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정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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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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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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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28일~5월 5일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파일:당고정전협정.jpg
협정 체결의 모습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일본 측의 정전 의사 타진
3.2. 정전협상의 시작
3.3. 외교부의 반발
3.4. 당고정전협정 체결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1933년 5월 31일 일본 제국중화민국 국민정부 사이에 체결된 정전협정. 외교부가 주도한 송호정전협정과 달리 군부가 주도한 협정이었으며 만주사변열하사변이 이로 인해 일단락되었으나 송호정전협정에 비해 상당히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2. 배경[편집]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열하, 하북으로 축출된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열하사변이 발생하자 또 다시 패배하여 전국적인 비난 속에서 하야하고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 국민정부는 허잉친을 투입하여 일본군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이에 국민정부는 항전을 주장하는 뤄원간 외교부장의 외교부 대신에 베이징 정무정리위원회 위원장 황푸에게 정전협상을 진행하도록 지시, 4월 중순부터 비밀 정전협상을 시작했고 4월 말에 협상의 조건과 내용에 대한 조율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1933년 5월 7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국제적인 이권이 첨예하게 개입되어 서구 열강의 신속한 개입이 이루어졌던 제1차 상하이 사변과 달리 서구열강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5월 23일 국민정부는 다음과 같은 시정방침을 제시하였다.

지금 베이핑과 톈진이 위급한 순간인데, 영국과 미국 등 서구열강이 시기적절하게 조정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강서성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군대는 이동할 수 없다. 다른 지역의 군대는 명령을 듣지 않고 광동과 광서 지방의 군대도 이동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광동과 광서 지역에서는 항전의 목소리가 높지만, 군대가 아직 출병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어 잠시 정전 교섭을 진행하기를 희망한다.

한편 만주국 불승인을 위한 로비를 진행하여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 결의안을 끌어내기도 했던 외교부는 이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4월 23일, 외교부장 뤄원간은 국민정부가 베이징대학 총장 장몽린에게 램프슨 영국공사를 통해 일본과 교섭하라고 지시하자 일본군의 공격에 결사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류충제, 황푸, 허잉친에게 다음과 같은 뜻을 전했다.

장성항전 시기 일본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 동북지방의 영토를 되찾을 수 없게 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국제연맹의 맹약과 결의안에 의거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모든 중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전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일본군이 다시 진격해 압박하면 베이핑과 톈진을 점령하게 될 것이므로, 정전협정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장몽린을 통한 정전교섭은 무산되었다.


3. 전개[편집]



3.1. 일본 측의 정전 의사 타진[편집]


일본군의 2차 공세가 진행되던 중인 5월 22일 심야 일본공사관 해군무관 후지와라, 일본 공사관 서기관 나카야마, 육군무관 나가쓰 중좌 등이 먼저 황부에게 연락하여 정전을 제의했다. 이에 황부는 이택일을 일본 공사관에 파견하여 23일 새벽 4시까지 회담한 끝에 '정전안 개요 비망록'을 작성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중국군은 연경, 창평, 고려영, 순의, 통주, 향하, 보지, 임정구, 영하의 이남, 이서로 후퇴하고 앞으로 일체의 도발행동을 하지 않는다.

  • 2. 일본군도 위에서 든 선을 넘어 진격하지 않는다.

  • 3.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위원장대리 허잉친은 정식으로 임명한 정전 전권대표를 밀운에 파견하여 일본군 고급지휘관에게 중국 측의 정전의지를 표명한다.

  • 4. 이상을 정식으로 약정한 후 일시를 잡아 정전성립협정을 행한다.

이는 산해관 이남의 200킬로미터 지점을 일본군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으나 당시 중국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허잉친은 장췬, 웅빈 등과 논의하였는데 웅빈은 베이핑은 문화의 고도니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렇다고 항전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의 책임이 무거우니 우선 접촉을 시도해보는 것이 맞겠다고 말했다.


3.2. 정전협상의 시작[편집]


결국 허잉친은 황부가 가져온 조건을 수락했고 베이핑 분회 참모 서연모를 밀운으로 파견하여 정전협의에 임하게 했다. 이 시각 난징에서는 23일과 24일에 걸쳐 왕징웨이가 주재한 국방회의가 열렸다. 당시 국민정부가 결정한 방침은 '일본 측과 정전을 혐의함에 있어서는, 문서에 의한 협정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만약 부득이한 때는 군사상 협정에만 그치고 정치에는 미치지 않도록 한다.'고 결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의 상황이 너무 위급하여 허잉친은 이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허잉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해의 경중을 따져볼 때, 베이핑, 톈진을 포기하고 괴뢰들로 하여금 가짜정부를 조직케 하여 화북을 회복할 수 없는 경지에 빠뜨리는 것에 비하면, 정전협의는 화북을 보전하고 시간적 여유를 얻어 당과 국가의 근간을 굳히는 일이 되어, 이는 많고 해는 적다."


5월 23일, 허잉친은 최전선 각 부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2개월 동안의 전투로 인해 병사들 중 사상자가 많고, 물자도 궁핍하다. 중국 군대의 상황을 보면, 병사들이 전의도 없고 퇴각할 기세다. 만약 중국 군대가 스스로 붕괴한다면, 화북 지방의 상황은 수습할 수 없게 된다. 중요한 장령들을 소집하여 의지를 강건하게 가지도록 격려하였다. 전선의 상황은 이와 같다. 일본인들도 다시 치셰위안, 쑨촨팡, 바이젠우 등 실의한 군벌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화북 연합 정부를 조직하려고 모색한다. 만약 베이핑과 톈진에서 일본인들이 군벌과 연합하여 괴뢰 정부를 조직하면, 화북 정부는 함락되기 쉽고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전 협정을 체결하면 화북 지방을 보전하고 휴식을 도모하며, 당국의 토대를 견고히 할 수 있다."


황푸도 동조하였다.

"베이핑과 톈진을 잃고 나면 중앙 정국은 동요하게 되고, 재정도 더욱 부족하게 된다. 군량과 봉급의 공급지도 단절되고 평한, 평수, 북녕, 진포 등 각지의 교통 중심지도 일본군에게 점령될 것이다. 붕괴된 중국군도 하남성과 산동성으로 흩어지고 상상할 수 없는 후환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에 중국군은 5월 24일부터 철수를 시작했고 5월 25일 약속한대로 서연모와 이택일이 후지와라, 나가쓰와 동행하여 밀운에서 8사단장 니시 기이치랑과 회담하고 나가쓰가 제출한 '관동군 사령관의 의지'란 비망록에 서명했다. 이에 장제스는 황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왜구에게 휴전의 의사가 있다고 믿고 있지 않는다. 그들의 진의는 우리를 위협하여 자발적으로 후퇴케 하고, 베이핑을 손쉽게 손에 넣으려는 것이 아닐까? 협정에 있어서는 문서로 작성하는 일체의 방식을 피하여, 장래 이것이 선례가 된다든가 더구나 우리가 이 선례를 만들었다는 말을 남기지 않도록 하라. 부득이한 때라도 작년 상하이 정전협정을 상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가짜 국가의 승인이라든가, 동4성의 할양, 경계선 따위에 대해서 절대로 언급해서는 안된다. 앞으로 우여곡절이 많아질 것이고 대응도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담판을 할 수 있을때에는 베이핑, 텐진의 방비를 특히 강화시킬 일이다. 베이핑에서 죽음을 건 싸움을 하지 않고는 왜구의 욕망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오, 국민의 양해를 얻어낼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정."



3.3. 외교부의 반발[편집]


5월 25일 정치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군사적인 문제에 국한되어 정전 협정을 체결하기로 규정하였다.

당고정전협정에서는 조약문을 문자로 작성하지 않고,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으며, 동북 지방의 4개 성을 할양하지 않는다. 만약 협약서를 작성하는 경우에도 정치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군사에 관한 사항만 규정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외교부장 뤄원간이 서모 정무차장이 정부와 일본의 직접 교섭을 반대하며 램프슨 영국공사를 통한 조정도 반대했다. 5월 26일 구웨이쥔이 난징에 전보를 보내 정전협상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나는 4월 중순부터 정전협정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 특별대회에서 만주국의 불승인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됨으로써, 이 문제는 국제연맹의 맹약 등 국제공약의 권위와 관계된 사안으로 서둘러 정전협정을 체결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국제연맹의 각 회원국들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난징정부가 일본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되면 각 국가들의 만주국에 대한 일치된 행동과 국제연맹의 결의안을 보장할 수 없게 되며, 국제연맹이 중일 양국을 조정할 수 있는 여지도 없게 된다."


주미 중국공사 스자오지도 반대했다.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강력하게 항전하여 영토를 방위해야 한다. 그리고 서구 열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압력을 실행할 때까지 정식 전쟁을 촉발하거나 자극하는 행위는 중국에 손해가 되므로, 이를 삼가는 것이 이롭다."



3.4. 당고정전협정 체결[편집]


하지만 군사적인 불리함이 컸으므로 중일 양군의 1차 정식회담이 5월 30일 당고의 일본군 운수부 파출소에서 열렸다. 중국군 측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표 웅빈, 서연모 등 6명이, 일본군 측은 관동군 대표 오카무라 야스지, 나가쓰 등 6명이 참석했다. 이날은 전권위임장을 교환하고 인사를 한후 곧 해산했다. 진짜 회담은 다음날인 5월 31일 오전에 열렸다. 뉴욕 타임스의 핼릿 어벤드는 회담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창문 커튼이 닫힌 객실에서 이윽고 약 20명의 중국 고관들이 내려왔다. 자동차나 마차는 제공되지 않았다. 그들은 인도가 없는 탕구의 더럽고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 영사관 정문에 선 경비병들은 무뚝뚝하게 굴며 중국인들을 10분 가량 무더운 뙤약볕 아래에 서 있도록 했다. 마침내 출입허락을 받았을 때, 주의 깊게 선발된 중국 대표들보다 계급이 낮은 일본 관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일본군 구축함 아사가오와 유가오가 포구를 겨눈 상태에서 일본 측은 정전협정 초안이란 문서를 내밀며 "이것이 관동군의 최종안이다. 한글자도 변경할 수 없다. 중국 대표는 한시간 반 안으로 회답하라."고 요구했다.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 1. 중국군은 조속히 연경, 창평, 고려영, 순의, 통주, 향하, 보지, 임정구, 영하, 노대를 통과하는 선의 이서 및 이남 지구로 철수하고 앞으로 이 선을 넘어 전진하지 않으며 또 일체의 도전 교란행위를 하지 않는다.

  • 2. 일본군은 제1항의 실행을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비행기 및 기타 방법에 의해 이를 시찰한다. 중국 측은 이에 대하여 보호 및 제반편의를 제공하도록 한다.

  • 3. 일본군은 제1항의 규정을 중국군이 준수함을 확인하면 전기한 중국군의 철수선을 넘어 추격을 속행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대략 장성의 선으로 귀환한다.

  • 4. 장성 이남에서 제1항에 제시한 선의 이북 및 이동 지역내에서의 치안유지는 중국 측 경찰기관이 맡는다.

  • 5. 상술한 경찰기관은 일본군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단체여야 한다.

웅빈은 이것이 순수한 군사적 조항임을 확인하고 중국 측 의견서를 제출하여 중일 양군 후퇴 이후 지역 내의 치안확보 문제에서 합의를 보자고 했으나 오카무라는 예스인지 노인지만 말하라면서 다른 얘기들은 정전협정 조인 후에 할 것이라고 이를 묵살했다. 결국 일본이 제시한 90분이 조금 넘은 후에 협정문이 조인되었다. 조인 이후 일본측은 샴페인을 제공했고 중국대표단은 다시 걸어서 기차로 돌아갔다. 이후 관동군 대변인은 의기양양하게 열하의 합병을 선언했다.


4. 결과[편집]


일반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이 당고정전협정을 만주사변의 일단락으로 본다. 일본의 군사적 팽창은 일단 잠시 정지했으나 일본 내부에서도 탕구 정전협정을 북지정전협정, 북지작전정전협정이라 부르며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끝낼 수 없다고 야욕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면 어떤 이들은 만주사변은 1945년 중일전쟁과 함께 진정으로 종결된다고 본다. 어쨌거나 일본의 침략은 화북분리공작으로 재개, 일본 제국은 1935년 기동사변을 일으켜 관내의 일본 점령지에 지둥방공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며 하매 협정, 진토 협정 체결을 강요하는 등 침략을 계속하였다.

또한 중국 내부에서는 당고정전협정이 패배적인 협정이라는 반발이 끓어올랐으며 구웨이쥔, 뤄원간, 궈타이치, 스자오지 등 항전을 주장한 직업외교관들은 당고정전협정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으며 뤄원간은 외교부장에서 사퇴했다. 장제스 역시 이 점을 인식하였으나 일본을 상대할 방법은 중국의 역량을 성장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여겨 공산당 토벌과 내부 단속에 집중하게 된다.


5. 참고문헌[편집]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세계외교사, 김용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1.28 상하이 사변과 윤봉길 의거의 한중공동항전, 이재령,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塘沽停戰協定 이후 국제정세와 職業外交官의 항전 입장, 중국사연구 83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南京國民政府 職業外交官의 부상에 대한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89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職業外交官의 對日 强硬態度와 國內活動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95권, 중국사학회.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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