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 김수환에 대한 내용은 김수환(동명이인) 문서
김수환(동명이인)번 문단을
김수환(동명이인)#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추기경
파일:attachment/cardinalstephenk_coatofarms.jpg
파일:attachment/jjsnicolas02.jpg
파일:external/aos.catholic.or.kr/cardinal-ysj_mj.png
김수환 스테파노
정진석 니콜라오
염수정 안드레아
PRO VOBIS ET PRO MULTIS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OMNIBUS OMNI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Amen. Veni, Domine Jesu!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김수환 추기경의 역임 직책 및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제1대 천주교 마산교구
제11대 천주교 서울대교구
추기경

김수환 스테파노
金壽煥 | Stephen Kim Sou-hwan


파일:attachment/김수환/01.jpg

출생
1922년 7월 2일(음력 윤 5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1]
(現 대구광역시 중구)
사망
2009년 2월 16일 18시 12분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 [[바티칸|

바티칸
display: none; display: 바티칸"
행정구
]]

본관
광산 김씨
재임기간
마산교구
1966년 5월 31일 ~ 1968년 5월 28일
서울대교구
1968년 5월 29일 ~ 1998년 6월 29일
추기경
1969년 4월 28일 ~ 2009년 2월 16일
(39년 305일)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본당 명의사제
학력
군위공립보통학교 (졸업)
동성상업학교 (졸업)
조치대학 (철학 / 중퇴)
성신대학 (신학 / 학사)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 석사)
장례미사
2009년 2월 20일
안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용인공원묘원
별명
인자한 콧님, 소금쟁이, 혜화동 할아버지
링크
주교회의 서울대교구
김수환 추기경 추모 사이트

PRO VOBIS ET PRO MULTIS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

1. 개요
2. 생애
2.1. 유년 및 학창시절
2.2. 학도병 징병과 광복, 그리고 주교 수품 전까지의 신부 시절
2.3. 대주교 승품과 추기경 서임
2.4.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2.5. 민주화 후
2.6. 사망과 그 후
3. 훈장 수여 목록
4. 어록
4.1. 박정희 정부
4.2. 전두환 정부
4.3. 노태우 정부
4.4. 문민정부
4.5. 국민의 정부
4.6. 참여정부
5. 여담
5.1. 친일파 논란과 실상
5.2. 정치적 참여에 대한 여러 평가
6. 대중매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김수환 추기경은 초대 마산교구장, 제11대 서울대교구장 겸 제8대 평양교구장 서리로 봉직했던 한국 가톨릭 성직자이다.

20세기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 역사를 대표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1969년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에 서임된 뒤 40년 동안 추기경직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 직후,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군부 독재 시절부터 21세기까지 꾸준하게 정치/사회적 현안에 목소리를 냈으며, 민주화 운동과 빈민 구제에 앞장서는 등 가톨릭 교회의 사회 참여 선봉에 섰다.

김수환 추기경이 은퇴 후 혜화동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주교관에 거주했기에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불렸다. 이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PC통신과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글을 남길 때 김 추기경이 실제로 사용한 닉네임이기도 했다.

2. 생애[편집]



1983년 12월 6일자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2.1. 유년 및 학창시절[편집]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5남 3녀 중 막내로,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 슬하에서 자랐다. 서중하 마르티나는 사제의 길을 걷게 된 두 아들 동한과 수환을 위해 정말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물심양면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교 방학 중에 아들들이 찾아오면 이웃집에 간곡히 부탁해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준비해 주던 터라, 두 형제가 너무 죄송스러워 식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한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가톨릭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에게 잡혀 순교했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와 함께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본래 이름은 '김수한'이였는데,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관청에서 관련서류를 떼던 중에 이름이 '김수환'으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신고 당시 담당직원의 기재 실수인 듯한데, "'김수환'이란 이름도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당시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고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세례를 받은 신자도 젊은 신자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이름으로 부르지만 중/노년층의 신자들은 여전히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향이 크며, 그 당시에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의미를 지금보다 훨씬 크게 부여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면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동성상업학교(現 동성중학교 & 동성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동성상업학교는 갑조와 을조로 나뉘어 있었는데, 갑조는 일반학급이고 을조는 사제가 되려는 소신학교였다. 소신학생 김수환은 사제의 길을 가는 데 고민이 많았지만, 당시 을조를 지도하던 프랑스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신부는 자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해서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했다. 이를 본 당시 교장이던 장면은 김수환을 불러 일본인 장학사 앞에서 노발대발 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어린 학생 김수환이 경찰에게 해코지라도 당할 지 몰라서 일부러 "교장이 직접 애를 이렇게 훈육했으니 넘어가 달라"는 액션을 취한 것이다. 즉 장면이 적절하게 쇼맨십을 발휘하여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2] 사실 장면은 평소 성품이 인자하여 주변 사람에게 한번도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 후 장면은 김수환이 일본 조치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그를 지원해 주었다. 또한 장면의 셋째 아들 장익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있다가 김수환 주교가 마산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이임해왔을 때 교구장 비서로 함께 일했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과 장면의 인연은 장익 주교를 통해 2대에 걸쳐 이어진 셈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장면 총리의 시복시성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


파일:external/img.sbs.co.kr/200320369.jpg

사제품을 받고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와 찍은 기념사진

조치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테오도어 게페르트 신부(1904~2002)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당시 김수환의 은사였던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광복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의 장례 미사를 주례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게페르트 신부님은 사제로서 훌륭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자상한 분이었으며,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늘 자애롭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했다.


2.2. 학도병 징병과 광복, 그리고 주교 수품 전까지의 신부 시절[편집]



파일:external/s1.postimg.org/image.jpg

1944년, 오른쪽에 군복을 입은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1988년 사망)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설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맞이해 무사히 귀국,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 육군 일등병으로 치치시마에서 복무했으며, 일본군의 대표적 전쟁범죄중 하나인 치치시마 사건에 미군 조종사 살해를 목격한 조선인 징용 노무자들과 함께 1946년 5 ~ 8월 괌에서 열린 전범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1951년 9월 15일 사제품을 받고, 안동 성당(현재의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주임 신부를 시작으로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사도 요한 주교 비서, 김천 성당(현재의 대구대교구 김천황금 성당) 주임신부, 성의중학교 및 성의고등학교 교장 등 주로 대구대목구에서 사목했다. 이 당시의 대구대목구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교구 사정이 매우 열악했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찢어지게 가난한 극빈층이라 사목활동이 보통 힘든게 아니었으며, 김수환 신부는 맨땅에 헤딩하는 자세로 임하며 최선을 다해 많은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56년 유럽의 선진 가톨릭 교리 및 학문을 배워와 한국 가톨릭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당시 대구대목구장 서정길 주교의 허락을 받아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열심히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까지 준비했지만 당시 독일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서 이래저래 활동하면서 공부 시간이 부족했던데다 담당 교수신부였던 요제프 회프너가 독일 뮌스터교구 주교로 성성되어 떠나게 되는 등의 일이 겹치면서 결국 1964년에 박사 학위 취득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정확히는 요제프 신부가 떠나고 다른 지도교수가 1년이 넘도록 배정되지 않은 데다 만약 지도교수가 교체되면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 회프너 주교는 훗날 독일 쾰른대교구 대주교로 승품되고, 1969년엔 제자 김수환과 함께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3]

1964년 6월에 서정길 대주교의 지명을 받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으로 취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해 일반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해설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6년 6월 15일, 사제 수품 15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천주교 마산교구를 신설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김수환 신부를 임명한다. 이에 따라 김수환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7년에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대한민국 대표 주교로 참석한다. 본래는 윤공희 주교가 참석해야 하는데, 노기남 대주교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서울대교구와 본래 맡고 있던 수원교구 업무를 다 보느라 도저히 시간을 쪼갤 형편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가장 젊은축에 속한 김수환 주교가 대리로 참석한 것이다. 이 회의에서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간 결혼인 혼종혼(混宗婚)에 대한 의제가 나오자 김수환 주교가 발언권을 얻어 이를 현대시대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며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큰 주목을 받았다. 대의원 회의에서 나오는 안건과 관련 내용에 대해 문서화 하는 작업이 그에게 주어질 만큼 그가 교황청 중요 인사들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김수환 주교에 의해 개정된 가톨릭 혼인성사 관련 교회법이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니, 현대 가톨릭사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4]


2.3. 대주교 승품과 추기경 서임[편집]



파일:external/img.ichannela.com/55509118.2-55509081.3.jpg


파일:external/dimg.donga.com/200907020500004_4.jpg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서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비레타를 받는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미사에서
순명서약을 받는 김수환 추기경

1968년 4월,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가 김수환 주교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며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이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어서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나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면 어떡할까'라고 고민하였지만, 착좌식 미사에 원로 신부를 필두로 한 서울대교구 사제단 전원이 아무런 이의없이 순명서약을 하는 것을 보자 그런 우려를 걷어내었다.

이러한 항의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은 매우 안 좋아서, 교구청으로 고리대금업자들이 나타나 돈을 갚으라고 을러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성모병원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을 다른 학교에 매각하니 마니 하는 말까지 떠돌았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일대기를 담은 책 <추기경 정진석>에서는, "매일같이 빚쟁이가 몰려와 수없이 구타당하고 발길질 받았다"고 했다. 1967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이 문제로 은퇴한다. 그 후 1년간 서울대교구장 자리가 공석일때 서울대교구장 서리로 봉직한 천주교 수원교구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을 개선시켰다. 서울대교구청의 교구장 집무실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던 수녀의 말에 따르면, 휴지통을 비울 때마다 코피를 틀어막은 휴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윤공희 주교의 노고에 대해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즈음 재정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이자 당시 나이 47세로 전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다. 김수환 대주교의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을 바티칸에서 인정했을 뿐더러 서울대교구장이 천주교 평양교구를 함께 관장하고 있다는 특수성이 더해져 서임되었다는 평이 많다. 외국에서는 지방 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임명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침묵의 교회가 북한에 있기 때문에 서울대교구장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 때문에 서울대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관례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훗날 추기경은 "보잘것 없던 나를 주교에서 대주교로, 다시 추기경으로 임명한 바오로 6세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다만 역대 최연소는 아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임명된 추기경 중에서는 서임 당시 나이가 가장 젊은 추기경이다. 현재 프란치스코 시기까지 서임 당시 나이 기준 김수환 추기경보다 어린 추기경은 없다.


2.4.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편집]



파일:김수환 추기경 시국미사.jpg

시국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


1987년, 6.10 항쟁 당시 명동성당을 빠져나오는 모습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갖고 한 일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고 회고했다. 1995년 서울대 강연에서는 보수적 성향의 천주교회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이유에 대해 "70년대의 언론탄압, 전태일 군의 분신자살과 유신 선포 긴급조치 발동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인권유린 앞에서 교회도 그냥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1970년 12월 23일에 김 추기경은 불교의 청담스님과 개신교의 한경직 목사, 그리고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과 함께 어수선한 시국을 논의했다. 이 당시에는 종교를 초월해서 군사정권에 대한 심각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일부 박정희 시대 옹호자들은 "저 세 사람이서 이야기한 것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청담스님은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자였다. 한경직 목사 역시도 당시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었으니, 이 세 사람이 거의 각 종교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군사정권 시절에 광주대교구윤공희 대주교, 원주교구지학순 주교, 인천교구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나길모) 주교, 안동교구두봉 주교, 전주교구김재덕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활동하였다.

또한 다른 성직자보다 높은 권위가 있는 추기경으로서 많은 방면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1971년 12월 25일 밤 KBS로 중계된 예수 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강론 중 김 추기경은 작심한 듯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발언을 TV로 보고 있던 박정희는 매우 격노했지만, 추기경은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 건드렸다가는 국제법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을 뿐더러 공교롭게도 이날 아침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이 터지면서 김 추기경에 대한 처벌은 흐지부지 되었다. 대신 미사 실황을 중계한 KBS의 아나운서와 PD, 제작진은 모조리 남산으로 끌려가 "왜 추기경의 발언을 그대로 중계했느냐?" 라며 호되게 추궁당하고 매까지 맞아야 했다. 그나마 KBS는 이건 위험하다 싶어서 바로 미사 중계를 끊었는데도 말이다.

김 추기경은 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정교분리 주장에 대해 "교회는 단지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 역할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추기경은 또 "종교계가 노동 문제에 개입한다"고 박 대통령이 불만을 표시하자 "사용주는 개개 노동자에 비해 원래부터 엄청난 강자인 데다 중앙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이고,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박 대통령을 설득했다.

1970 ~ 80년대 수많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명동성당은 종교시설이라는 특성상 경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이곳은 개신교의 향린교회나 불교의 조계사처럼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운동가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피신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명동성당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들어선 군부독재와 5공화국 체제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독재를 비판하는 날선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아래 어록에도 나오는 '카인의 대답'이 대표적. 결국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된 6월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 일갈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다만 말이 일갈이고, 이때 김 추기경의 말투는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라 같은 위협조가 아니라 '매주 주일에는 성당에서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같은 평범하고 당연한 사실을 알려주는 듯한 매우 일상적인 투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편지와 함께 "긴급구호를 위해 쓰라"며 당시 거액이었던 1,000만원 수표를 보내고,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그만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 사태를 막아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으나, 전두환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은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 회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을 찾아가 병력을 투입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전두환은 "미안하지만 지금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국방부에 가 봐야겠습니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고 김 추기경은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를 만나 "유혈 사태를 피해야 한다.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병력 투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면담 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김 추기경을 찾아와 "광주에 병력을 투입한다고 한 것은 경고일 뿐이고 사실은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김 추기경은 "이 장군을 믿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5월 27일 병력이 광주에 투입되어 유혈 진압이 있었다. 김 추기경은 1995년 서울대 강연에서 "5.18 기간이 가장 괴로웠던 때"라며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회고록에서는 "나도 사태 전면에 나서고 싶었다. 아니, 광주로 내려가 몸으로라도 계엄군을 막고 싶었다. 혼자서라도 강경한 항의성명을 내려고 쓰고 찢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신문방송에서 보도해 주지 않으면 유인물을 찍어서라도 항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젊은층 요구대로 내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면서 신군부를 연일 비판했더라면 유혈사태는 서울까지 번졌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광주 유혈진압 후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엄단을 요구하는 담화문을 냈고, 5.18 구속자 가족들이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명동성당을 점거하자 환대하며 추기경 집무실을 내줬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시 광주 방문을 적극 추진하여 교황이 직접 금남로와 전라남도청 등을 방문하게 된 사실이 밝혀졌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도 당국 관련자들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파렴치'하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등, 당시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여러 민주화 사건에 많은 신경을 쓰고 서울대교구를 총괄하는 업무가 너무 중하다 보니 이 즈음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젊은 후배 사제에게 교구장을 넘기는 게 교구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있던 터라 한국식 나이로 71세가 된 1992년 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서울대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보낸 답장이 걸작이다. "나는 김 추기경보다 2살이나 많은데 지금도 교황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후에도 계속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다가 임기를 약간 넘긴 1998년에야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에게 서울대교구장 자리를 넘길 수 있었다.


2.5. 민주화 후[편집]



2.5.1. 문민정부[편집]



길상사 창립 법회에서 법정스님과 함께

우여곡절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인권과 민주화에 관한 김수환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에서 김수환은 다시 인권의 현장에 선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일갈하였다. 한편 95년 12월 관훈토론에서는 국민들을 향해 '우리 모두의 추악한 얼굴'을 지적하며 엄하게 꾸짖는다. 요지는 한국인의 가치관 부재와 망국병이 부정부패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회창 당시 총리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5년 11월 이 총리의 회갑연에서 참석해 이회창 전 총리를 '청렴과 결백으로 모든 이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며,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바 있으며 그 당시 이미 전 총리였다. 1993년 12월 ~ 1994년 4월 총리 재임. 1996년 1월에는 총리 사임 후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던 중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를 받고 정치계 입문을 고민하던 이 전 총리에게 "나라가 어렵고 역사 바로세우기가 중요한 만큼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다"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로 이회창의 정치입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회창 역시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장면을 통해 가톨릭에 입교했다. 이회창의 부친이 자유당으로부터 탄압받을 뻔 한 걸 장면이 구해준 계기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김수환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며, 2002년 11월 이회창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김수환이 직접 장례미사를 집전해주기도 하였다.

1997년 1월에는 노동법, 안기부법 통과로 노동계 총파업이 일어나자 김영삼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 후에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1997년 10월 길상사 창립 법회에 법정스님과의 인연으로 직접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법정도 1998년 2월 명동성당에서 강론을 했다.


2.5.2. 국민의 정부[편집]



1998년 6월 22일, 서울대교구장 은퇴 미사 후 기념사진


2002년, 혜화동 성당에서 성탄 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김 추기경의 활동이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수와 진보 양대 세력의 거두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1997년 12월 15대 대선이 끝난지 4개월 뒤, 봉두완 전 의원의 설득으로 1998년 2월 14일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축하하러 당선자 축하 미사에 나왔다. 김 당선자는 놀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고, 김 추기경도 큰 찬사를 보냈다. 그도 그럴게, 내키지 않았던 이회창 후보가 설득 된 것이 김수환 추기경의 전화였다고(...)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화합의 장면이 연출 된 것.

한편으로는 대북화해 움직임에 발맞춰 남북화해를 위한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많은 강연을 하였다. 그러던 1998년 6월 22일, 공식적으로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 직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위 문단에 서술된 것처럼 본래 1992년에 사임하려고 했으나 요한 바오로 2세의 권유로 6년 더 맡은 것이었고,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지는 고령이었기에 더 이상의 직무 수행에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정진석 추기경이 새로운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했다.

교구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왕성하게 사목활동을 했으며, 이 시기에는 김 추기경이 정치적 발언 같은 건 거의 하지 않고 온전히 사목활동만 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 PC통신과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혜화동 할아버지' 라는 닉네임으로 계정을 만들어 직접 글을 남기거나, 신자들의 편지에 답장을 해주었다. 김 추기경은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타자를 치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도움 없이도 글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인터넷을 능숙하게 썼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들어 김 추기경의 건강이 조금씩 나빠지면서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중단하게 된다.


2.5.3. 참여정부[편집]



파일:김수환 추기경 - 2005.10.21.jpg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2006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의 예방을 받으며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불안하고 과도하게 좌경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 야권 진영으로 돌아서서 정부를 적극 비판했다. 문민정부 이후로 가장 많은 정치적 발언을 했던 시기가 바로 노무현 정부 시기였다. 선명한 반공보수 성향을 보이며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비판하지 않았던 햇볕정책도 강력히 비판했고,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국가보안법 폐지, 수도 이전, 사학법 개정 등에 반대를 하며 당시 여당 지지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노기남 등 천주교계 친일을 옹호하면서 "나도 창씨개명하고 신사참배했다"고 말해 일부 여당 지지자들에게 친일경력이 있니 없니 하는 비난과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래저래 참여정부와는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된 어록 참조.

2004년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의 사망에 따라 가톨릭 전체 추기경 중 최선임자가 되었고, 2005년 치러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즉위미사를 최선임 추기경으로서 공동집전하고 전체 사제를 대표하여 신임 교황에게 순명서약을 바치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베네딕토 16세는 김수환 추기경보다 추기경 선임날짜가 8년 2개월 늦다. 김 추기경이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다.35년 전 최연소 추기경에서 최선임 추기경이 된 것이다. 참고로 김 추기경은 2000년 80세가 되며 콘클라베 선출권을 상실했다.

2005년 터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당시엔 사태를 언급하며 가슴 아파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황 교수 논문에 국한시켜 생각하지 말자.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자. 그것이 바로 치유책이고 수습책."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외엔 일반적인 사목활동을 했으나, 2000년대 중반 들어 건강이 악화되면서 예전만큼의 활동량은 보여주지 못했다.


2006년 2월 22일, 정진석 추기경과 축하를 나누는 모습

2006년 2월 22일,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가 한국의 2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김 추기경은 콘클라베 선출권을 상실한 2002년 로마 교황청에 새 추기경을 서임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2004년 추기경 서임까지 무산되자 개인적으로 크게 상심해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6년, 베네딕토 16세 서임 후 정진석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되자 매우 기뻐했다고.


2.6. 사망과 그 후[편집]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2008년 6월 11일, 혜화동 주교관에서

2008년부터는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사목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2008년 9월부터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는데 중간중간 호흡곤란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2008년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는 직접 집전하지 못했고 휠체어에 탄 체 병원에서 미사를 봤다. 그러던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경,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과 병으로 사망한다. 사인은 폐렴에 의한 호흡부전. 사망 당시 최장기간 재임 추기경이었다. 향년 86세. "그동안 많이 사랑 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 추기경은 2년 전부터 건강문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왔으며, 지난해 9월부터는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면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김 추기경은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며, 이미 사후 각막 기증을 서약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망 직후 안구 적출 수술이 진행되었고, 김 추기경의 시신은 명동성당 유리관에 안치되었다.

장례는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록 자신이 참석하지는 않지만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으로 격상해서 치렀다. 교황장이란 교황 또는 교황이 임명한 특사가 직접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장례를 말하며, 미사 주례자는 교황의 자격으로 미사를 집전한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뤄졌으며,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조문 기간 동안 약 40만 명의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줄서서 조문하였다. 당시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명동성당까지 줄지어 선 조문객 행렬의 총 길이는 300m였다고 한다.[5] 이때 단 한 번도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도 조문을 위하여 명동성당을 방문하였으나 뒷짐 조문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시의 사제 묘역에 안치되었다. 위치는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옆. 묘비에는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직접 묘비명으로 부탁한 구절이다.

사망 때 각막을 기증해서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을 이식했고, 그 영향으로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들이 폭증했었다. 특히 사망 후 1주일 간은 각막 기증자가 너무 많아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서점가에는 김 추기경과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김 추기경의 자서전을 포함해 이미 절판된 책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재판되었다. 이러한 열기는 사망 1주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는데, 이 와중에 한 출판업자가 무단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이름을 빌려 김 추기경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김 추기경이 안장된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현재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하여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김옥균 바오로 주교가 안장되어있다. 2021년 4월 27일 죽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도 바로 옆에 안장되었다.

죽은 후 남긴 재산은 통장 잔고 300만원이 전부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부의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혹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비상금으로 모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돈은 비서신부와 비서수녀가 생전의 김 추기경이 가입한 자선단체들에 전부 기부했다. 그리고 유품으로 사제복, 십자가, 묵주, 성경, 안경, 미사에서 사용했던 낡은 성작 & 성반 등을 남겼는데 현재 이것들은 서울 가톨릭대학 박물관에서 보존중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 및 장례 미사에 관한 영상 및 관련 기록은 국가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국가기록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2022년 6월 5일에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가 명동 대성당에서 봉헌되었으며, 한국 가톨릭 교회 차원에서 시복시성을 추진중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기사


3. 훈장 수여 목록[편집]


  • 1970년 8월 16일: 국민훈장 무궁화장. 관련기사.
  • 2001년 1월 29일: 독일 대십자공로훈장. 관련기사.
  • 2002년 10월 26일: 칠레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십자훈장. 관련기사.

4. 어록[편집]


박정희 정부~전두환 정부 시절 민주화 인사와 시민들을 보호하며 남긴 명언들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있다. 가톨릭 내에서도 상당히 정의 의식이 강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인물이어서, 당시 민주주의 세력이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쟁취된 후에도 지속되어 다양한 사회 비판적 목소리를 내었다.


4.1. 박정희 정부[편집]


박정희 당신은 압니까? 정의와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사회 안정과 질서는 없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1971년의 예수 성탄 대축일 메시지.

유신의 징조가 보이던 시절이다. 박정희는 청와대 관저에서 KBS를 통해 중계되던 이 미사를 보고 있었는데 김수환의 언급에 격분한 나머지 득달같이 KBS로 전화를 걸어 미사 중계방송 중지를 즉각 하달한다.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입니다.

장준하의 영결 미사.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 이 죄 많은 박정희를 용서해주십시오.

박정희의 장례 미사.


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 속에서 씻어 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박정희의 추모 미사.

다만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의 사이가 험악할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김 추기경을 필두로 천주교 전체가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했기에 박정희로선 천주교가 상당한 눈엣가시로 보였겠지만, 정작 박정희와 천주교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전쟁통이었던 탓에 결혼식장이 마땅치 않았다는 배경도 있지만 일단 본인과 육영수가 결혼한 곳도 대구 계산성당이고 딸 박근혜를 천주교 계열 미션스쿨(성심여중-성심여고-서강대)에 내리 보냈다는 것이 그 증거. 심지어 박근혜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에는 육영수를 직접 영세식이 열린 용산 원효로성당에 보내기도 했다. 훗날 김수환이 회고록에서 "종이에 4대강을 그려가면서 몇십 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 계획을 설명해주는 박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 독재 체제로 갈 것임을 예상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 (중략)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장기 집권의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진정한 애국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또한 박정희가 죽은 뒤 명동성당에서 고 박정희 추도 미사를 봉헌했다.[6]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도 "국모다운 면이 많은 훌륭한 영부인이었으며,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박정희의 통치가 한결 누그러졌을 것"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박정희가 육영수의 사망 후 사람이 바뀌어 폭주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어쨌든 김 추기경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이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와 국민은 물론 박정희 개인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했다.

4.2. 전두환 정부[편집]


마치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쿠데타 직후인 1980년 초에 인사차 찾아온 전두환에게 한 말.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에 의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진압이 도에 넘침으로써 군경을 포함하여 학생과 시민 등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데 대해 정부는 깊이 사과하고 그 같은 엄청난 유혈 사태를 일으킨 책임자를 정부는 엄단해야 합니다.

1980년 봄 시국에 관한 담화문.


광주사태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민중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기 바란다. 이 길만이 우리 겨레로 하여금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부측이 지금이라도 사죄하는 마음으로 민주화를 향한 모든 조치를 다한다면 현재의 정치적 불안이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5.18 민주화운동 7주년(1987년 5월 18일) 추모미사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중략) 제1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추모 미사. 실제 육성.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6.10 민주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을 성당에 투입하겠다고 협박하던 정부 관계자에게 한 말.

독재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을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도 엮은 신의 한 수였다. 가톨릭의 추기경은 바티칸 시국의 시민이기도 하므로, 어지간한 막장국가가 아니고서야 고위사제인 추기경을 체포한다는 것은 세계적인, 특히 서양권의 비난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꽤나 큰 모험이었다. 즉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자신의 바티칸 시민권을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좋은 목적으로 잘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만 보면 비장한 분위기일 듯 싶지만, 김수환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주일에 성당에 나오시면 늘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담담한 어조였다고 한다.

두 분이 모두 양식있는 정치인들인 만큼 반드시 단일화를 이루어 낼 것으로 확신한다.

1987년 대선 당시.



4.3. 노태우 정부[편집]


이제 광주 문제는 여야가 모두 힘을 합쳐 잘못된 것의 진실을 밝히고 그때의 책임자들은 떳떳이 책임을 져야지요. 그들이 국민의 심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의 인간적 구원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나라의 구원에도 기여하는 것입니다. (중략) 문제는 정부와 여당의 근본적 자세입니다. 5공 청산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중략) 그 분 역시 군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틀이 있어서 그 틀을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을 갖는 것은 그가 아직 이야기를 듣는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988년 12월 동아일보 송년 인터뷰.

김 추기경은 민주선거로 당선된 노태우에 대해서는 적대하기보다는 설득하려 했다. 당선자 시절 찾아온 노태우에게 양심수 석방, 사면과 5.18 해결을 위한 광주 방문을 요청하기도 했다.

평화방송은 복음 선교를 위한 종교방송으로, 현 경영진은 이 목적과 방법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중략) 불법파업 사원들 중 잘못을 인정하고 함께 일하려는 사람은 선처하겠다.

1991년 2월 20일, 평화방송 파업 사태 당시에 낸 성명서 중에서.



4.4. 문민정부[편집]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 직후 찾아오셨을 때 나는 축하인사를 하면서 "그러나 나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김대중 씨를 찍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지역감정 문제가 크게 완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93년 한국일보 인터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1995년한국통신노조 파업사건 당시

바로 윗칸에서 언급한 6월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조차 하지 못한 명동성당의 공권력 투입이라는 무지막지한 일을, 김영삼이 성당 안에서 보호 중인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제 연행하자 남긴 말. 실제로 문민정부는 초기의 금융실명제하나회 숙청 같은 개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것과는 반대로, 중반부터는 서서히 이런 실책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크게 깎아먹었다. 그리고 임기 마지막해인 1997년에는 노동법 파동, 한보-김현철 사태, 그리고 IMF 외환위기로 완전히 파멸했다.

모든 국민에게 이 나라에도 정의와 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정권 수사 당시



4.5. 국민의 정부[편집]


김 대통령께서 그동안 수고도 많이 했고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판도 많아 괴로운 시간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아무쪼록 마지막 한해는 사심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꼭 유종의 미를 거두셔서 임기 후에는 5년 동안의 잘못된 것도 덮어둘 만큼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중략) 어쨌거나 김 대통령이 이제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초연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2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김대중 정부를 평가하며.


우리 같은 세대들은 노무현 후보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2002년 대선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를 비판하며.


여중생 치사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촛불시위가 지금도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죽었으나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시민들의 분노는 당연할 것입니다. 미국인도 자신들이 늘 자부하듯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은 자국민들만의 것이 아니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실천할 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이것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할 때 우리 민족과 같은 인권 존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리나라에 와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위해 성탄미사를 드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해서 가슴이 아팠어요. 고용주가 이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기 때문이지요.

2002년 송년인터뷰


4.6. 참여정부[편집]


선장인 대통령께서 이를 잘 헤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취임 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으나 100일 정도 지나면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언제쯤 좀 나아질지 의문입니다. 노 대통령은 말 바꾸기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신문도 읽어야 합니다.

2003년 6월 동아일보 인터뷰.


햇볕정책으로 남북한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우리 모두 이 시점에서 심각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자세와 체제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북한은 이를 계기로 민족공조를 앞세우며, 남한에 친북, 반북의 분열, 즉 '남남'분열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입니다. 세계화는 우리 시대의 불가항력적 물결입니다. 우리는 이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를 거스른다는 것은 다시금 우리 자신이 나라를 조선조 말에 쇄국주의에 빠뜨렸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쇄국적 의미의 민족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북핵문제를 두고 이른바 민족공조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데도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소수라고 믿으나 배타적 민족주의에서인지, 일부 젊은이들이 극단적으로 반미, 친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저의 마음을 아주 어둡게 만듭니다. 특히 몇 일전 한총련 일부 학생들이 미군 사격훈련장 기습 진입한 것은 크게 잘못한 일입니다. 정부도 이들에게 유화책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분명한 선을 그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2003년 8월 인터뷰.


나는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솔직히 우리나라가 어디로 갈 건지 걱정된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관권 선거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설령 열린우리당이 표를 많이 얻지 못하더라도 공명 선거를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행정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는 의심을 받는다면 (선거 후에도) 갈등이 계속 남을 것이다. 요즘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생각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 친북 쪽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 군 장성에게서 사병들 가운데도 반미 친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계층이 현 정부를 적극 지지하고는 있지만 나라를 이렇게만 끌어가면 미래가 어떻게 되겠느냐. 화해, 협력에는 동의하지만 (북한이) 국민을 굶겨죽이는데도 저들에게 끌려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예방을 받고.


남북간 교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우리 사회에 퍼진 친북반미 풍조는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북한 주체사상을 확대 전파하는 등 국가안보를 대단히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보안법 폐지를 서두르지 말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보안법은 장기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아직은 필요하다.

2004년 9월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며.


우리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너무나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는 북한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겠지만 현재 북한은 체제가 더 경화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요구할 것은 더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2004년 9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며.


노무현 정권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하나? 현재 정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2005년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대북유화정책과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를 비판하며

200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당시 이해찬 총리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신 것 같은데, 우리 정부와 노 대통령이 마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지적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죽음을 당하는 북한의 인권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던 정권 담당자들이 강 교수의 인권만 앞장서 보호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지극히 혼란스럽다.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진 사람을 원수로 보고 현행법에 저촉되는 말을 한 사람을 검찰이 다스리려 해도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나서 검찰을 견제하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까닭을 납득하기 어렵다.

2005년 강정구 교수 불구속을 비판하며


개정 사학법이 단순히 사학비리를 없애는 데 있다기보다,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며


국민들이 믿을 곳은 한나라당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잘 해 달라. (한나라당에) 대통령 후보 여러 명 있으니 걱정된다. 누가 되느냐가 아니라 정권교체가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6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만나

그 후에도 "소수의 비리를 다수의 문제로 비화시켜선 안 된다",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같은 사학법 개정에 강력 반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하였다. 참여정부 당시 사학법 개정은 소위 4대 개혁 입법(과거사 청산, 언론 개혁, 국보법 폐지, 사학법 개정)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인 반대를 받았던 사안이었다. 국가보안법이나 과거사법의 경우 정치계 중심의 반대였고, 언론법의 경우 몇몇 거대 보수언론의 반대가 주를 이뤘지만, 사학법 개정은 이권이 걸린 문제라 전국의 거의 모든 사립학교재단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가톨릭뿐 아니라, 당시 사립학교법에 관해서는 종법사가 직접 밀어준 원불교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종교의 주류 교단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 반대 측은 "전교조 등 좌파 세력들이 사학을 점거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찬성 측은 "이권 때문에 반대하면서 허울 좋은 명분을 찾는 사학 단체 관련자들은 위선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5. 여담[편집]


  • 친형인 김동한(金東漢, 1919년 6월 25일 ~ 1983년 9월 28일) 가롤로도 신부이다. 1951년 대한민국 해군에 자원입대해 대위로 임관해 한국 해군 1호 군종 신부가 된 분으로,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1970년 19년간의 군종 신부 복무를 마치고 해군 중령으로 예편했으며, 1978년 '한국 가톨릭 결핵 시설 연합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으로서 활동하며 결핵 환자를 돕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러다 결핵에 감염되어 건강이 크게 상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김수환 추기경이 좋은 병원으로 모시겠다고 권해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제대로 된 치료시기를 놓쳐 사망 몇 주전엔 심각한 합병증으로 몸의 곳곳이 괴사해 의사가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소견을 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983년에 사망했다.
동생과의 형재애가 매우 끈끈했다고 하며, 훗날 막내 동생 김수환이 주교가 된 후부터 남들에게 잘못 비춰질 걸 우려해 사적인 만남을 갖는 걸 피할만큼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했다고 한다. 또한 동생이 성직자로의 품계가 더 위에 있기 때문에 사적인 자리에서도 깍듯이 존대했다고 한다. 김동한 신부가 선종할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중이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비서인 장익 신부를 통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겉으론 표현을 안했지만 속으로 매우 슬퍼했다고 하며, 귀국 후 형이 머물었던 사제관에서 며칠을 보내며 추모했다고 한다.

  • 현재 군위군 군위읍 군위금성로 270(舊 용대리 424)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이 조성되어있다. 특히 공원 내에 초가집이 1채 있는데 김 추기경의 생가를 복원한 것이다.

  • 프로필에 있는 것처럼 광산 김씨이다.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37세손이다.
    파일:김동한 김수환 형제 족보.png

  • 테니스와 축구를 좋아해, 80대가 되어서도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밤을 새워 보고 축구 한일전도 빠짐없이 봤다고 한다.

  • 군종 신부에서 재입대 제도를 시행하게 된 이유도 김수환 추기경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1984년까지 군종 신부로 입대할 수 있는 사관후보생 제도가 있었지만, 폐지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병역의 의무에서, 신학생들이 사관후보생과 같은 특별한 제도로 입대할 수 있는 특혜가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김수환 추기경 사망 후, 천주교에서 매주 발행하는 주보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를 나열할 때 처음 언급된 내용이다. 평생 순명과 희생의 길을 걷기로 한 신부에게 군종사관 대체복무는 사치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지금까지 금지되고 있다. 그래서, 천주교 군종교구의 군종 신부들은 반드시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신부들만 재입대로 지원할 수 있다. 대부분은 군복무 기간이 짧은 육군 징집병으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만 육군 모집병, 해군/해병대/공군 병으로 복무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는다.(현역병으로 복무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신체적 사유로 군 면제를 받은 신학생들은 해당 기간 동안 봉사활동으로 대신하게 된다.

  • 다른 종교인도 천주교 신자와 동등하게 존중해주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고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다. 2000년 성균관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심산상은 20세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을 기념하는 상. 관례에 따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자리에서 주저없이 절을 하고 음복을 하기도 했다. 추기경은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2000.05.24. MBC 기사.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도 병인박해 때 순교하는 등 천주교가 조선 시절의 혹독한 박해를 받아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교와는 역사상으로 악연이고 천주교가 피해자임을 고려할 때, 당시 그의 김창숙 묘소 참배는 일종의 종교 간 화해로 해석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종교라 여기고 지키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오버랩되는 일화다.

  • 딱히 권위 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한 예로 모 대학교 동아리에서 운동회를 하려고 강당을 빌릴 필요가 생겼는데, 때문에 동아리 내의 가톨릭에 대해 무지한 한 학생이 성당에 강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성당에 가서 무작정 추기경실로 들어가서 강당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은 당당한 게 좋다며 즉각 승낙했고, 후에 그 학생은 추기경이 얼마나 높은 직책인지 깨닫고 놀랐다고 한다. 그 외에 성매매 업소 여인들을 돕고자 만들어진 시설에 찾아가 그녀들을 위로하고 같이 막걸리도 마시고 윷놀이도 하며 많은 도움을 준 사실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당시엔 성매매 업소 여인들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서 근처에만 와도 대놓고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1996년 월드 투어를 위해 한국을 찾은 마이클 잭슨과 짧은 만남을 가졌다. 마이클 잭슨이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추기경을 알현하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국내 일부 언론들이 까대곤 했는데, 김 추기경이 훗날 언급하길 눈이 심하게 충혈돼서 선글라스를 벗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은 잭슨에게 한/영으로 된 성경책을 선물했고 잭슨은 이를 자신의 전용 박물관에 전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 추기경은 후에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며 마이클 잭슨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 어떤 여대생이 한국의 유명인사에 관련된 인터뷰 과제의 상대로 김 추기경을 만나뵙기 위해 찾아갔다가 한 사제에 의해 문전박대당하자 화가 나서 한소리 해 주었는데, 당황한 그 사제는 김 추기경한테 돌아와서 얘기했다가 되려 혼만 나 버렸고, 김 추기경이 직접 그 여학생을 만나서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한 다음 인터뷰 요청을 수락해주었다고 한다. 후에 그 여학생의 과제는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문전박대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여학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 박정희 정권 시절 반정부적인 성향을 보이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불만을 품은 친정부 성향의 가톨릭 신자 몇 사람이, 바티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어떤 사람을 만나, "김 추기경을 서울대교구장 자리에서 내쫓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은 바티칸의 관리에게 김수환 추기경에 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였지만, 바티칸의 관리는 오히려 당시 주한교황대사였던 도세나 대주교를 통해서 김 추기경을 음해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7]


파일:김수환 추기경 - 열린음악회.jpg

1995년 9월 14일, 열린음악회에 출연한 김수환 추기경. 오른쪽은 당시 열린음악회를 진행했던 장은영 아나운서.

  • 종교적 측면뿐 아니라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인재였다.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고 영어, 일본어 역시 수준급이라고 하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업적과 성취도 상당한 수준이다. 독일어는 신학교 우수 성적자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어느 정도 배웠고, 나중에 독일로 박사과정을 위해 유학을 갔을 때 논문을 쓰기 위하여 마스터 했다고 한다. 영어는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풀려났을 때 만난 외국인 사제를 통하여 기초를 배우고, 나중에 괌에서 전범재판 증언하러 들렀을 때 틈틈이 공부했다. 이러한 재능은 그가 바오로 6세 시절 최연소 추기경 서임 기록을 세우는 밑바탕이 되었다.

  • 독일 유학 시절엔 공부하랴 강의 들으랴 논문 쓰랴 바쁜 와중에도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어려움(주로 언어문제, 송금문제, 기타 잡다 등)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을 위해 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같이 처리해 주었다. 한국에 돌아갈 때가 되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슬퍼하면서도 그를 잘 전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김 추기경은 사회 바깥의 어려운 이웃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는다고 한다.


  • 2004년에는 사제급 추기경 수석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 미사 때는 물론이거니와 요제프 라칭어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교황의 좌우에 배석하는 2명씩의 추기경 중 한 사람으로서 즉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 영상. 2:24:10부터 김 추기경이 나온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추기경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원로 성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즉위미사가 거행된 2005년에 사제급 추기경들 가운데서 서임 날짜가 가장 빨랐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재위 기간 중 여섯 차례에 걸쳐 추기경을 서임했는데, 그 중 두 번째였던 1967년 카롤 보이티와가 서임되었고 세 번째였던 1969년 김수환이 서임되었으며 4번째인 1973년 알비노 루치아니가, 마지막이자 6번째인 1977년 요제프 라칭어가 서임되었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와는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요제프 라칭거 신부가 뮌스터 대학에 교수로 발령을 받아 교회 쇄신에 관한 강의를 개설해 후배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학생으로서 그의 강의를 수강함과 동시에 따로 만나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바티칸을 국빈 방문했을때 베네딕토 16세가 김 추기경의 안부를 물으며 "뮌스터 대학 시절 그가 독일어를 매우 잘해서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라고 인증했다고 한다.

  • 정치인 김종인과는 직접적인 인연은 없으나,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후에 김수환 학생신부가 귀국하면서 자전거 남기고 간터라 이를 물려받아서 탔다고 하는데, 사람이 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낡은 자전거였지만, 수리해가며 졸업 때까지 탔다고. 김종인의 회고록에 나온 언급에 따르면 당시 교민들과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평판이 좋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 2016년 발매된 공식전기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온 후, 어느 여성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이성으로부터의 고백이라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 선배 신부에게 고백 및 조언을 받곤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녀는 김수환에게 거절받은 후 군에 들어갔다고.

  • 상당히 흡연을 즐겨하는 골초였다. 1983년 12월 6일 방송된 '11시에 만납시다' 프로그램에서 음주는 잘 못하지만 담배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 신학교 시절 초기까진 진지하게 신부가 될 마음이 없었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5~6학년 과정) 5학년 성적이 매우 낮아 유급을 당한 적이 있다. 김수환은 사제가 되기보다는 자기 이름이 걸린 개인상회를 만들고 가정을 꾸려 형제를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에게도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하려고 했으나 정작 어머니 앞에서 그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당시 어머니께 했던 말은 "30살이 되면 어머니께 약초를 사서 달여드리겠다"는 약속이었다. 김수환은 학교 선생님에게 "저는 신부가 되기보다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이 사실을 어머니가 아시면 큰일난다"면서 크게 꾸짖었다. 이렇듯,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마음과 신학교 선생님들과 여러 친구들에게 여러 조언을 들으면서 꾹 참았다.

  • 사망 1년 전인 2008년 1월에 서울대교구로부터 토지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다만, 이건 실제 법적 다툼이 아니고 법원 판결이 있어야 토지 소유권 이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김 추기경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된 것이며, 사망 후 혹시라도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취한 조치였다고 한다. 1977년에 성당을 짓기 위해 서울 강남구 율현동에 있는 토지를 매입했는데, 그곳이 그린벨트 지역에 묶여 성당 부지로 사용하기 어려운 데다 매각도 힘들어, 1987년에 서울대교구에 토지를 증여했다. 하지만 농지법상 서울대교구는 농지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 등기부상 땅 주인은 계속 김 추기경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토지 점유 20년이 경과되어, 예외규정에 따라 농지 취득이 허용되자 김 추기경을 상대로 토지 소유권 이전 등기절차 이행 청구 소송을 낸 것이다. 법적 다툼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 절차는 교구청 실무자들이 진행했다고 한다.관련기사 1관련기사 2

  • 김수환 추기경이 지은 <우산>이란 시가 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 박노해 시인이 지은 '거룩한 바보'라는 추모시가 있다.
어른이 그리운 시대
큰 어른이 가셨다
영하의 추위 속에
고요한 긴 줄
어둠 속에서
앞은 보이지 않고
걸어도 걸어도 뒤로 밀리는 걸음
이대로 다시 뛸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삶
멈춤
침묵
돌아봄
정화
울고 싶고 기대고 싶어도
의지할 언덕 하나 없어
삶의 무거움이 가슴에 응어리진 사람들
누구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아
거룩한 바보를 찾아나선 사람들
돈이 하늘인 세상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자리에
시위하듯 서있는 사람들
하늘이 거룩한 바보들을 택해
사람의 역사를 이끌어가듯
말없이 느린 행렬로
난 바보야 난 바보야
가슴 치며 가슴 치며
새벽 강물로 흘러가는 사람들

  • 2020년 4월 30일에 김수환 추기경의 유년기를 다룬 영화인 저 산 너머가 개봉되었다.

  • 유성호 법의학자가 사피엔스 스튜디오에서 밝히기를,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의료진들에게 '심장이 멎게 되면 살리지 마세요. 심폐소생술을 안하셔도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호흡이 멈췄는데 의료진들은 본능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해서 한 차례 회생시키자 '다시 안하셔도 됩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

  • 2023년 2월 기준 역대 한국인 추기경 중 유일하게 콘클라베에 참석한 기록을 갖고 있다. 1978년(56세) 8월 6일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 사후 열린 콘클라베에 참석한 게 최초이며, 약 한 달 뒤인 9월 28일에 263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사후 열린 콘클라베에 참석한 것이 두 번째이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 사후 열린 콘클라베에는 연령 제한(83세)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교황직 사임 후 열린 콘클라베 당시 연령 제한(81세)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2024년까지 선거권이 있다.


5.1. 친일파 논란과 실상[편집]



파일:external/s1.postimg.org/image.jpg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다. 김 추기경의 동성상업학교 5년 선배. 김 추기경만 군복을 입은 건, 신학생과 신부까지도 강제징집하는 일제의 만행을 천주교 소식통을 통해 알리려고, 귀국하기 전 배급받은 사관후보생 복장을 일부러 입고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친일몰이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는데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강제적으로 징집된 학병 경력이 있다는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그러나 학병으로 강제징집되었던 건 맞지만, 최종 계급이 일병이었으며 간부후보생에도 지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육군은 학병 출신들에게 6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과 대부실습(일선부대에서 일정기간 복무) 뒤 구대장 면담을 거쳐 간부후보생에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데, 중간과정에 탈락해도 을종간부후보생으로 하사관에 임관된다. 일병이라면 애초에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조선인 학병의 60%가 엘리트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간부후보생을 지원한 것과는 대조되는 사례다.

사실 예전에 자서전에도 기술했던 사항이 21세기에 다시 불거진 것인데 그 당시 친일인명사전을 제작 중이던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애당초 수록 대상자에 미달되었음에도 이례적으로 해명 자료를 내면서 "김수환 추기경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준이 조선인 일본군은 위관급 이상이 대상이며 자발적 친일여부를 함께 고려한다. 같은 소위더라도 자발적 입대라 보기 어려운 학병 출신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예시로 같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전사했더라도 학병 특별조종견습사관출신 탁경현 소위는 이에 해당되지 않으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출신의 최정근 중위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되어있다. 그러므로 일등병에 학병출신인 김수환 추기경은 애초부터 등재 대상이 아니다.

애당초 김수환 추기경은 강제징집이었던 만큼 자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는 근본적인 원인부터 다르다. 비록 학병으로 강제징집되기는 했지만 훈련과정에 들어있던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해서 낙오하는 형식으로 장교로 임관을 하지도 못했다. 강제징집 당시 훈련소의 고위간부와 면담형식으로 사상검증을 하였는데, 일본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여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육군은 예체능계와 미션스쿨 계열 학병들을 초급장교 자원으로 비선호하여 간부후보생에서 탈락시켜 하사관으로 임관시킨 사례가 많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야포부대 소위로 복무했었던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집필한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에서는 필자와 동기지만 음대 출신이라 간부후보생과정에서 탈락하여 전혀 군조(부사관)라는 계급과 어울리지 않는 동기생이나 종교적 이유로 전투병과의 간부후보생이 되지 않기 위해 의무병으로 지원하여 병으로 복무하던 선배 이야기도 나온다.

게다가, 김수환 추기경은 적극적인 친일행동을 하거나 일제로부터 무슨 직위 같은 것을 받은 것도 아니다. 결국 그도 여느 강제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처럼 원하지도 않았는데 살벌한 전쟁터로 내몰려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운한 경험을 한 것이다. # 단순히 불운한 경험에 치부될 정도가 아니라 다치바나 요시오라는 식인귀 일당이 있던 치지시마란 섬에서 일본군 잔악한 전쟁범죄를 목격한 끔찍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5.2. 정치적 참여에 대한 여러 평가[편집]


70년대~80년대까지 민주주의와 인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서울의 봄 후, 대통령 직선제를 거쳐 김영삼 문민정부까지 출범하자 민주주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으로 판단한 듯 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문민정부 때부터 참여정부 출범 전까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한국 천주교의 최고 지도자이자, 국가적 어른으로서 정치 중립 입장은 말년의 참여정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지되었다.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까지 동북아 유일의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아무리 군사정권이라고 해도 바티칸, 나아가 전세계 가톨릭과 대적하기엔 정통성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가톨릭과 척을 지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전근대의 가톨릭 국가들에선 교황청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으며, 근대국가이자 개신교 주류 국가 나치 독일의 수반 아돌프 히틀러도 함부로 교황청에 진입할 수 없어 교황청을 포위하는데 그쳐야 했다. 물론 이건 동맹인 이탈리아가 가톨릭 국가라는 점을 고려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가톨릭과 척을 질 수 없다는 게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 수십 년간 김수환 추기경은 군사정권의 폭력사태에 굳건히 맞섰다.


6. 대중매체[편집]


  • 영화 <저 산 너머>에 김수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다.


7. 둘러보기[편집]


파일:시사저널 화이트 로고.svg
201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 종교인


[ 펼치기 · 접기 ]
※ 201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릭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2010
2011
2012
2013
2014
김수환
염수정
2015
2016
2017
2018
2019
김수환
염수정
김수환
미조사
같이 보기: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 여권 정치인 / 야권 정치인 / 법조인 / 경제인 / 언론인 / 문화예술인 / 연예인 / 스포츠 스타 / 종교인 / 국제 인물 / NGO 지도자 / 잠재력 있는 정치인 / 대통령에 영향력 있는 인물 / 언론매체



파일:무궁화장 약장.png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 펼치기 · 접기 ]
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독립운동가
1969
이인
법조인·독립운동가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1969
이종순
제헌국회의원
1969
조동식
교육인
1970
김수환
추기경
1970
백낙준
교육인
1970
이상백
-
1971
유일한
기업인
1976
박일경
교육인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1982
권영대
교육인
1982
김상만
언론인
1985
이숙종
교육인
1987
이병철
기업인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1991
강영훈
국무총리
1991
김병관
언론인
1994
김호길
교육인
1995
곽윤직
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8
고흥문
국회의원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2009
김정수
정치인
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기업인
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2018
김종필
국무총리
2018
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법조인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9
윤한덕
의사
2019
이국종
의사
2020
이이화
사학자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2022
박병석
국회의장



[1]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 유년기의 추억',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2]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61회.[3] 비슷한 시기에 뮌스터 대학 경제학과에서 유학을 했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회고록에선 김수환 학생신부를 지도할 새로운 교수로서 훗날의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요제프 라칭거가 배정되었는데 라칭거 교수가 워낙 깐깐해서 학위를 포기했다는 언급이 나와 김 추기경의 공식전기와 내용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4]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4. 마산 교구장 재직시절,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5] 김정남 저, 이 사람을 보라, 두레, 2012.12.05.[6]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5. 유신 종말과 서울의 봄,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7]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2. 1970년대 민주화운동,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4:33:30에 나무위키 김수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