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수환 (문단 편집) === 대주교 승품과 추기경 서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ichannela.com/55509118.2-55509081.3.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img.donga.com/200907020500004_4.jpg|width=100%]]}}} || ||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서[br]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비레타]]를 받는 김수환 추기경 || 서울대교구장 착좌미사에서[br]순명서약을 받는 김수환 추기경 || 1968년 4월,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가 김수환 주교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며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이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어서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나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면 어떡할까'라고 고민하였지만, 착좌식 [[미사]]에 원로 신부를 필두로 한 서울대교구 사제단 전원이 아무런 이의없이 순명서약을 하는 것을 보자 그런 우려를 걷어내었다. 이러한 항의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은 매우 안 좋아서, 교구청으로 고리대금업자들이 나타나 돈을 갚으라고 을러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성모병원]]과 [[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을 다른 학교에 매각하니 마니 하는 말까지 떠돌았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일대기를 담은 책 <추기경 정진석>에서는, "매일같이 빚쟁이가 몰려와 수없이 구타당하고 발길질 받았다"고 했다. 1967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이 문제로 은퇴한다. 그 후 1년간 서울대교구장 자리가 공석일때 서울대교구장 서리로 봉직한 [[천주교 수원교구]]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을 개선시켰다. 서울대교구청의 교구장 집무실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던 수녀의 말에 따르면, 휴지통을 비울 때마다 코피를 틀어막은 휴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윤공희 주교의 노고에 대해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즈음 재정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이자 당시 나이 47세로 전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다. 김수환 대주교의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을 바티칸에서 인정했을 뿐더러 서울대교구장이 [[천주교 평양교구]]를 함께 관장하고 있다는 특수성이 더해져 서임되었다는 평이 많다. 외국에서는 지방 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임명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침묵의 교회]]가 북한에 있기 때문에 서울대교구장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 때문에 서울대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관례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훗날 추기경은 "보잘것 없던 나를 주교에서 대주교로, 다시 추기경으로 임명한 바오로 6세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다만 역대 최연소는 아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임명된 추기경 중에서는 서임 당시 나이가 가장 젊은 추기경이다. 현재 [[프란치스코(교황)|프란치스코]] 시기까지 서임 당시 나이 기준 김수환 추기경보다 어린 추기경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