다. [[광해군]]이 [[인경궁]], [[경희궁]] 등 여러 궁궐을 마구 건설한 것은 근본적으로 [[창덕궁]]에 거주하기 싫어서였다. 광해군은 마침내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310011_001|#]] 경운궁 확장 공사를 벌여 궁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곧 [[인경궁]]에다 경덕궁([[경희궁]])까지 착공하자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도리어 경운궁에 새로 짓던 전각들을 도로 해체하여 경덕궁 건설에 사용했다. 또한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덕수궁 즉조당|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인조]]의 본의가 아니라 철저히 타의([[인목왕후]])에 의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거의 전소되었지만,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인정전]]과 그 주변 외전 일대만큼은 용하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능양군]]은 정궁인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러 정통성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인목왕후]]가 "[[인조|능양군]]이 직접 경운궁으로 올 것"을 명하면서 차기 왕과 기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즉위 절차상 대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세자가 없는 경우에는 대비가 [[조선/왕사|차기 왕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명종(조선)|명종]] 등이 대비([[문정왕후]])의 지명으로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능양군]] 측은 [[인조반정|반정]]으로 [[광해군|정권]]을 찬탈한 상황이었던 만큼, 한시라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광해군의 폐모살제(인목왕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였던 만큼, [[인조]]가 절대로 인목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능양군(인조)은 [[경운궁]]까지 와서 [[인목왕후]]에게 엎드려 조아린 후에야 간신히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치렀지만, 인조는 바로 경운궁을 떠나 화재로 폐허가 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실거주는 [[창경궁]]에서 했다.] 즉위한지 3달 후에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 단 2채를 제외한 경운궁의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즉조당과 석어당은 할아버지 [[선조(조선)|선조]]가 머물렀던 곳이며, 또한 자신이 즉위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냥 놔둔 듯 하다.] 인조의 이러한 조치는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인목왕후]]에 대한 은밀한 견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 생전에는 내내 눈치를 보며 국법까지 무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인조인데 왕 입장에서 그게 편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목왕후는 가렴주구의 상징으로 여겨 장기적으로 없애자는 신하들과 기왕 지어놓은거 활용해 보려는 인조의 눈치싸움 현장인 [[인경궁]]으로 거처가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인목왕후의 만수무강을 위한 것이었다. [[인조]]의 조치를 통해 경운궁은 단 전각 2채[* 부속 건물까지 합쳐도 4채밖에 안되었다.] 만이 남아 정릉행궁 시절보다 더 조촐해졌다. 이후 [[경운궁]]은 이후 왕실에서 왕실 내 토지 및 재산 관리 역할을 하기 위한 별궁 [[명례궁]]을 설치한 정도를 빼고는, 별 다른 존재감 없이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