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수환 (문단 편집) ==== [[문민정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수환 추기경 길상사.jpg|width=100%]]}}} || || 길상사 창립 법회에서 법정스님과 함께 || 우여곡절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인권과 민주화에 관한 김수환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에서 김수환은 다시 인권의 현장에 선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일갈하였다. 한편 95년 12월 관훈토론에서는 국민들을 향해 '우리 모두의 추악한 얼굴'을 지적하며 엄하게 꾸짖는다. 요지는 한국인의 가치관 부재와 망국병이 부정부패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회창]] 당시 총리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5년 11월 이 총리의 회갑연에서 참석해 이회창 전 총리를 '청렴과 결백으로 모든 이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며,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바 있으며 그 당시 이미 전 총리였다. 1993년 12월 ~ 1994년 4월 총리 재임. 1996년 1월에는 총리 사임 후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던 중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를 받고 정치계 입문을 고민하던 이 전 총리에게 "나라가 어렵고 역사 바로세우기가 중요한 만큼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다"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로 이회창의 정치입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회창 역시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장면을 통해 가톨릭에 입교했다. 이회창의 부친이 자유당으로부터 탄압받을 뻔 한 걸 장면이 구해준 계기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김수환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며, 2002년 11월 이회창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김수환이 직접 장례미사를 집전해주기도 하였다. 1997년 1월에는 노동법, 안기부법 통과로 노동계 총파업이 일어나자 김영삼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 후에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1997년 10월 [[길상사]] 창립 법회에 [[법정(승려)|법정스님]]과의 인연으로 직접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법정도 1998년 2월 명동성당에서 강론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