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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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직위 및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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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국방부 선정 6.25 전쟁 4대 영웅
월튼 워커
더글라스 맥아더
김홍일
김종오



















대한민국 제7대 외무부 장관
김홍일
金弘壹 | Kim Hong-il


파일:김홍일장군.jpg

출생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
(現 평안북도 룡천군 오흥리)[1]
사망
1980년 8월 8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2유공자묘역 10호
본관
김녕계 김해 김씨[2]

일서(逸曙)·산남(山南)
재임기간
제7대 외무부 장관
1961년 5월 21일 ~ 1961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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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진건
형제자매
형 2명
배우자
최서경
학력
오산학교 (졸업)
구이저우 군관학교 (졸업)
후난 육군실시학교 (산포병과 / 졸업)
중화민국 육군대학 특별반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기)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7, 8
경력
경신학교 교사
명동중학교 교사
국민혁명군 소교
외무부 장관
신민당 당수
광복회 회장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을지무공훈장 수훈
태극무공훈장 수훈
군사 경력
임관
귀주강무학교 (기수 불명)
육군사관학교 (특7기)
복무
중화민국 구이저우 검계군벌군
1919년 ~ 1920년
대한의용군
1920년 ~ 1922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1921년 ~ 1922년
국민혁명군
1921년 ~ 1947년
한국 광복군
1945년 5월 ~ 1945년 11월
대한민국 육군
1948년 ~ 1951년
최종 계급
중장 (국민혁명군 육군)
참장 (한국 광복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대한의용군 제3중대장
대한의용군 사령관
극동공화국군 한인특립보병대 사령관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군정부 군수설계위원
국민혁명군 19집단군 참모처장
중화민국 지식청년군 참모처장
한국광복군 사령부 한인 참모장
중화민국 한교사무처장
대한민국 육군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제1군단 초대 군단장)
대한민국 육군종합학교장(육군사관학교장)
참전
한국독립운동
2차 호법운동
러시아 내전
국민혁명
국민당의 1차 북벌
국민당의 2차 북벌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6.25 전쟁


1. 개요
2. 생애
3. 평가
3.1. '오성 장군'의 신화
3.2. 6.25 전쟁 4대 영웅
3.3. 백선엽과의 비교 논쟁
4. 저서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연보
8. 선거 이력
9. 관련 문서
10. 출처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 초명은 홍일(弘日)이며 중국어 이름으로는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등을 썼다.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한민국 육군 중장.

구한말에 태어나 국권 피탈 직후인 1910년대 무장투쟁 시기부터 광복 때까지 수십 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며 무장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동시에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군인으로서 국민당의 중국 통일에도 일익을 담당했고 중일전쟁에서는 최전선에서 중국 국민당군을 이끌고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6.25 전쟁에서는 초반에 붕괴된 국군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북한군의 선봉을 일주일 간이나 막아내어 신생 대한민국을 구원한 전쟁영웅이다.

그가 평생 조국을 위해 활동한 범위는 자그마치 만주, 러시아시베리아부터 중국 강남, 한반도까지 사실상 동아시아 전역을 아우른다. 6.25 전쟁 이후에는 주 중화민국 대사,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의 민정 참여, 한일협정 체결 등에 반대하면서 정계에 투신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항일·반공·반독재에 모두 참가참군인으로 기억된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홍일(군인)/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0000003292_002_20170411215232156.jpg
생전의 모습


3. 평가[편집]



3.1. '오성 장군'의 신화[편집]


국부군에서 중장(★★)[3], 한국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한 기록 때문에 합해서 '오성' 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국군에서 임관할 당시 계급이 준장이었다. 이승만은 1951년 9월 그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다.[4][5]

이처럼 이승만은 예편한 김홍일 중장의 전공을 치하하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1962년에 수여받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까지 더하여, 김홍일은 건국공로훈장과 태극무공훈장을 모두 받은 독립운동가이자 전쟁영웅으로 기록되었다.[6]


3.2. 6.25 전쟁 4대 영웅[편집]


1983년 국방부 선정 6.25 전쟁 4대 영웅
월튼 워커
더글라스 맥아더
김홍일
김종오

휴전 30주년을 맞은 1983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이후 선배 장군들을 몰아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6.25 전쟁 영웅을 선정해달라고 선배 장교인 박경석 장군에게 부탁한다. 둘은 육군대학 정규과정(박경석 중령, 전두환 소령 시절)에서 같은 기수로 교육을 받은 인연이 있다. 당시 박경석 장군은 혼자서 4대 영웅을 선발할 수 없다면서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한림 장군, 제2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병형 장군, 제3보병사단장을 역임한 박정인[7] 장군을 초청하여 회의를 했다.

이들은 만장일치로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을 선정했다.당시에는 6.25전쟁에 참여한 장군들 거의 생존했고 이들에게 여론조사를 했을 때도 역시나 만장일치로 위의 4인이 선정됐다. 각자의 선정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박경석 장군의 관련 증언. 영상 15분부터

  • 김종오: 6.25 개전 직후의 춘천 전투에서 6사단장으로 북한군 선봉 부대의 남침을 포격으로 저지시켜 수도권 지연 방어에 공헌했으며, 이후 9사단을 이끌어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국군을 격파.
  • 김홍일: 당시 국군에서 대규모 작전을 지휘한 거의 유일한 경험자로서, 제1군단장 자격으로 전쟁 초반의 지연 방어를 진두지휘. 이후의 낙동강 방어전, 반격을 위한 전력 보전을 실현해냄.
  • 월튼 워커: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으로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함.
  •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6.25 전쟁의 주요 전투를 이끌었고,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전세 역전으로 서울 수복, 북진을 주도했음.


3.3. 백선엽과의 비교 논쟁[편집]


2020년 7월 10일 백선엽이 사망한 직후 다시금 그에 대한 명예원수 추서 주장이 나오고, 이를 두고 이념 논쟁이 재현되면서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의 대항마 비슷하게 부각되고 있다. 항일 투사로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고, 창군 이래 최초의 장성급 임관자이며, 6.25 전쟁에서도 백선엽 등의 상관으로서 극도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 방어 작전을 이끌어 성공시킨 김홍일이야말로 국군 명예원수의 자격에 합당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과거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유용원의 경우 김홍일과 백선엽의 동시 명예원수 추대를 주장한 바 있다.#

참고로 백선엽 장군 사망을 전후하여 일각에서 제기한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 장군보다 더 중요한 전공을 세웠는데 백선엽만 띄워줬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선 전투의 병력 수습 및 이후 지연전 과정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백선엽은 자서전에서 한국이 패망할 위기가 수차 있었지만 그 하나가 한강전선이었고 그 다음 전선이 낙동강 교두보였다고 했으며, 이 한강방어선이 조기에 무너졌다면 미국은 지상군과 전투장비를 투입할 시기를 놓쳐 전세를 만회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6.25전쟁사에서도 김홍일 소장의 탁월한 부대지휘[8]를 한강선 방어선 지탱의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지연전은 어디까지나 지탱 가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실시된 여건조성작전(shaping operations)의 영역에 속한다. 이 방어선은 낙동강선에 구축됐고, 여기서 공세를 저지하고 적을 공세종말점에 도달케 함으로써 여건조성작전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결정적 작전(decisive operations)은 1950년 8월 북한군이 대구를 목표로 3개 사단을 투입하여 강력한 주공을 실시했을 때 벌어졌다. 이것이 다부동 전투다. 8월 공세의 좌초 이후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을 초과했다는 것은 명확해졌고,[9]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의 공세이전(counter-offensive)도 가시화되었다. 따라서 여건조성작전을 담당한 김홍일 장군의 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결정적 작전을 수행한 백선엽 장군의 전공이 그보다 작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스스로 자서전에 김홍일 장군에 대한 업적을 칭송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략과 전술적 측면에서 두 장군 모두 업적이 있다.

북한군 8월 공세 종결 시점에서 두 사람의 전공이 비슷하다고 쳐도,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 장군에 비해 한국전에서의 전공이 크다고 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김홍일 장군은 1950년 9월 1일 1군단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영원히 야전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백선엽 장군은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 기간까지 야전의 사단장과 군단장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이후에는 백야전사를 이끌며 후방 빨치산 토벌작전까지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백선엽 장군은 평양 탈환, 중공군 5월 공세에서의 한계령-대관령 방어, 지리산 빨치산 소탕 같은 굵직한 전공을 세우면서도 크게 흠잡을만한 군사적 실책은 저지르지 않았다. 따라서 김홍일 장군의 성과를 강조하더라도 백선엽 장군의 전공이 그보다 못했다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 복무기간이 너무 짧았다.

물론 이 말이 김홍일이 백선엽보다 지휘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일례로 전쟁 초기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로 우인접 7사단이 위기에 빠지자 측방노출을 우려한 김홍일이 제1보병사단장이었던 백선엽에게 전술적 후퇴를 지시하였지만, 백선엽은 육군본부의 철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1사단의 진지 고수를 고집하다 이후 사단 전체가 분산철수하는 위기에 빠진다.[10][11] 즉, 사단장급 되는 지휘관은 현장 상황에 따라 독단적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당시까지는 위관급 장교 수준의 소규모 부대 지휘경험만 있던 백선엽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백선엽의 경우 회고록 "군과 나"에서 김홍일이 만들어준 6일의 시간 덕분에 한국군이 이겨낼 수 있었으며, 중국 국부군에서 전투 경험 덕분에 지연작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이 시점의 백선엽 장군은 지금으로 치면 중대장 할 나이인 만 30세의 젊은이고, 김홍일 장군은 국부군에서의 실전경험으로 잔뼈가 굵은 52세(오늘날에도 장성급 지휘관의 나이다)의 숙장이자 까마득한 선배 장군이라는 사실 역시 감안해야 한다.

사실 군사적 성과를 넘어 백선엽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80년대 후반 전쟁 회고록이 새로운 신문 기획연재물의 소재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12]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회고록을 출판하거나 좌담회, 인터뷰 등을 연 경우는 있었으나 신문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회고록을 연재한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 정일권의 회고록 기획 연재였고, 그 이후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이 백선엽의 군과 나 기획 연재였다. 만약 이 연재가 없었으면 백선엽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을 것이다. 백선엽의 부각은 군과 나 기획연재의 성공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가 바로 자서전의 유통량이다 백선엽의 경우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김홍일 자서전의 경우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한국전 참전 장성 중 김종오, 김홍일처럼 빛나는 전공으로 백선엽만큼 "스타성"있다고 할만한 장군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장군들은 김종오처럼 이른 나이에 요절하거나, 김홍일처럼 연배가 한참 위라 회고록 신문 연재가 본격화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결국 백선엽이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국군 장성이 된 데에는 본인의 전공, 미군의 지속적인 우대, 신문 기획연재의 상업적 성공 등 여러 요인을 들 수 있지만 경쟁자들 중 유일하게 99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홍일과 백선엽 모두 6.25 전쟁 당시 국군의 일원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현재는 백선엽이 다른 전쟁영웅[13]의 업적을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 국군 원로들이 반발하는 이유이고, 백선엽의 대항마로 김홍일을 부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단, 원로들의 이러한 반발 역시 마냥 객관적이라기보단 "일군 출신", "만군 출신", "국부군 출신", "평안도 파벌", "함경도(알래스카) 파벌", "영남 파벌" 등 건군 초부터 1950년대까지 군 내에서 벌어진 출신 및 지연에 따른 파벌 다툼과 이로 인한 개인적 은원이 깊게 엮여있다는 점 역시 기억해둬야 한다. 일례로, 국방일보에서 2010년대 초 진행한 "다시쓰는 6.25 전쟁"이라는 기획연재를 담당하던 국방일보 기자 겸 군사사 연구자는 당시 생존해 있던 참전 장성들이 연재의 전황이나 전공 서술보다 상대 파벌 사람들이 어떻게 묘사됐는지에 가장 신경썼다고 기억할 정도였다. 60년이 지나서 오늘내일 하는 사람들끼리도 이랬다니 정말 지독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셈인데, 1950년대 "평안도 파벌"의 최선임이던 백선엽이 이러한 갈등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리 없다.

“망할 놈에 영감태기가 날 보고 한강 남안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여야 된다고 아주 명령조로 이야기 하더라고.” 조금 전 총장 방을 찾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이 오랜 중국군 공군 전략경험을 진언한 것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장군은 무슨 놈에 장군, 허구헌날 후퇴만 하는 중국군 경력을 가지고.” 전시 위급한 상황에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일본군 경력자의 중국군 경력자를 과소평가하는 군 통수권 내부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방의 상황이 조금씩 보고가 이루어지자 채 장군의 푸념은 끝이 났다.

김계원 (개전당시 야전포병단장),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284~285쪽.))

이처럼 군 내에서 파벌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채병덕의 경우 인품이 뛰어나서 총참모장을 했던 인물인데 불구하고 이러한 파벌에 자유롭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채병덕이 김홍일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응준 덕분이었다.

이 두 사람은 6.25전쟁이라는 국난을 서로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백선엽의 자서전에서도 이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선엽이 소문을 듣고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에 찾아가니 김홍일 장군이 나를 보자 잘왔다고 반가워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과연 이러한 전공논쟁이 진정으로 두 전쟁영웅을 위한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러한 전공 논쟁은 무의미하기도 하다. 전쟁은 한 개인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선엽, 김홍일, 김종오 등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에서 활약한 지휘관 중 단 1명이라도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고 서로를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단 1명이라도 없었더라면 한국은 정말로 무너졌을 것이다. 단, 채병덕만은 예외다.[14]

한편 6.25 전쟁 4대 영웅 명단에 김홍일은 포함된 반면 백선엽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백선엽과의 비교에서 김홍일의 비교우위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일단 백선엽이 제외된 이유는 백선엽이 처음 명성을 얻은 다부동 전투가 낙동강 방어전의 일부여서 월튼 워커의 공로와 중복 되는 면이 있고, 당시 백선엽은 아직 생존한 상태여서 이미 고인이 된 4명과의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점을 반영한 결과였다. 일각에선 백선엽이 해당 명단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백선엽은 대단한 공로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휴전으로부터 불과 30년 후에 나온 선정이, 관련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된 이후의 것보다 절대적으로 신뢰성과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명단에 없더라도 6.25 전쟁에 지대한 기여를 한 다른 전쟁영웅들도 수없이 많은데,[15][16] 자칫 그들의 공로마저 폄하될 수도 있는 주장이다.

결정적으로 백선엽은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특설대 복무 및 친일 행적이라는 크나큰 과오가 존재한다. 6.25전쟁 때 그토록 훌륭한 성과를 올렸음에도 아직까지 공공연하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김홍일은 일생에 흠잡을 데가 없다.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또 다시 '명예원수' 같은 전 군과 국민의 존경의 대상을 정해야 한다면 참군인의 모범을 두고 친일 간도특설대 출신을 뽑아야 할까? 라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4. 저서[편집]


  • 국방개론(國防槪論) - 1949
6.25전쟁 직전에 출판한, 신생 대한민국 국군의 차기 국방 로드맵을 제시한 전략 연구서. 당시 신생 대한민국의 체급에는 걸맞지 않다고 판단되어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국방개론을 현대 한국 군사사상사의 시초로 보며 고평가하고 있다. 국방개론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대상으로 판매되었지만 민간에서도 구할 수 있었다.
  • 대륙의 분노(大陸의 憤怒): 노병의 회상기 - 1972
김홍일 본인의 행적에 대하여 진술한 회고록. 출판사는 문조사. 한국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고려인조선족 디아스포라사, 러시아 내전사, 중화민국사, 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사, 6.25 전쟁사 및 대한민국 현대 군사, 정치사를 연구할 때 모두 언급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다. 오래된 서적인데다 절판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현재는 국립 또는 대학도서관들 정도에서만 볼 수 있다. 그 외 간간히 고서점에 비치되어 있다.


5. 기타[편집]


  • 중국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출신인 김홍일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이응준[17]의 관계는 그들의 출신과는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나타난다. 김홍일과 이응준은 1976년 『세대』의 지면을 통해 광복군과 창군 시절을 회고하는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李 = 만주와 중국 출신 그리고 일본 출신 더러는 유해준, 이성가 씨와 같은 광복군도 대거 새로운 조국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다”
“金 = 그때의 보기 좋았던 광경은 출신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서로 추천하고 천거하는 모습”

이응준, 김홍일 「光復軍․創軍時節」(1970). 『세대』 제14권(통권 157호) 71쪽

  • 중국 망명 당시 김홍일 장군의 편지를 망명 3개월 만에 국내의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이응준 장군이었다고 한다.[18] 6.25 전쟁 당시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이던 이응준 장군이 한강을 도강하자 노량진에서 혈혈단신 병력을 수습하고 있던 김홍일 장군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은 수원의 육군본부로 가서 각각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수원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응준 장군이 김홍일 장군을 도와 채병덕 총참모장을 적극 설득하여 김홍일 장군이 시흥사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훈련이 없는 토요일에는 생도들에게 미국 서부영화를 보여주고는 했는데 "남자답게, 뒤에 서지 말고 항상 정정당당하며 정의롭고 용감해라"라고 훈화했다 한다. #[19]

  • 6.25 전쟁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1983년(휴전 30주년) 국방부 선정 4대 영웅에 포함되었다. 나머지 3인은 국군 대장 김종오, 미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대장 월튼 워커. #


  • 타계 40주기를 맞은 2020년 8월 전쟁기념관의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 육군 수도방위사령부도 부대 건물 중 하나에 김홍일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 조카인 김영재도 독립운동가이며 국민혁명군, 대한민국 공군에 복무했다. 홍커우 공원 의거 당시 윤봉길이 사용할 폭탄을 제조하는데 참여했으며, 국민혁명군 공군에서 기계사를 맡았고 장개석 총통의 전용기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후 6.25 전쟁 발발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후방요원들을 수원기지로 후송하는 역할을 하였고, 공군 정비창장을 역임했으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 김석원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게 보지는 않았다. 6.25 전쟁 초기 시흥사를 창설할 때만 하더라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지만 포항 전투 중 김홍일이 수도사단 사령부 막사를 지나다가 김석원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의 대화를 들었는데 일본군을 참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 자리에서 바로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1군 사령관에서 물러나고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옮겼다가 대만대사로 가면서 예편을 하게 되었다. 예비역 소장 전제현이 월남전 당시 국회의원 시찰단으로 나온 김홍일을 영접하면서 저번 달에 김석원이 다녀갔다고 하니 김홍일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김석원이.."라고 하며 해당 일화를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일본군 참전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는지 김홍일의 말에 따르면 "그 정신나간 사람(김석원, 신성모 중에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이렇게 지칭하였다.)이 이승만 박사께 건의하자 이 박사께서 일본군을 참전시켜도 좋으나 북한군과 전투 시 일본군부터 몰아내고 전투하시오.라고 하여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했다고 한다.

  •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들의 회고와 그의 어록 등을 정리한 블로그가 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4년 박경석 작가가 지은 소설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은 예편 때까지의 삶을 다뤘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김영기가 연기했다.

  • 2010년 KBS 특별기획 드라마 <전우>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박웅 장군이 등장했는데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

  • 2020년 6월 MBC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25 전쟁 70주년 특집 <서울, 서울, 서울> 편에서 6.25 전쟁에서의 방어 작전을 이끌고 일제강점기에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제조해준 그의 공로가 소개되었다.


  • 대체역사 소설이자, 해당 소설가의 축구 소재이기도 한 레전드 1957에서는 4.19 혁명 이후 대통령으로 올라 주인공이 만든 나비효과로 일어난 국가적 브랜드 가치를 채감했다.

  • 대통령 각하 만세라는 소설에서 일본군과의 포로교환을 담당하는 한국군 장교로 등장하며 일본과 포로교환은 단지 일시적일뿐 일본제국과 계속 싸울것을 암시한다.

  • The Road to 56에서 한국 광복군 장군으로 등장하여 한국군 장군으로 등장.


  •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는 그의 행적을 익히 알고 있던 주인공이 맥아더에게 추천하여 채병덕의 뒤를 잇는 총참모장이 된다. 이후 이강산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능력을 알게 되자 이강산을 적극 지지해준다.

7. 연보[편집]


1898년 9월 평북 용천 출생
1920년 1월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및 소위 임관
1921년 대한의용군사회, 한국의용군 참여
1926년 10월 중국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여 (동로군 인사참모 소교, 인사과장 중교)
1927년 3월 중국 국민혁명군 상교 진급
1927년 중국 국민혁명군 독립경비연대 부연대장 및 1대대장
1928년 중국 국민혁명군 22사단 독립경비연대장, 용담전투 승리공훈, (공로장 수여받음)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 상해 병공창 병기창주임, 19로군 후방 정보국장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도와 거사에 쓸 폭탄을 구해 주다.
1933년 중국군 제2로군 총지휘부 참모
1938년 중국군 제4군단 102사단 참모장, 무한회전 참가, 만가령 전투
1939년 5월 중국 중앙군 소장진급 (중앙군 최초 한국인 장성) [20], 중국군 19집단군 참모처장 부임
1941년 중국군 19집단군 19사단장 대리로 부임하여 중일전쟁 상고회전을 승리로 이끔 (대 일본군 33, 34사단)
1943년 중국군 육군대학 졸업
1944년 중국군 신편 2병단 참모장, 중국 청년군편련총감부 참모처 소장 처장
1945년 5월 중국 중앙군 중장 진급 [21]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사령부 참모장
1945년 11월 중국군으로 복귀,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및 한교사무처장 부임
1946년 9월 중화민국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 (육군 중장) [22]
1948년 7월 중화민국 국방부 중장 부원 [23]
1948년 대한민국에 귀국
1948년 12월 대한민국 육군 준장 임관 (창군 최초 장군임관자)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장
1949년 3월 육군 소장 진급(대한민국 육군 최초)
1950년 3월 13일 육군사관학교장
1950년 6월 10일 육군참모학교장
1950년 6월 30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한강 방어선 전투 지휘)
1950년 7월 5일 육군 제1군단장 임명
1950년 9월 1일 육군종합학교장
1951년 3월 2일 육군 중장 진급 [24] [25]
1951년 3월 20일 육군 중장 예편
1952년 주중대사 및 타이베이 외교단장
1961년 5월 외무부 장관
1961년 12월 제9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1967년 6월 대한민국 국회 제 7대 국회의원
1971년 5월 대한민국 국회 제 8대 국회의원, 신민당 총재
1973년 1월 민주통일당 창당발기인
1980년 8월 8일 지병으로 타계


8.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참의원)

[[무소속|
무소속
]]

104,478(12.84%)
낙선 (8위)[26]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1[A]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44,506 (43.8%)
당선 (1위)
초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4,969,050 (44.38%)
당선 (4번)
재선[27]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B]

파일:민주통일당.svg

28,447 (21.4%)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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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민당김홍일.jpg


파일:민통당김홍일.jpg

7대 총선 (서울 11[A])
9대 총선 (서울 1[B])







9. 관련 문서[편집]




10. 출처[편집]


  • 대륙의 분노, 김홍일, 문조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6.25전쟁사 3: 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김홍일의 생애와 독립운동, 김종문, 한국근현대사연구, 한국근현대사학회
  • 1920년대 전반기 김홍일의 항일무장투쟁, 윤상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러시아혁명기 원동해방전쟁과 한인부대의 활약, 윤상원, 한국근현대사연구 67, 한국근현대사학회
  • 중국군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한 김홍일, 한시준
  • 김홍일의 중국 국민혁명군 경험과 국방개론 저술, 김지훈, 군사 112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中日戰爭 初期 國民政府軍의 抗戰戰略과 戰術 再檢討(1937~1938), 기세찬, 군사 7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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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본관은 김해지만, 흔히 아는 가야 계열이 아닌 신라 계열이다.[3] 중화권은 준장이 없고 소장이 별 하나, 중장이 별 두 개이다.[4] 간혹 한국군에도 5성 장군, 원수가 있다는 풍문이 떠도는데, 아마 명예원수 추대론이 돌았던 백선엽 아니면 김홍일 장군을 두고 착각한 듯 하다.[5] 53년 1월 최초의 4성장군 백선엽 대장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육군 최고 계급은 중장이었다. 김홍일 장군이 중장에서 그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승만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도 대장으로 진급시키려 했지만, 손원일은 제대로 된 전투함도 없는 나라에서 해군 대장이 나온다면 전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고사하였다.[6] 최용덕, 손원일, 이준식, 장철부 등도 건국훈장과 태극무공훈장을 모두 받았다.[7] 1973년 3월 휴전선 전방에서 북한의 국지도발을 성공적으로 응징한 '완전 작전'의 주인공.[8] 6.25전쟁사(3) pp.226-227[9] 석영준 (2004). 작전한계점 고찰: 6.25 전쟁 전례분석을 중심으로. 군사연구(120), p.308[10] "사단장 이상의 대부대 지휘관은 독단적인 진행이 필요하거늘 이를 이해치 못하니 안타깝다." 김홍일 저서 대륙의 분노 출처[11] 백선엽 또한 자서전에서 "전후 김장군(김홍일)의 후퇴건의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고 봉일천 전선을 사수하려했던 사실은 다소의 논란을 일으켰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이를 간접 시인하고 있다.[12] 당시 신문의 위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넷플릭스 급이었다.[13] 김홍일, 김종오[14] 물론 채병덕이 치명적인 오판을 여럿 저지르긴 했지만, 그에게 개전 초 패전 책임을 모두 떠넘기는 건 너무 가혹한 면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문서 참조[15] 예를 들어 대한해협 해전 당시의 백두산함 수병들.[16] 김홍일과 함께 활동했던 광복군 출신 청년 장교들도 전쟁 중에 다수가 전사했다. 장철부, 이의명, 이건국, 차약도, 김영남, 박영진 등은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17] 이응준 장군은 독립운동가이자 안중근 의거를 후원한 이갑의 사위이기도 하다.[18] 김홍일의 오산학교 후배이자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참모를 맡았던 전제현 예비역 소장 증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 업단,「전제현 장군 3차 구술면담」2014.6.9.[19] 블로그 글에 따르면 2015년 한 군사학술단체 춘계 세미나에 참석한 육사 생도들의 상당수가 김홍일 장군을 모른다는 설문 답변이 나왔다. 6.25 전쟁사 관련 과목이 4학년에 나와서라는 이유. 김홍일이 독립운동가이자 전쟁 영웅인 점은 둘째치고 육사 교장을 역임했는데도 육사 생도들조차 잘 모른다는 것은 아쉬움이 큰 대목이 아닐 수 없다.[2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인사록(1949)에 따르면 1939년 5월 中國第19集團軍總司令部 參謀處 小將 處長 으로 되어 있다 [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096 [22] 2005년 중국에서 출간된 劉國銘 (编). 中國國民黨百年人物全書 (중국국민당백년인물전서)[2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인사록 (1949) [24] 당시 육군 최고 계급. 3군 총사령관 정일권과 김 장군이 중장. 3번째가 1952년의 백선엽, 이종찬. 최초의 대장은 1954년 백선엽 장군 [25] 국군 최초의 중장은 1951년 2월에 진급한 정일권 중장 [26] 참의원은 6위 까지 당선되었다.[A] 마포구[27] 72.10.17: 10월 유신으로 자격 정지[B] 종로구·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