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홍일(군인) (문단 편집) === 백선엽과의 비교 논쟁 === [[2020년]] [[7월 10일]] [[백선엽]]이 사망한 직후 다시금 그에 대한 [[원수(계급)|명예원수]] 추서 주장이 나오고, 이를 두고 이념 논쟁이 재현되면서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의 대항마 비슷하게 부각되고 있다. 항일 투사로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고, 창군 이래 최초의 장성급 임관자이며, [[6.25 전쟁]]에서도 백선엽 등의 상관으로서 극도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 방어 작전을 이끌어 성공시킨 김홍일이야말로 국군 명예원수의 자격에 합당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과거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유용원]]의 경우 김홍일과 백선엽의 동시 명예원수 추대를 주장한 바 있다.[[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9&num=33722|#]] 참고로 백선엽 장군 사망을 전후하여 일각에서 제기한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 장군보다 더 중요한 전공을 세웠는데 백선엽만 띄워줬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선 전투의 병력 수습 및 이후 지연전 과정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백선엽은 자서전에서 한국이 패망할 위기가 수차 있었지만 그 하나가 한강전선이었고 그 다음 전선이 낙동강 교두보였다고 했으며, 이 한강방어선이 조기에 무너졌다면 미국은 지상군과 전투장비를 투입할 시기를 놓쳐 전세를 만회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7070032920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7-07&officeId=00032&pageNo=5&printNo=13161&publishType=00020|#]] 그래서 6.25전쟁사에서도 김홍일 소장의 탁월한 부대지휘[* 6.25전쟁사(3) pp.226-227]를 한강선 방어선 지탱의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지연전은 어디까지나 지탱 가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실시된 여건조성작전(shaping operations)의 영역에 속한다. 이 방어선은 낙동강선에 구축됐고, 여기서 공세를 저지하고 적을 [[공세종말점]]에 도달케 함으로써 여건조성작전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결정적 작전(decisive operations)은 1950년 8월 북한군이 대구를 목표로 3개 사단을 투입하여 강력한 주공을 실시했을 때 벌어졌다. 이것이 [[다부동 전투]]다. 8월 공세의 좌초 이후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을 초과했다는 것은 명확해졌고,[* [[https://www.army.mil.kr/gunsa_research/pdf/120.pdf|석영준 (2004). 작전한계점 고찰: 6.25 전쟁 전례분석을 중심으로. 군사연구(120), p.308]]]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의 공세이전(counter-offensive)도 가시화되었다. 따라서 여건조성작전을 담당한 김홍일 장군의 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결정적 작전을 수행한 백선엽 장군의 전공이 그보다 작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스스로 자서전에 김홍일 장군에 대한 업적을 칭송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략과 전술적 측면에서 두 장군 모두 업적이 있다. 북한군 8월 공세 종결 시점에서 두 사람의 전공이 비슷하다고 쳐도,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 장군에 비해 한국전에서의 전공이 크다고 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김홍일 장군은 1950년 9월 1일 1군단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영원히 야전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백선엽 장군은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 기간까지 야전의 사단장과 군단장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이후에는 백야전사를 이끌며 후방 빨치산 토벌작전까지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백선엽 장군은 [[평양 탈환]], 중공군 5월 공세에서의 한계령-대관령 방어, 지리산 빨치산 소탕 같은 굵직한 전공을 세우면서도 크게 흠잡을만한 군사적 실책은 저지르지 않았다. 따라서 김홍일 장군의 성과를 강조하더라도 백선엽 장군의 전공이 그보다 못했다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 복무기간이 너무 짧았다. 물론 이 말이 김홍일이 백선엽보다 지휘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일례로 전쟁 초기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로 우인접 7사단이 위기에 빠지자 측방노출을 우려한 김홍일이 [[제1보병사단]]장이었던 백선엽에게 전술적 후퇴를 지시하였지만, 백선엽은 육군본부의 철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1사단의 진지 고수를 고집하다 이후 사단 전체가 분산철수하는 위기에 빠진다.[* "사단장 이상의 대부대 지휘관은 독단적인 진행이 필요하거늘 이를 이해치 못하니 안타깝다." 김홍일 저서 대륙의 분노 출처][* 백선엽 또한 자서전에서 "전후 김장군(김홍일)의 후퇴건의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고 봉일천 전선을 사수하려했던 사실은 다소의 논란을 일으켰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이를 간접 시인하고 있다.] 즉, 사단장급 되는 지휘관은 현장 상황에 따라 독단적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당시까지는 위관급 장교 수준의 소규모 부대 지휘경험만 있던 백선엽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백선엽의 경우 회고록 "군과 나"에서 김홍일이 만들어준 6일의 시간 덕분에 한국군이 이겨낼 수 있었으며, 중국 국부군에서 전투 경험 덕분에 지연작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7070032920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7-07&officeId=00032&pageNo=5&printNo=13161&publishType=00020|#]] 다만 이 시점의 백선엽 장군은 지금으로 치면 중대장 할 나이인 만 30세의 젊은이고, 김홍일 장군은 국부군에서의 실전경험으로 잔뼈가 굵은 52세(오늘날에도 장성급 지휘관의 나이다)의 숙장이자 까마득한 선배 장군이라는 사실 역시 감안해야 한다. 사실 군사적 성과를 넘어 백선엽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80년대 후반 전쟁 회고록이 새로운 신문 기획연재물의 소재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당시 신문의 위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넷플릭스]] 급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회고록을 출판하거나 좌담회, 인터뷰 등을 연 경우는 있었으나 신문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회고록을 연재한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 [[정일권]]의 회고록 기획 연재였고, 그 이후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이 백선엽의 군과 나 기획 연재였다. 만약 이 연재가 없었으면 백선엽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을 것이다. 백선엽의 부각은 군과 나 기획연재의 성공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가 바로 자서전의 유통량이다 백선엽의 경우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김홍일 자서전의 경우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한국전 참전 장성 중 [[김종오]], 김홍일처럼 빛나는 전공으로 백선엽만큼 "스타성"있다고 할만한 장군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장군들은 김종오처럼 이른 나이에 요절하거나, 김홍일처럼 연배가 한참 위라 회고록 신문 연재가 본격화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결국 백선엽이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국군 장성이 된 데에는 본인의 전공, 미군의 지속적인 우대, 신문 기획연재의 상업적 성공 등 여러 요인을 들 수 있지만 경쟁자들 중 유일하게 '''99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홍일과 백선엽 모두 6.25 전쟁 당시 국군의 일원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현재는 백선엽이 다른 전쟁영웅[* 김홍일, [[김종오]] 등]의 업적을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 국군 원로들이 반발하는 이유이고, 백선엽의 대항마로 김홍일을 부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http://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954303.html|#]] 단, 원로들의 이러한 반발 역시 마냥 객관적이라기보단 "[[일본군|일군]] 출신", "[[만주군|만군]] 출신", "국부군 출신", "평안도 파벌", "함경도(알래스카) 파벌", "영남 파벌" 등 건군 초부터 1950년대까지 군 내에서 벌어진 출신 및 지연에 따른 파벌 다툼과 이로 인한 개인적 은원이 깊게 엮여있다는 점 역시 기억해둬야 한다. 일례로, [[국방일보]]에서 2010년대 초 진행한 "다시쓰는 6.25 전쟁"이라는 기획연재를 담당하던 국방일보 기자 겸 군사사 연구자는 당시 생존해 있던 참전 장성들이 연재의 전황이나 전공 서술보다 '''상대 파벌 사람들이 어떻게 묘사됐는지'''에 가장 신경썼다고 기억할 정도였다. 60년이 지나서 오늘내일 하는 사람들끼리도 이랬다니 정말 지독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셈인데, 1950년대 "평안도 파벌"의 최선임이던 백선엽이 이러한 갈등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리 없다. >“망할 놈에 영감태기가 날 보고 한강 남안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여야 된다고 아주 명령조로 이야기 하더라고.” 조금 전 총장 방을 찾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이 오랜 중국군 공군 전략경험을 진언한 것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장군은 무슨 놈에 장군, 허구헌날 후퇴만 하는 중국군 경력을 가지고.” 전시 위급한 상황에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일본군 경력자의 중국군 경력자를 과소평가하는 군 통수권 내부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방의 상황이 조금씩 보고가 이루어지자 채 장군의 푸념은 끝이 났다. > > 김계원 (개전당시 야전포병단장),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284~285쪽.)) 이처럼 군 내에서 파벌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채병덕]]의 경우 인품이 뛰어나서 [[총참모장]]을 했던 인물인데 불구하고 이러한 파벌에 자유롭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채병덕이 김홍일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응준]] 덕분이었다. 이 두 사람은 6.25전쟁이라는 국난을 서로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백선엽의 자서전에서도 이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선엽이 소문을 듣고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에 찾아가니 김홍일 장군이 나를 보자 잘왔다고 반가워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과연 이러한 전공논쟁이 진정으로 두 전쟁영웅을 위한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7070032920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7-07&officeId=00032&pageNo=5&printNo=13161&publishType=00020|#]] 사실 이러한 전공 논쟁은 무의미하기도 하다. 전쟁은 한 개인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선엽]], 김홍일, [[김종오]] 등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에서 활약한 지휘관 중 단 1명이라도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고 서로를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단 1명이라도 없었더라면 한국은 정말로 무너졌을 것이다. 단, [[채병덕]]만은 예외다.[* 물론 채병덕이 치명적인 오판을 여럿 저지르긴 했지만, 그에게 개전 초 패전 책임을 모두 떠넘기는 건 너무 가혹한 면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문서 참조] 한편 6.25 전쟁 4대 영웅 명단에 김홍일은 포함된 반면 백선엽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백선엽과의 비교에서 김홍일의 비교우위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일단 백선엽이 제외된 이유는 백선엽이 처음 명성을 얻은 다부동 전투가 낙동강 방어전의 일부여서 [[월튼 워커]]의 공로와 중복 되는 면이 있고, 당시 백선엽은 아직 생존한 상태여서 이미 고인이 된 4명과의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점을 반영한 결과였다. 일각에선 백선엽이 해당 명단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백선엽은 대단한 공로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휴전으로부터 불과 30년 후에 나온 선정이, 관련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된 이후의 것보다 절대적으로 신뢰성과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명단에 없더라도 6.25 전쟁에 지대한 기여를 한 다른 전쟁영웅들도 수없이 많은데,[* 예를 들어 대한해협 해전 당시의 백두산함 수병들.][* 김홍일과 함께 활동했던 광복군 출신 청년 장교들도 전쟁 중에 다수가 전사했다. [[장철부]], [[이의명]], [[이건국]], [[차약도]], [[김영남(독립운동가)|김영남]], [[박영진(독립운동가)|박영진]] 등은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자칫 그들의 공로마저 폄하될 수도 있는 주장이다. 결정적으로 백선엽은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특설대 복무 및 친일 행적이라는 크나큰 과오가 존재한다. 6.25전쟁 때 그토록 훌륭한 성과를 올렸음에도 아직까지 공공연하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김홍일은 일생에 흠잡을 데가 없다.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또 다시 '명예원수' 같은 전 군과 국민의 존경의 대상을 정해야 한다면 참군인의 모범을 두고 친일 간도특설대 출신을 뽑아야 할까? 라는 의문부호가 붙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