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조선로동당 (문단 편집) === 활동 === [[1949년]] 6월에는 북조선로동당과 통합, 하나의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동시에 [[북한]] 정부의 '무력 적화통일' 노선을 지지하는 단체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남한에서만 신경을 쓰는 사이 북한에서의 주도권은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황.[* 45년 해방정국에서 한반도의 주요 정치단체들은 대부분 한반도의 중심지인 서울로 몰려 들었는데,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역시 통일정부가 세워진다면 당연히 서울이 수도가 될 거라는 생각이였는지 주요 인물들이 서울에 모였다. 물론 평남은 기독교와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함경도는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제법 강했던 지역이였는데, 이들은 조선공산당 중앙부와 단절되면서 김일성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실제로 남북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탄생한 조선로동당의 창립기념일은 합당일이 아니라 북조선로동당(정확히는 조선로동당 북조선 분국)의 창립일로 지정되어 있다. 남로계를 완벽히 무시한 처사라 할 수 있다. [[박헌영]]은 그래도 명목상 북한의 부수상이었다. 월북한 남로당계 인물들이 수천에서 만까지 이르게 있었고 이들에게는 박헌영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월북 남로당계는 박헌영을 그야말로 우상숭배하듯 받드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박헌영 헌시나 박헌영 선집이 자발적으로 발간되는 등 인기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기반이 남한에 있었고 김일성이 북한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박헌영은 북한에 넘어오는 순간, 이미 정치생명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름뿐인 부수상 겸 외무상 자리를 가졌을 뿐 박헌영은 실질적으로 김일성 눈치 보면서 정치 활동을 했었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1950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쪽 동지들이 호응하면 남조선 괴뢰는 무너집니다. 스탈린 동지만 도와주면 미국 애들 오기 전에 적화통일이 완료될 것입니다." 라며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정작 [[김일성]]은 그 주장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의도적으로 미제간첩 박헌영의 의도적 공화국 전복 기도로 포장하고 있으나, 김일성은 박헌영의 '남조선 20만 남로당원 봉기설'을 믿은 것이 아니라 모택동과 스탈린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24/2010062400087.html|"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또한 박헌영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계속해서 김일성과 미군에 휴전 내지 종전을 제안하였으나 김일성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박헌영의 간첩질과 거짓말 때문에 조국통일전쟁이 실패했다' 라며 일방적으로 박헌영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사실 [[한국전쟁]], 6.25가 벌어지기 전부터 대한민국에는 위에 언급한 바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제정, 국군과 경찰까지 동원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는 잔혹한 토벌 작전을 강행했고, 결국 전쟁 발발하기 몇 달 전의 남로당 세력은 거의 전멸해 버렸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의 지속적인 정치적 공격으로 위기로 몰렸고, 이러한 상황에서 최후의 도박으로 '남로당 봉기설'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전후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서 "미제의 간첩"이라며 숙청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