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조선로동당 (문단 편집) === 활동 === 남로당 결성 초기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율 1위가 남로당, 2위가 근로인민당이었다.(출처: 김상숙, 10월 항쟁) 지지는 여순사건 이후부터 지속된 반공 선전, 정부 주도 학살에 대한 공포, 토지개혁, 빨치산들의 약탈에 대한 반감 등 복합적 이유로 조금씩 잃게 된다. 남로당 결성 초기에 크게 폭력투쟁을 벌인 일은 없었다. 다만 위의 여운형의 행보만 봐도 남로당에 2020년대 대한민국 정당에 바라듯 북한과 연관이 아예 없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이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아 계획한 집회 장소에서 삐라만 뿌리는 일이 많았다. 남로당 결성 초기 집회 시위로는 전평이 1947년 2월 18~19일 제2차 전국대회를 개최했는데 경찰이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여 전평 간부 51명을 체포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22일 24시간 동안 파업을 벌인 정도 충돌이 있었다. 그런데 1947년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분위기가 보이자 [[미군정]]은 '815 폭동 음모사건'을 막는다는 구실로 좌익 인사를 대규모 검거했다. '815 폭동 음모사건'은 2차 미소공위 결렬 때라 [[정판사 사건]]이 제1차 미소공위 결렬 때 일어난 것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정판사 사건 변호사인 김용암, 조평재, 윤학기 변호사가 연루되고 검사는 조재천으로 정판사 사건과 똑같았다. 즉 조작 의혹이 있는데 연구가 더 필요하다. 정판사 사건처럼 대한민국 국적으로 죽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가 엮인 사건도 외면받다가 최근에야 연구됐는데 저게 연구됐을리가. 만약 조작이라면 좌익은 그다지 폭력투쟁을 안 했는데 미군정의 탄압은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적으로 전개 및 가시화되자, 남로당은 단독정부수립운동 노선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던 좌우합작 세력등 중도파 세력들은 여운형 암살 이후 구심점을 잃었기 때문에 사실상 명망 있는 이승만이 주창하던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기정 사실로 되었다. 그러자 남로당은 기존의 파업활동을 넘어서 각종 테러나 무장폭동, 게릴라전, 노동자 총파업 등을 주도하면서 남한 정부를 흔들어 놓았다. 대표적으로는 1948년 2.7 총파업 사건이나 [[제주 4.3 사건]],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생했다. 다만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은 남로당 중앙은 몰랐던 일이라는 것이 다수설이다. 14연대 반란군 가운데 주력은 [[이현상]]과 합류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 즉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조선인민유격대는 전쟁 전 거의 토벌되었다. 다만 전쟁 때 퇴로가 막힌 조선인민군이 합류해서 다시 세력이 살아난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는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악마로 간주되었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 공산주의자는 이제 '빨갱이'로 불리어졌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조차 필요 없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는 인간의 기본적 위엄과 권리를 박탈당한 '죽여도 되는' 존재, '죽여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에는 '빨갱이'를 죽이는 것 자체가 애국하는 일이고 민족을 위하는 일이며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일로 생각되었다. >---- >이제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민족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1차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반공 민족'의 발견은 이승만 정권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두보였다. >----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다른 남로당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형무소에 갇혔다가 전쟁이 터지자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로 죽는다. 대부분 1948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삐라나 포스터를 붙이다가 검거되었다.[[https://naver.me/5ZvCQbRa|#]] 물론 포스터만 붙인 건 아니고 5.10 선거(제헌의회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전화선을 끊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인단을 뽑고 각종 여론조사를 했다. 해방정국 시기는 [[김구/평가|수많은 백색테러의 배후로 의심받는]] 강경우익 [[김구]]도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하며 5.10 총선거를 보이콧하던 시대인데, 남로당원은 당연히 2020년대 한국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국가보안법 위반을 했다. 전국 형무소 수감자 70%가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는 자료, 80%가 좌익사범이었다는 자료도 있다. 대전형무소의 경우만 보면 정치범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7~8명이 들어갈 감방에 15명 정도를 구겨넣고, 수용가능인원이 원래 1200명인데 1950년이 되면 약 4000명이 수감되었다고 한다.[[http://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612488278763|#]] >숙군을 추진한 조직과 인물들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민간인 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군은 단지 군 조직을 정화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며, 숙군 과정에서 사용된 조직과 인적 자원들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에서 그대로 전용되었다. 1948년 제주도와 여순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에 군 정보기관과 헌병대 등이 직접 관여하면서 민간인 학살은 매우 조직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니 다수는 남로당이 탄압받자 바로 전향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죽는다. 보도연맹의 주요 활동이 남로당원 자수운동이다.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자수에 동의한 남로당원은 신문에 광고 형태로 탈당 성명서를 연달아 발표하기 시작하여 중앙•지방 일간지 하단 광고란은 탈당 성명서로 뒤덮였다. 1949년 12월 기준 전 남한 일대의 전향자 수는 52182명이었다.[* 출처: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보도연맹원은 국민/비국민의 경계선에 매달려 있는 존재였다. 1949년에 보도연맹원은 포섭된 채 배제된 자들이었고 배제된 채 포섭된 자들이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돌아온 탕아'가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칠 기회조차 박탈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보도연맹원이라는 존재는 경계선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국가가 생명을 좌우하는 생사여탈권을 국민에게 행사함으로써 국가의 살벌한 권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보도연맹원의 운명은 국민이 된다는 것, 그 길이 얼마나 멀고 위험한 것인지를 가르져 주었다. >----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