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조선로동당 (문단 편집) === 숙청 === 전쟁은 초반에는 파죽지세로 흘러갔으나, 국군과 UN군의 맹렬한 반격과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박헌영이 의도하던 빨치산의 봉기는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1951년]]을 기점으로 전선은 고착화 되었다. 전쟁을 지속해서 미군의 전비를 고갈시키고, 그 사이에 유럽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면서 휴전을 끝까지 거부한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했다. 유럽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은 [[마셜 플랜]]으로 역공당했다. 막대한 전비에 학을 뗀 소련 공산당은 승산없는 전쟁을 매듭짓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UN]]측에 정전협정을 제안한다. 이를 계기로 정전협정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자연히 미국의 전면 개입이 있기도 전에 적화통일을 한다는 북한의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고 남한 내에 잠복한 20만 당원 총궐기를 주장하다가 입지가 극도로 좁아진 남로당계에게 덤터기를 씌우게 되는 계기였다. 남로당 숙청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게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이 '미제와 내통했다'는 혐의가 시초였다. 리승엽이 숙청당하고, '리승엽 간첩사건'으로 구실잡은 김일성은 이어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을 숙청할 빌미를 마련했다. 1953년 3월에 박헌영은 부수상직을 상실하고 구속당했다. 그리고 남로당 간부들도 연이어 구속당하게 된다. 휴전 협정 후 1953년에 김남천과 [[임화]] 등의 문학가들이 남로당 숙청이 시작되면서 총살당했다. 1953년~1955년까지 2년간 박헌영은 모진 고문을 받고 1955년 12월 북한 재판정에서 '미제의 간첩' 선고받았고, 재판끝난 즉시 남로당 간부들은 즉결처형당했다. 그러나 [[박헌영]]만은 즉시처형을 못했는데, '증거불충분'이었다. 박헌영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게 그를 급히 처형했다가는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56년에 [[8월 종파사건]]이 터지면서, 김일성이 즉결처형을 지시해, 1956년 7월 19일[* 1955년 12월에 처형당했다고 하지만, 당시 여러 정황 상 보면 7월 19일이 유력하다.[[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4808976968012&barcode=4808976968012&prePageNo=1&prePage=480&keyword=preTab=02&isDaumSearchRefer=false#tab_preview|#]]] 처형당했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남로당이 완전 숙청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으로는 박갑동이 있는데, 이 사람은 사형선고까지 언도 받았으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석방되어 북한을 기적적으로 탈출해 중국,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여 현재 일본 도쿄에서 살며 반북운동을 지휘중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남로당 중요간부 출신이라고 스스로 자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이자 남로당 하급간부 출신이다. 남로당 어떤 간부 명단을 봐도 안 나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쓴 회고록과 주장들은 자신이 직접 겪은 회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사실관계 부분에 잘못된 정보들이 많으므로 걸러 들을 필요성이 있다.] 또한 현재 북한에서 찍은 드라마인 <한 검찰일군의 수기>에서는 완전히 권력에 눈이 먼 종자나 미국의 간첩으로 나오게 됨으로서 북한에서의 남로당은 완전히 미제반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됨으로서 북한 역사에서 완전히 숙청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