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선일체 (문단 편집) === 일본인들의 반응 === 의외로 [[일본인]] 중에도 내선일체 정책에 큰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일본인은 자신들이 특권을 가진 민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어 자신들과 동등해지고 [[통혼]] [[혼혈]]하여 순수한 [[야마토 민족|일본 민족]]의 혈통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하는 이들도 많았다.[* 일본 제국은 원래 [[창씨개명]] 등을 통해 고등교육•정치참여•고위직 진출 등의 정식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진 일본인이 되는 것을 함부로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애초에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자기들끼리 일본인 거주지를 형성하여 조선인과 최대한 거리를 두며 살아서 서로 접점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접점이 더 많았다. 사실 당시 [[조선]], [[대만]], [[사할린]], [[만주]]로 이주한 일본인은 공무 혹은 사업 목적이 아닌 이상 일본열도에서 먹고 살기 어려운 빈곤층이 많았다.[* 이는 당연한 것이, 이미 본국, 고향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 뭐 아쉬워서 사실상 외국인, 본국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식민지]]에 가려고 하겠는가? 당시 식민제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조차 본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라고 식민지와 비교해서 나을 거 별로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식민지 형성 과정에서 숱하게 죽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통치 기관 실무자들과 일선 군 장병들이 그 빈곤층 출신 지원자들로 채워졌다.] 이미 일본도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들이 도시의 하층민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은 당연했다. 이들의 자존심의 근거는 단지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점뿐이었다.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은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얻는 우월감과 조그만 경제적 특권, 알량한 정치적 특권에 매우 극심하게 집착하였다.[* 내선일체 이야기가 나오기 전인 [[염상섭]]의 [[만세전]]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요보라고 말하면서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 살지만, 촌에 들어가면 [[대만 원주민|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라는 문구가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딱 그 정도였다. 사실 이는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 공통적이다. 학연, 재산, 권력 등 모든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혈연이나 지연밖에 답이 없으니까.] [[만주국]]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만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특별대우를 받고 자라난 일부 일본인들은, 정작 본국인 일본에선 하류층 일본인들이 막노동을 하며 가난하게 사는 걸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국이나 [[식민지]]에서 나가야 했던 일본인들은 대다수가 일본에서 뼈저리게 고생하고 살아야 해서[*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히키아게샤]] 문서로.], 세월이 지나 늙어버린 이들이 과거에 우대받고 뻐기며 살던 곳으로 와서 [[향수병|그 세월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다.]][* 헌데 이게 일본인만 꼭 그런 게 아니고, [[식민지]]에서 착취하며 부를 누리던 당시 [[제국주의]] 나라들 부유층 및 국적 인물들은 다 똑같다. 한 예로 2000년대에 국내에 나온 [[영국]] 관련 기행 책자에서 지은이가 만난 [[영국인]] 노인이 비슷한 말을 했는데, 자신이 어릴 적에 [[인도]]에서 호강하고 살고 [[인도인]]은 [[머슴]]으로만 보았기에, 인도가 독립하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고생하며 수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인들과 있으면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한 걸 쓰기도 했다.] 때문에 본토에서 비슷하게 착취당했던 경험을 가진 일본 노인들이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적 아픔에 공감하며 유화책을 지지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식민지에서 착취자로 살다가 패전 이후 모든 기반을 잃고 본토로 쫓겨온 사람들은 주변국들이 되려 '피해자 행세'를 한다며 역사왜곡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처럼 일본제국 내의 모순적인 사회상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니 당연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같은 그럴듯한 슬로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식민지 조선인을 차별하여 자신들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려는 야욕과 그들을 착취해서 부유해지고자[* 애초 이는 너무 당연하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본토에서는 빈민 혹은 하류층이었으니까. 허나 이런 탓에, 해방 후 이들은 현지에서 극도로 미움을 사게 된다.] 하는 욕망만 있었다. 심지어 통감 정치 당시 조선에서 발행한 [[일본어]] 잡지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조선인을 너무 우대한다."라는 조선인으로선 황당해 할 [[비판]]을 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 이주 일본인이 되려 본토 거주 일본인보다 우월 의식이 훨씬 컸고, '차라리 일본에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도 있었다.[*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일본인 정착촌을 건설해서 그들의 주거지에만 살았기에 조선인과는 웬만하면 섞여 살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현지 일본인과 교류하는 일이 많았다.] 물론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일본 사회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일제가 선전하던 내선일체의 위선을 보여주는 예시로, [[이봉창]] 의사 역시 일본인이 되고 싶어 [[창씨개명]]까지 하고 [[일본어]]도 매우 능숙하게 잘했음에도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이라고 거부당한 바 있고, 이것이 의거로 이어졌다. 순종적이었던 식민지인마저 [[독립운동가]]로 만들어버리는 내선일체 정책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케이스. 김시창이 쓴 <빛 속으로>를 보면, 당시 내선일체 슬로건의 모순과 무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시창은 이 책을 써서 1940년 아쿠다가와상 후보까지 올랐으나, 이율배반 속에서 갈등하다 중공군, 북한군을 거쳐 1950년 [[6.25 전쟁]] 중 북으로 퇴각하다가 [[강원도]] [[원주시]]에서 병사했다. 당시 일제 지도층에게는 내선일체가 '''통치에 유리하므로''' 추진할 동기가 있었던 정책이었지만, 하층 일본인에게는 동화정책과 민족말살의 과정을 거쳐서 조선인들이 자신과 동등해짐으로서 '''일본인이라는 유일한 특권이 사라진다는 것에 매우 불만이 컸다.''' 이들은 내선일체 정책이란 명목으로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고 [[일본어]]를 쓰면서 토종 일본인으로 둔갑하여 일본인과 맞먹으려 드는 정책이라고 보아 불쾌하게 여겼다.[* 사실 그전에도 일본제국은 공식적으론 내선차별이 금지되었지만, 실생활에서 일본인들은 한반도와 일본 본토를 포함해서 조선인을 철저하게 멸시하고 얕보았다.] 이렇게 내선일체는 일본 일반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할 수 없었다. 다만 전쟁이 격화하여 일본의 인력 부족이 심해지자 조선에서 더 적극적으로 인력을 수탈할 필요가 커진 데다가, 일본 바로 옆에 있는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었고, 장기적인 통치를 위한 다른 유력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추진한 정책이다. 애초에 흡수하고 동화를 추구한다고 차별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다. [[아이누인]]에게는 아예 별개의 민족이란 인식도 갖지 않고, 사람 취급도 안하면서 차별과 강제동화정책을 계속 병행했었다.[* 아이누인을 정식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이미지도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어디까지나 '''2000년대 이후'''부터이다. 그것도 북방 4개 도서 관련해서 영토 권리를 위해 인정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쓰건 말건, 현대의 자이니치가 차별과 헤이트의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