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직 (문단 편집) == 기타 == * 수많은 [[시]]를 남긴 뛰어난 문인이었고 [[정몽주]]에게서부터 내려오는 도학의 계승자였다. 그의 [[스승]]이자 아버지인 강호 김숙자(1389~1456)는 야은 [[길재]]의 제자로 그는 길재의 손제자가 된다. 그는 [[김굉필]][* 김굉필은 스승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는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김일손]], [[정여창]], [[남효온]], [[남곤]], [[김전]], [[손중돈]] 등 많은 제자를 육성했다. 그런데 다만 제자 [[교육]]에서는 애매하다. 이들이 이후 사림의 기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오사화]]의 배경이 된 김일손의 [[야사(역사)|야사]] 드립치기나 남효온의 전기 [[소설]] <[[육신전]](六臣傳)> 등은 [[유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공자]]의 말, “나는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술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다.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음 깊이 은(殷)의 현인 팽(彭)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子曰 述而不作(술이부작) 信而好古(신이호고) 竊比於我老彭(절비어아노팽)에서 유래한 말이다. 없는 사실이나 불명확한 사실은 배제하고 사실 그대로만 기술한다는 뜻과도 통한다.]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후대에 사림이 집권하면서 스승이라고 높이지 않았으면 오히려 사림의 존재 자체를 없앨 뻔한 위기 상황을 초래한 원흉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른바 '[[영남]]학파'의 시초가 되는 인물이다. 당대에는 [[경상도]] 사당(선비당)이라고 불렸다. 초기 [[유학]]에서는 붕당, 당이라는 단어가 별로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지만[*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의 죄목 중 하나가 [[붕당]]을 이루었다는 이유고 성종 때도 [[임사홍(조선)|임사홍]]이 처벌받은 이유 중에도 붕당을 맺었다는 것이 있다. 조선 전기만 해도 붕당은 [[금기]]였던 것이다.] [[송나라]]대 이후 [[성리학]] 체제에서는 오히려 이익을 탐해 모인 소인당에 맞서 도학을 중심으로 군자당이 결집해야 한다는 논리로 전환되었고 성리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주자(철학자)|주자]]는 임금까지도 군자당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인군위당(引君爲黨)을 주장했다.[* [[인조]] 시기에 이런 주장이 경연에서 나온 바 있었는데 이 때 인조는 설령 군자의 당이라 해도 당이란 용어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아예 당이라는 소리는 듣기도 싫다고 일갈했을 정도인데[* 이 때 무려 주자를 실언했다고까지 말하였다! 주자를 비판하는건 조선 초기에나 볼수 있을법한 일인데 중기의 임금인 인조가 이런 것. 나중에는 좀 낮춰서 주자의 말이 지나쳤다 정도로 말햇지만. 그만큼 인조가 붕당을 싫어했다는거다. 물론 인조반정의 주역이 서인인 만큼 붕당에 대한 경계와는 별개로 인조시절은 서인집권기였다.] 인조 시절이 [[서인]] 중심이기는 했어도 인조 개인은 대북만 싸고 돌다가 [[권력]]이 너무 집중되어 문제가 생긴 [[광해군]] 때문인지 내내 붕당을 경계했다.] 사당이라고 불린 것 자체가 이미 훈구척신들과는 구별되는 사림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육성한 제자들은 [[훈구파]]와 갈등을 일으켜 몇 차례 [[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남곤이 기묘사화의 주범이라면서 까이고 있는 판이다.] 남곤은 스승과 같이 노골적으로 유자광을 조롱하거나 멸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자광이 [[노비]] 출신의 어머니를 둔 얼자 출신 주제에 고위직에 오른 것을 건방지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조선 초중기 사림파의 거두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그의 후학들인 사림파가 득세한 조선 중기부터도 평가가 좋지만은 않았다. [[이황]]은 말년에 '김종직의 평생 사업은 시화(詞華)'였다고 평가했다. 경전을 탐독하며 성리학의 도를 깊게 닦은게 아니라 문장을 아름답게 쓰는 것에만 평생을 바쳤다는 뜻이다. 성호 [[이익(실학자)|이익]]도 <[[성호사설]]>에서 '김종직은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다.'라고 김종직을 비판했다. 특히 [[허균]]은 그를 몹시도 싫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종직론》에서 '<조의제문>을 쓰고도 세조에게서 [[벼슬]]을 한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면서 김종직을 맹비난했다.[* 다만 허균도 당대나 후대나 유학자들에게는 [[이단아]]로 취급받은 인물이었는지라 역으로 "네놈이 뭔데 김종직을 까냐?" 라는 식으로 맹비난당했다.] 사실 결정적인 계기는 수제자 [[김굉필]]이 김종직이 문장에만 치중한다고 스승과 갈라선 것이었다.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전통]]이 정통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제자 김굉필, 정여창,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로 이어지면서 이들과는 달리 김종직은 조선 문묘배향 18현에서도 제외된다. [[송시열]]을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정몽주]]와 김굉필을 이어주는 중간다리 정도. 김굉필이 조선 성리학의 정통 주자로 인정받다보니 후대 유학자들은 김굉필이 스승과 결별한 것도 다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함이었다고 옹호해 주는 분위기이다. 그래도 현대에서는 사림의 계보표에서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림의 조상격인 신료로 확실히 인정해주는 인물이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가 길재의 제자였고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었기 때문. 사림파의 전신이 되는 인물들도 대다수 이상이 김종직의 제자였던 것도 있었다. 다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사림파의 거두라고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그의 행보는 유학의 원칙이나 선비의 덕목 중 하나인 '절의'에 충실했다고 보기도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이 있었기에 이후 조선의 후대 사림들조차도 비판을 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조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선비]]라는 조선시대 [[지식인]] 계층의 이중성과 [[위선]]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들기도 한다.[* 김종직은 세조에게 등용되어 그의 봉록을 받아먹으면서도 그의 집권을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남겼다. 문제는 전근대 왕정 [[국가]]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벼슬을 준 왕에게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중 하나는 왕에 대한 지지다. [[단종(조선)|단종]]에 대한 [[의리]]를 다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벼슬하지 말아야 했고 벼슬을 하고 싶었다면 <조의제문> 같은걸 남기지 말아야 했는데 벼슬이라는 실익과 신의도 지켰다는 [[명예]]를 같이 얻고 싶었는지 2가지를 동시에 하는 매우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벼슬을 했더라도 세조 때는 몰라도 성종 때라도 단종의 복위를 끈질기게 청했다면 이 정도로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김종직을 따르던 이들로 김종직의 이런 [[모순]]된 행위를 모르지도 않았을텐데 그저 충의지사로 떠받드는 모습은 이는 김종직 하나만이 아닌 당시 김종직과 가까운 선비들의 전반적인 모습이 이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의 위선과 모순이 김종직이라는 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노출된 것.] * 현재 김종직의 종택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의 [[선산 김씨]] 집성촌 내에 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73&docId=546786&categoryId=46673|점필재종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