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바위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배명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으로, 1972년 배명고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봉황대기]] 우승 당시 수훈선수상을 타는 등 우승에 기여해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 [[스카우트]]되어 바로 실업 무대로 진출했다. 실업 무대에서도 준수한 좌타 1루수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농협 야구단과 군 복무를 위해 입단한 경리단에서 꾸준히 활약하다가 1982년 프로 출범과 함께 [[MBC 청룡]]의 지명을 받아 프로 무대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프로 첫 해 MBC에서 1루수로 나오며 58경기에서 0.294의 타율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게 프로 무대 경력의 최선이였고, 정작 프로 무대에서 이 선수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가 프로 역사상 첫 개명과 1호 에러를 한 선수이다. [[MBC 청룡]]에는 당시 포수 자리에 [[김용운(야구)|김용운]]이란 선수가 있었다. 김용윤과 김용운이 이름이 너무 비슷하고, 심지어 발음도 헷갈릴 정도라서 김용윤이 홈런을 쳐도 김용운이 홈런을 쳤다는 기사가 나갈 정도로 구분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용윤이 이름을 바꿨는데, 기왕 바꿀 거 한 번 들어도 잊어버리지 않을 이름을 고르자고 해서 바꾼 이름이 바로 김바위다. 바위란 이름은 그의 할머니가 바위에 소원을 빌곤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바위라고 불렀던 것에서 떠올랐다고 한다.비록 프로에서의 성적은 그냥저냥 평범했지만, 이 이름은 개명한 프로야구 선수가 나올 때마다 자주 언급됐으니 그의 소원은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김바위는 1983 시즌에 0.157로 부진했고,[* 그해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팀이 0대1로 뒤지던 9회 2사후에 동점타를 쳐서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갔다.] 1984년에는 완전히 주전에서 밀려나 버렸다. 결국 팀 전력이 약했던 삼미가 [[최홍석(야구)|최홍석]]과 1:1로 트레이드했는데, 이는 좌타자가 부족했던 팀의 사정 상 그래도 실업 무대에서 준수했던 그의 실력을 믿고 영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렇게 인상적인 프로 시즌을 보내진 못했다. 1985년에 13개의 홈런을 치면서 타선에 힘을 보탠 것이 그의 최후의 전성기였고, 그 뒤로는 그럭저럭 활약하는 선수였다. 결국 1990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