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조선로동당 (문단 편집) == 결성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공산당)] 1945년 8.15 광복 이후 항일투쟁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은 합법정당이자 최대정당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으로 전국에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놓았기에 금방 [[전평]] 등의 노동조합도 만들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반파시즘 투쟁 공로로 [[프랑스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이 잘 나간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좌익 정치세력은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까지 하였으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인민공화국)] >일제시기에도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반공주의 선전이 있었지만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통치하에서 국내외 사회주의자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며 견결한 투쟁을 지속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좌익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사회주의 이론이 널리 확산되어서라기보다는 독립투쟁에서 보여준 사회주의 세력의 지속적 투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란 민족 독립투쟁의 전위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해방 후 좌익 활동의 튼튼한 밑거름이 되었다. > >1945년 말부터 전개된 이른바 신탁통치 파동은 좌익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은 계기였다. 우익 세력은 소련이 주장한 신탁통치에 좌익이 찬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좌익 세력을 친소주의자=반민족주의자=매국노로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 소련은 신탁통치를 제안하지도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다는 사실이 몇 달 뒤에 알려졌지만 극우 세력의 선전은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미군정은 1945년 말까지 이승만, 김구 계열을 적극 지원했지만, 여론은 최악이었다. 우익세력은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약했으나,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 때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히 좌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만든 것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고 추정되는데《'빨갱이'의 탄생》에서는 거의 안 다룬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46년]] [[5월]] 미군정은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만들어 조선공산당을 사실상 불법화했고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으로 정치활동이 힘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도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으로 보는 '빨갱이' 개념은 없었다.[* 후술하듯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으로 보게 된 시발점은 김득중의 연구에 따르면 여순사건이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이며 정판사 사건 재판 진행중인 1946년 8월에 미군정이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저 시대 사람들이 경험한 자본주의는 일본 제국주의뿐이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아래 설문조사는 미군정이 통치한 지 2년이 되어가는 1947년 7월 6일 시행된 점, 이미 파괴된 [[인민위원회]]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점을 볼 때 단순히 국호를 묻는 투표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신임투표이다. 즉 당대 대중은 [[김구]]와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이미 미군정이 해체한 지 오래된 [[여운형]]과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 ||<-4>(1) 국호는? || || 1위 || '''조선인민공화국''' || 1708표 || '''70%''' || || 2위 || '''대한민국''' || 604표 || '''24%''' || || 3위 || 기타 || 8표 || 1% || || 4위 || 기권 || 139표 || 4% || ||<-4>(2) 정권 형태?|| || 1위 || '''인민위원회''' || 1757표 || '''71%''' || || 2위 || '''종래 제도''' || 327표 || '''14%''' || || 3위 || 기타 || 262표 || 10% || || 4위 || 기권 || 113표 || 5% || ||<-4>(3) 토지개혁 방식?|| || 1위 || '''무상몰수 무상분배''' || 1673표 || '''68%''' || || 2위 || 유상몰수 유상분배 || 427표 || 17% || || 3위 || 유상몰수 무상분배 || 260표 || 10% || || 4위 || 기권 || 99표 || 5% || ||<-4>{{{-2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35939054&referrerCode=0&searchKeyword=%EC%97%AC%EB%A1%A0%EC%A1%B0%EC%82%AC|출처]] }}} ||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선호도가 위와 같다면 아래는 미군정에 대한 선호도를 보여주는 여론조사이다. ||<-4>(1)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 '''1위''' || '''기권''' || '''4686명''' || '''98%''' || || 2위 || 위생 시설 || 96명 || 2% || ||<-4>(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 1위 || 식량 정책 || 2534명 || 53% || || 2위 || 산업 운영과 주택 관리 || 1482명 || 31% || ||<-4>{{{-2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종로, 본정 입구, 노량진에서 통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35939054&referrerCode=0&searchKeyword=%EA%B8%B0%EA%B6%8C|출처]] }}} || 정판사 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탄압에 대해 공산당은 [[9월 총파업]]으로 항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대중에 의해 [[10.1 사건]]이 일어난다. 박헌영과 공산당 주요 간부는 1946년 9월 7일 체포령을 받자 월북한다. 이런 상황에서 3당 합당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3당 합당을 원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 대회파(=반박헌영파)는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고 같은 시기에 공산당 간부파(=박헌영파)는 남로당을 결성하였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180|자세한 정보]] 여운형과 박헌영의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소련군정 문서를 봐야 한다.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여운형은 본래 3당 합당에 반대했으나, 김일성에게 설득당해 3당합당을 수락한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 >김일성의 이 발언은 여운형의 아픈 곳을 건드렸습니다. 여운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로동당으로 합당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 중[[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10&position=-1|#]]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10&position=-1|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에 전 정무총감인 엔도가 조선인민의 대표들을 불러 “4~5일 후면 서울에 붉은 군대 선발대가 도착할 것이며,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장해제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월 15일 오후 서울에는 붉은 군대가 서울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붉은 군대를 조용히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실망했으며, 38선이 획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더욱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로마넨꼬: 당신은 우리의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며, 우리는 명령받은 바로 그 지역까지만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운형: 나는 38선 이남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범들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신은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가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이 미군이 진주한 남조선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20&position=-1|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위와 같이 좌익 정치를 분석하려면 여운형이 소련군정 지역에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를 봐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운형이 빨갱이가 아니라 양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오직 여운형과 박헌영의 사상이 조금 덜 왼쪽인지 더 왼쪽인지만 관심있기 때문에 여운형은 오로지 절대선이라고 배우는 좌우합작 그 자체만을 위해 모든 행동을 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사실 여운형은 좌우합작만이 아니라 위와 같이 미군정으로부터의 해방도 목적이었다. 좌익 정치 세력은 46년 11월에 3당 합당을 통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남조선로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46년 6월 22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바뀌면서 사실상 분리되었고, 8월 29일 연안파의 조선독립동맹계열이 세운 조선신민당(남조선신민당은 이 조선신민당의 남쪽분국쯤 된다.)과 통합해서 북조선로동당<일명 북로당>이 되면서 기존의 조선공산당의 위치가 약화된 것도 영향을 받았다.] 초창기 남로당은 적어도 '대중 정당'을 지향하려고 했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노동당'이란 개념이 공산당의 개념이 아니었다[* 당시 기준으로 '공산당' 이란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주의]]노선을 명확히 지지하는 이념 정당을 뜻하는 정당명이었고, '노동당'은 이보다는 좀 넓은, 즉 스탈린주의 이외에 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좌파 그룹을 모두 포괄할 수 있고 이념적 선명성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입장 대변을 우선시하는 대중정당을 의미하는 정당명이었다.]. 대중정당을 의미하는 것. [[허헌]]이 남로당의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부위원장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내 주도권 장악문제로 여운형과 박헌영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다. 여운형은 우익세력과 연대해서 [[좌우합작]]을 강조했지만, 박헌영은 좌우합작을 반대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은 자신을 고립화시키려는 미군정의 전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이 공산당 계열을 고립시킨다는 건 박헌영만이 아니라 소련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위와 같이 김일성도 여운형에게 좌우합작보다 좌익 정당 합당을 설득한 것이다. 이전부터 박헌영과 여운형 등 좌익 고위 정치인은 수차례 방북하여 소련 인사와 [[김일성]]과 논의하였는데 소련은 좌우합작보다 좌익 통합을 원했다.[* 출처: 스티코프 일기.] 미국의 전후조선처리방안인 과도입법기구안을 보면 좌우합작이 공산당 계열 고립화 정책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 내지 고립화되어야 함 >공산당은 1/16~2/16의 역할을 갖게 하거나 고립화 >---- >과도입법기구안[[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71704036&referrerCode=0&searchKeyword=%EA%B3%A0%EB%A6%BD%ED%99%94|#]] >좌우합작은 비록 공산당의 고립화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승만•김구로 대표되는 이른바 극우세력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략) 중간파가 주도한 합작운동은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극좌극우를 대체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주의 입장에서는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운동을 대리하고 있는 김규식•여운형의 힘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우극좌세력에 지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중략)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사회주의세력이 배제된 중간파 집단의 대표성을 소련이 수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85~186 당권을 장악한 박헌영이 종래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비판했고, 여운형은 실의에 빠진 채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나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자, 여운형은 다시 [[좌우합작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