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완섭 (문단 편집) === 조선총독부 찬양 === 김완섭은 [[조선총독부]]의 총독정치가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덕분에 헐벗고 가난한 조선이 뒤늦게나마 발전을 했던 것이라고 하고 심지어는 조선 민족은 일본에게 감사를 해야한다는 망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덧붙여 조선이 해방되지 않고 총독정치를 통해 20년 즈음 더 지속되었다면 한국은 오늘날 일본의 은덕을 이어받아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조선이 해방되고 총독정치가 끝나게 되어서 매우 슬프다는 발언을 했다.[* 참고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 계열 학자들도 이런 개소리는 하지 않는다. 낙성대학파의 대표주자인 [[이영훈]]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모순된 체제로 이미 2차대전 이전에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했고, [[김낙년]]은 일제가 남긴 경제적 유산은 사실상 없으며 한국의 경제성장은 해방 이후 제로에서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해방 직후 '''남한에 식민지 자산이라고 할 것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한국전쟁 이후 오히려 소득이 소폭 올라간 것을 생각해봐도 이것이 틀린 말임이 명백하다.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 아직도 암암리에 행해지는, 전근대적인 풍습인 [[부락민]] 천대가 왜 한국에서 없어졌는지 생각해보라. 그만큼 식민지 기간동안 전국의 경제적 기반이 '''송두리째''' 뽑혀나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비록 냉전의 여파가 한국에 뻗쳤으며 신분차별을 없앨 정도로 [[한국전쟁|크나큰 전쟁]]에 국토가 다시 박살나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냉전의 폐해지 한국이 일본에게서 독립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김완섭은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조선총독부 공식조사에 따르면 '''1933년 조선의 문맹률은 77%'''였다. 이후에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아서 미군정의 조사에 따르면 1947년 남한의 문맹률은 78% 정도로 추정된다. 일제는 조선의 보통교육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문맹률 조사는 자기 이름 석자 쓸줄 알면 문맹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처참한 수치가 나올 정도인데 이게 근대화인가?? 게다가 김완섭의 희망과는 달리, 당시 실제 일본에서는 조선 지역 및 주민의 식민지 지위 유지가 비효율적이라 판단하여 아예 일본 영토로 만드는[* 그래서 포츠담 회담 당시에도 조선만큼은 유지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정식 병합을 추진 중이었고, 이에 따라 1946년 조선 지역 총선거가 계획되어 총독정치는 지속될 수 없었다. [* 이영훈이 지적한대로 식민통치 자체가 이미 한계에 봉착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