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궁 (문단 편집) === 정릉동 [[행궁]] === [[임진왜란]] 때 [[의주목]]까지 피난갔다가 환도한 [[선조(조선)|선조]]가 도성 내의 궁궐들이([[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불타버려 거처 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 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 또는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는 궁궐 공간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불편이 야기 되었기 때문에 주변 민가들을 대거 징발하여 궁궐로 증축, 연결하여 썼다. 특히, [[명종(조선)|명종]]의 처가였던 영의정 [[심연원]]의 저택을 종묘로 삼았고, 손자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저택을 세자 [[광해군]]이 거주하는 동궁으로 삼았다.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는 전각들 중 나중인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덕수궁 중화전|중화전]] 일대와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을 제외하고, [[덕수궁 즉조당|즉조당]]과 [[덕수궁 석어당|석어당]] 등 오래된 전각들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전각들은 궁궐이라기 보다 권세 있는 양반집의 모습이다. [[선조(조선)|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줄곧 이 정릉동 행궁에서 거처하다가 중건 중인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다. 여담으로, [[2003년]] ~ [[2004년]]에 방영했던 [[SBS]] [[사극]] 〈[[왕의 여자]]〉는 이 정릉동 행궁 시기를 다루고 있다.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궁궐 세트가 아니라 대감집 느낌 나는 세트에서 [[선조(조선)|선조]] 치세 후반 및 [[광해군]] 초반의 시기를 그려냈다. 심지어 [[광해군|동궁]](세자궁)은 초가집이었다.[* 보통 도성에서 도망쳐야 할 정도의 큰 난리를 겪은 군주 중에서 이런 경험을 한 군주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삼국지]]》에서조차 [[헌제]]가 [[이각]]과 [[곽사]]가 제멋대로 마구 전횡을 부리고 자기들끼리 도성 안에 군대를 갖고와서 허구한날 쌈박질하고 도성에 살던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살해당하거나(당연히 이각곽사 무리들이 죽였다.) 도성으로부터 멀찌감치 도망치는 바람에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허허벌판'''인 상황까지 몰렸다. 이 때문에 헌제는 야밤에 이각곽사를 피해 도망쳐야만 했으며 이후 조조가 헌제를 영접할 때까지 일반 개인집 중 하나를 주워다가 (징발이 아니라 주워다 쓴 거다. 왜냐 하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같은 국난이 연달아 일어나서 사람들의 씨가 마르기 일보 직전이라 빈집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임시로 조정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추가로 헌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를 따라온 문무백관들의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배우개그]]의 건물 버전으로 용인 [[한국민속촌]]의 가옥 중 '중부지방 양반가 22호'는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의 사저이자 후에 [[월산대군]]이 물려받는 집으로 등장했다가 〈[[왕의 여자]]〉에서 경운궁으로 출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