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수환 (문단 편집) === 학도병 징병과 광복, 그리고 주교 수품 전까지의 신부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1.postimg.org/image.jpg|width=100%]]}}} || 1944년, 오른쪽에 군복을 입은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1988년 사망)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설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맞이해 무사히 귀국,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 육군 일등병으로 치치시마에서 복무했으며, 일본군의 대표적 전쟁범죄중 하나인 [[치치지마 식인 사건|치치시마 사건]]에 미군 조종사 살해를 목격한 조선인 징용 노무자들과 함께 1946년 5 ~ 8월 괌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전범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1951년 9월 15일 [[성품성사|사제품을 받고]], 안동 성당(현재의 [[천주교 안동교구|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주임 신부를 시작으로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사도 요한 주교 비서, 김천 성당(현재의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대교구]] 김천황금 성당) 주임신부, 성의중학교 및 [[성의고등학교]] 교장 등 주로 대구대목구에서 사목했다. 이 당시의 대구대목구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교구 사정이 매우 열악했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찢어지게 가난한 극빈층이라 사목활동이 보통 힘든게 아니었으며, 김수환 신부는 맨땅에 헤딩하는 자세로 임하며 최선을 다해 많은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56년 유럽의 선진 가톨릭 교리 및 학문을 배워와 한국 가톨릭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당시 대구대목구장 [[서정길]] 주교의 허락을 받아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열심히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까지 준비했지만 당시 독일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서 이래저래 활동하면서 공부 시간이 부족했던데다 담당 교수신부였던 요제프 회프너가 독일 뮌스터교구 주교로 성성되어 떠나게 되는 등의 일이 겹치면서 결국 1964년에 박사 학위 취득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정확히는 요제프 신부가 떠나고 다른 지도교수가 1년이 넘도록 배정되지 않은 데다 만약 지도교수가 교체되면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 회프너 주교는 훗날 독일 쾰른대교구 대주교로 승품되고, 1969년엔 제자 김수환과 함께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 비슷한 시기에 뮌스터 대학 경제학과에서 유학을 했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회고록에선 김수환 학생신부를 지도할 새로운 교수로서 훗날의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요제프 라칭거가 배정되었는데 라칭거 교수가 워낙 깐깐해서 학위를 포기했다는 언급이 나와 김 추기경의 공식전기와 내용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1964년 6월에 서정길 대주교의 지명을 받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으로 취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해 일반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해설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6년 6월 15일, 사제 수품 15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천주교 마산교구]]를 신설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김수환 신부를 임명한다. 이에 따라 김수환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7년에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대한민국 대표 주교로 참석한다. 본래는 [[윤공희]] 주교가 참석해야 하는데, [[노기남]] 대주교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서울대교구와 본래 맡고 있던 수원교구 업무를 다 보느라 도저히 시간을 쪼갤 형편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가장 젊은축에 속한 김수환 주교가 대리로 참석한 것이다. 이 회의에서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간 결혼인 혼종혼(混宗婚)에 대한 의제가 나오자 김수환 주교가 발언권을 얻어 이를 현대시대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며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큰 주목을 받았다. 대의원 회의에서 나오는 안건과 관련 내용에 대해 문서화 하는 작업이 그에게 주어질 만큼 그가 교황청 중요 인사들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김수환 주교에 의해 개정된 가톨릭 [[혼인성사]] 관련 교회법이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니, 현대 가톨릭사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https://aos.catholic.or.kr/bbs43151/10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4. 마산 교구장 재직시절,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