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수환 (문단 편집) === 유년 및 학창시절 ===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5남 3녀 중 막내로,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 슬하에서 자랐다. 서중하 마르티나는 사제의 길을 걷게 된 두 아들 동한과 수환을 위해 정말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물심양면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교 방학 중에 아들들이 찾아오면 이웃집에 간곡히 부탁해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준비해 주던 터라, 두 형제가 너무 죄송스러워 식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한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가톨릭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에게 잡혀 순교했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와 함께 1933년 [[대구가톨릭대학교/캠퍼스#s-1.3|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본래 이름은 '김수한'이였는데,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관청에서 관련서류를 떼던 중에 이름이 '김수환'으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신고 당시 담당직원의 기재 실수인 듯한데, "'김수환'이란 이름도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당시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고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세례를 받은 신자도 젊은 신자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이름으로 부르지만 중/노년층의 신자들은 여전히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향이 크며, 그 당시에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의미를 지금보다 훨씬 크게 부여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면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동성고등학교|동성상업학교]](現 [[동성중학교(서울)|동성중학교]] & [[동성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동성상업학교는 갑조와 을조로 나뉘어 있었는데, 갑조는 일반학급이고 을조는 [[사제]]가 되려는 소신학교였다. 소신학생 김수환은 사제의 길을 가는 데 고민이 많았지만, 당시 을조를 지도하던 프랑스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신부는 자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해서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했다. 이를 본 당시 교장이던 [[장면]]은 김수환을 불러 일본인 장학사 앞에서 노발대발 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어린 학생 김수환이 경찰에게 해코지라도 당할 지 몰라서 일부러 "교장이 직접 애를 이렇게 훈육했으니 넘어가 달라"는 액션을 취한 것이다. 즉 장면이 적절하게 쇼맨십을 발휘하여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피소드/2017년#s-16|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61회]].] 사실 장면은 평소 성품이 인자하여 주변 사람에게 한번도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 후 장면은 김수환이 일본 [[조치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그를 지원해 주었다. 또한 장면의 셋째 아들 [[장익(주교)|장익]]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있다가 김수환 주교가 마산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이임해왔을 때 교구장 비서로 함께 일했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과 장면의 인연은 장익 주교를 통해 2대에 걸쳐 이어진 셈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장면 총리의 시복시성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sbs.co.kr/200320369.jpg|width=100%]]}}} || || [[성품성사|사제품]]을 받고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와 찍은 기념사진 || 조치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테오도어 게페르트]] 신부(1904~2002)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당시 김수환의 은사였던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광복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의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장례 미사|장례 미사]]를 주례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게페르트 신부님은 사제로서 훌륭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자상한 분이었으며,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늘 자애롭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