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고정전협정 (문단 편집) == 배경 ==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열하, 하북으로 축출된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은 [[열하사변]]이 발생하자 또 다시 패배하여 전국적인 비난 속에서 하야하고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 국민정부는 [[허잉친]]을 투입하여 일본군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이에 국민정부는 항전을 주장하는 [[뤄원간]] 외교부장의 외교부 대신에 베이징 정무정리위원회 위원장 [[황푸]]에게 정전협상을 진행하도록 지시, 4월 중순부터 비밀 정전협상을 시작했고 4월 말에 협상의 조건과 내용에 대한 조율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1933년 5월 7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국제적인 이권이 첨예하게 개입되어 서구 열강의 신속한 개입이 이루어졌던 [[제1차 상하이 사변]]과 달리 서구열강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5월 23일 국민정부는 다음과 같은 시정방침을 제시하였다. ||지금 베이핑과 톈진이 위급한 순간인데, 영국과 미국 등 서구열강이 시기적절하게 조정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강서성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군대는 이동할 수 없다. 다른 지역의 군대는 명령을 듣지 않고 광동과 광서 지방의 군대도 이동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광동과 광서 지역에서는 항전의 목소리가 높지만, 군대가 아직 출병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어 잠시 정전 교섭을 진행하기를 희망한다.|| 한편 만주국 불승인을 위한 로비를 진행하여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 결의안을 끌어내기도 했던 외교부는 이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4월 23일, 외교부장 뤄원간은 국민정부가 [[베이징대학]] 총장 장몽린에게 램프슨 영국공사를 통해 일본과 교섭하라고 지시하자 일본군의 공격에 결사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류충제, 황푸, 허잉친에게 다음과 같은 뜻을 전했다. ||장성항전 시기 일본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 동북지방의 영토를 되찾을 수 없게 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국제연맹의 맹약과 결의안에 의거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모든 중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전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일본군이 다시 진격해 압박하면 베이핑과 톈진을 점령하게 될 것이므로, 정전협정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장몽린을 통한 정전교섭은 무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