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녹읍 (문단 편집) == 탄생 == 언제부터 마련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적어도 통일 이전부터 계속 존재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흥왕]] 시기에도 존재했다. [[귀족]]에게 땅과 주민을 넘겨버리면 개인을 위해 [[백성]]의 고혈이 쥐어짜이는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당대에 국한된 영지라면 그런 부작용이 생기겠지만, [[세습]]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주]] 계급 입장에서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영지]]의 경제력을 키워야 할 유인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길어봐야 3년 짜리 임명직 지방관 입장에서는 그저 임기 내에 최대한 많은 이득을 얻으려 할 수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지방관의 양심에 달린 문제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의 [[다이묘]]들처럼 세습이 보장된 경우에는 오히려 지역 경제를 최대한 키우기 위해 영지 [[경영]]에 힘쓰게 된다. 실제로 조선의 전직 관료로서 [[홋카이도]]에 표류했다가 마쓰마에 번에 닿아 다이묘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에도에서 막부 쇼군을 접견하고 수개월동안 일본 각지를 직접 보고 귀국한 이지항이 저술한 표해록에는 마쓰마에번(오늘날의 홋카이도 최남단 하코다테 일대)조차도 변방의 낙후된 고을임에도 [[조선]]의 평범한 고을들보다 열 배는 더 풍등하다고 하며 그 원인을 다이묘들이 영지를 세습하기 때문에서 찾고 있다. 애당초 국왕이 관료들보다 [[경제]]와 민생에 더욱 관심이 많다. 전제군주정의 왕에게는 나라 자체가 세습재산이기 때문에 [[왕권]] 강화가 대체로 [[진보]]이고 [[개혁]]일 수밖에 없다. 군주가 녹읍을 허락한 것은 우선 부족한 생산력을 각자 알아서 취하게 하려 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고대 국가들은 원래 여러 부족장들이 대표자인 왕을 내세우는 식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그 땅을 소유했던 부족장들의 땅을 빼앗을 명분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들의 특징 중 하나가 이 제도에 손을 대려 하는 것이며, 반대로 이 제도가 부활하면 그만큼 왕권이 약해졌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