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궁 (문단 편집) === 월산대군 저택 === 원래 1469년([[예종(조선)|예종]] 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엮였던 조영달의 집 터였다. 역적의 집이란 이유로 조정에서는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고 1470년([[성종(조선)|성종]] 1년)에 성종이 이곳을 [[세종(조선)|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 영응대군이 성종의 할아버지 [[세조(조선)|세조]]의 동생이므로, 영응대군의 부인은 성종에겐 작은할머니이다.]에게 내려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1030_004|#]]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07024_002|#]] 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정원|후원]]에 세우기로 했다.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제사를 맡으면서 이곳을 하사받았고,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이면서 의경세자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되었다. 이후 1475년(성종 6년) 의묘의 위패를 [[경복궁]] 안에 있는 연은전으로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남았다. 월산대군 저택이 된 경위를 다르게 보는 의견도 있다. 월산대군과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수빈 한씨]]가 남편 [[의경세자]]의 사망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고[* 과부는 궁궐에서 거처할 수 없었는데 이는 후궁이 그 대상이고, 예법과 궁중법도상 세자빈의 지위는 왕후(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의 [[조선/왕사|종통]](同宗統)이 되므로 궁궐에서 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지위에 오를 때에는 역시 왕후와 마찬가지로 상국(上國)인 [[명나라]]의 책봉 교지가 필요했다.][* 한씨(인수대비)의 경우는 신분이 종통인 세자빈이므로 궁궐에서 그대로 살 수 있었고, 또 세조 내외가 며느리 한씨에게 궁궐에서 그대로 살기를 권했으나, 한씨는 거듭 사양하고 궁궐 밖으로 나가서 살았던 것. 이후 과부가 된 세자빈으로 [[공회빈 윤씨]]([[순회세자]]빈), [[효순왕후|현빈 조씨]]([[효장세자]]빈, 효순왕후으로 추존), [[혜빈 홍씨]]([[사도세자]]빈, 헌경왕후로 추존), 빈궁 조씨([[효명세자]]빈, [[신정왕후]])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편을 이른 나이에 잃었지만 모두 궁궐에서 살았다.] 궁궐 밖으로 나가 살면서 시아버지인 [[세조(조선)|세조]]가 특별히 수빈 한씨와 그 자녀들이 거처할 곳으로 지어주었으며, 이후 둘째아들 [[성종(조선)|성종]]이 왕위에 올라 그 어머니인 [[인수대비|수빈 한씨]]도 왕대비가 되어 대궐로 들어가자 오롯이 [[월산대군]]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