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직 (문단 편집) == 생애 == 야은 [[길재]]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강호 김숙자(金叔滋)의 아들로, 살아있을 때에는 정계에서 그다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세조(조선)|세조]] 대에서 출사했으나 [[실무]]를 위해 잡학을 익히라는 세조의 권유를 "잡학은 유자(선비)의 일이 아닙니다."라는 [[논리]]로 비판하다가 파직당하기도 했고 <[[조의제문]]>으로 세조를 비판하기도 하는 점을 보면 애시당초 세조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의문인 점은 김종직은 성종 앞에서 대놓고 [[성삼문]]을 찬양한 적도 있는데 성삼문은 [[사육신]] 중 하나이며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따라서 김종직의 말은 성종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가 [[모욕]]당한 셈이다. 근데 정작 본인은 세조와 성종을 섬겼다.] 근본적으로 사림이 가지고 있는 폐해의 전례이자 원흉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지만 글을 잘 썼고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조선)|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좌천 당시 상관이었던 [[유자광]]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서얼]]이라는 이유로 유자광을 멸시했다.[* [[남이]]를 모함해 죽게 만든 [[간신]]이기 때문에 싫어했다는 설도 있다.] 이와 관련된 일화 역시 유명하다. [[함양군|함양]]에 [[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은 유자광이 쓴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떼어 불에 태워버리게 명했다고 한다. 비유를 들면 경상[[도지사]]가 내린 시문이나 그림을 태워버린 것이다.[* 다만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일화는 실록에는 있지만 전후 관계를 비추어 보면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일화다.] 전하는 말로는 김종직 자신보다 8살 어리고 출사 시기도 9년이나 늦었으면서도 서자 주제에 빠른 출세를 한 유자광을 김종직이 평소 고까워했기 때문이라는 것.[* 성학(聖學)으로 심신을 수양한다는 [[선비]]를 자처한 사람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곤란하다. 원래 [[사림파]]의 행태를 보면 [[내로남불]]이 심하기는 하다.] 또한 하루는 어느 모임에서 김종직의 [[제자]]들이 자신들보다 [[관직]]이 높고 [[나이]]도 많은 유자광을 대놓고 서출이라고 비웃는 등 알아서 화를 자초한 면이 있다. 다만 현판 사건은 진위 여부가 [[의심]]이 되는게 일단 이 부분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은 맞지만 <[[연산군일기]]>에 후일담처럼 짤막하게 쓰여진 내용이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시절은 성종 원년(1469년)부터 성종 6년(1475년)까지로 당시 김종직은 세조에게 개소리[* 위의 7학 이야기]하다가 개털되어 두각을 드러내기 이전이었다. 반대로 유자광은 한창 남이의 난을 [[고발]]한 공으로 잘나가던 [[전성기]] 시절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반인(수행원) [[박성간]]에게 모함을 당해 성종 원년에 [[의금부]]에 수감되는 일이 있었는데도 하루만에 [[정희왕후]]가 석방을 지시할 정도로 조정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정희왕후는 세조 시절에는 자신의 친족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말렸고 성종 시기에는 친족인 윤호가 죄를 저지르자 벌할 정도로 나름 공정했다. 그런 정희왕후가 이 정도의 모습을 보였다는건 유자광에게 죄가 없거나 아니면 중요한 인물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김종직이 유자광의 현판을 불태운다? 박성간은 모함 사건으로 본인은 [[능지처참]]에다 멸족까지 당할뻔 했다가 간신히 본인만 참형에 처해지는 것[* 의금부에서 박성간은 능지처참하고 일족도 죽일 것을 청했는데 성종이 박성간 본인만 참형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처결했다.]으로 끝났는데 현판 사건이 알려진다면 박성간 모함의 [[배후]]로 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김종직이 죽고 [[무오사화]]로 전방위 공격을 당할 때도 현판 사건을 논하는 사람은 1명도 없었다.[*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탄핵]]과 처벌을 주청하면서 [[신하]]들간의 갈등을 끄집어내면 속보이는 짓이 된다. 이미 대역죄 혐의가 걸린 자에게 괜히 그걸 꺼내서 사감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유자광이 안 드러낸다 해도 김종직의 개인 처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려는 사람들이 끄집어낼 수는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김종직 생전에는 유자광과 갈등이 없었고 오히려 유자광이 [[현석규]]를 탄핵한 것 때문에 사림파에게 탄핵되었다가[* 정작 사림파가 현석규를 적극적으로 탄핵했다. 그야말로 [[이중잣대]]가 따로 없다.] 복귀했을 때 이를 지지해준 사람 중 하나가 김종직이었으며 현판 사건도 근거없이 [[사관]]의 평으로 넣어둔 사건이다. 후일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은유와 화려한 문장 속에 숨겨진 뜻을 [[연산군]]의 명을 받은 유자광이 풀이하자 이에 진노한 연산군에 의해 김종직의 제자들이 모두 [[사형]]이나 [[유배]]를 갔고 이미 죽은 김종직 본인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