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득구 (문단 편집) == 사후 == * 사망후에 권투인으로써는 최초로 [[체육훈장]]이 추서되어 4등급인 체육훈장 백마장을 추서받았다.[* 행정안전부와 권투계에 따르면 권투계에서 훈장을 받은 것은 총 5명으로 1983년 김득구를 시작으로 해서 1990년 12월 31일에 전 WBA 챔피언인 유명우가 받은 맹호장 (2등급)과 김득구와 인연이 깊은 프로복서 출신의 프로모터인 김현치가 받은 기린장 (5등급), 2008년 1월 3일에 추서된 최요삼의 백마장 (4등급), 2004년 아테네 하계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에서 웰터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김정주의 거상장 (3등급)이 있다.] * 그가 죽은지 몇 달 후인 1983년에 [[유복자]] 김지완이 출생했다. 아들 김지완은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 김득구의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만에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자살|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보이스피싱|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갈취당했다고 한다. * 김득구의 사망 이후 맨시니는 1983년 1월에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금년말 안에 한국을 방문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12700209208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1-27&officeId=00020&pageNo=8&printNo=18866&publishType=00020|"김득구의 모친을 만나 위로하고 김득구의 묘앞에 참배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얼마 뒤 김득구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호텔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보도가 나왔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20100209208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2-01&officeId=00020&pageNo=8&printNo=18870&publishType=00020|#]] 하지만 맨시니의 대변인이 위 정보를 전면 부인하자 UPI통신은 허위보도를 한 이탈리아 언론을 탓하며 정정보도를 냈다.[[https://www.upi.com/Archives/1983/02/01/Todays-Sport-Parade/6102412923600/|#]][[https://www.upi.com/Archives/1983/02/01/A-spokesman-for-American-WBA-lightweight-boxing-champion-Ray/1836412923600/|#]] *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고로 시합에서 심판 리처드 그린이 김득구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다는 것은 잘못된 루머다. 적어도 9라운드 이후부터는 누가 봐도 김득구의 열세였고 리처드의 문제점은 판정을 불리하게 내린 것이 아니라 이미 제대로 된 의식이 없음에도 정신력만으로 시합에 임하던 김득구를 계속 링에 올렸다는 점에 있었다. 외신에서도 선수 자신의 의사를 중시한다는 명목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진 선수를 끝까지 시합에 나서게 한 심판의 태도를 비판했지 판정이 편파적이었다고 문제삼지는 않았다. * 상대였던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도 알려졌으나, 실은 이탈리아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가짜 뉴스]]다.[* 해외축구 등지에서도 각종 찌라시성 기사로 악명이 높은 그 언론사가 맞다. 이 때문에 가제타의 이러한 민낯을 알고 있는 팬 일부는 그 [[더 선]]보다도 더 치를 떨 정도.] 가제타 델 스포르는 맨시니가 김득구를 생각하여 묘지에 방문하여 기도를 올렸다고 하였으나 맨시니 본인이 거짓말이라고 밝혔으며, 이후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나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자 기자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고 답했다.[* "One paper said I was so distraught I went to a local cemetery and prayed over a grave because I was thinking of Kim,” Ray says. “Absolute lie. They didn’t care. They just made it up.” Finally, Ray confronted a reporter who had been friendly upon his arrival. “Giovanni,” he asked, “why did you do this?” “Ray, you must understand,” he said. “We are journalists. It makes a good story."[[https://www.nytimes.com/2012/09/17/sports/families-continue-to-heal-30-years-after-title-bout-between-ray-mancini-and-duk-koo-kim.html|#]]] 이후에도 맨시니는 1984년까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지켰으나, 1984년 6월 1일 리빙스턴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상실했다. 1985년 2월 복수전에 실패한 뒤 잠정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해 1989년 헥터 카마초와 W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1992년 그렉 호건과 NABF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으나 모두 패한 뒤 최종 은퇴했다. 복싱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자기가 본래 하고파 했던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영화배우를 하지 못했던 건 복싱선수를 꿈꾸었던 아버지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장애인이 돼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복싱선수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https://www.imdb.com/name/nm0541509/|필모그래피]]를 보면 지금도 활동 중인 것을 알 수 있다. * 하지만 위의 가짜 뉴스와는 별개로 리처드 그린처럼 김득구와의 시합은 레이 맨시니에게 있어 평생 씻어내지 못할 상처로 남았는데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에도 계속 복싱 선수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득구 사망 사건이 맨시니의 선수 생활에 큰 타격을 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전과 같은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한 채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https://www.imdb.com/title/tt1954925/|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경기심판과 김득구의 어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경기후에 3명이 사망했으니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였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또한 '살인 복서'로 낙인찍힌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였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2/1892167_19562.html|#]] * 2011년이 되어서야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한다.[[https://imnews.imbc.com/replay/2011/nwdesk/article/2950002_30473.html|관련뉴스]] *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 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단축했다.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늘렸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다. * 김득구 사망사건은 [[마피아]]와 연계된 당대 최고의 복싱 프로모터 돈 킹을 추적하던 [[FBI]]의 수사가 엎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의 여담 항목 참고. * 2023년 1월 19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김득구의 이야기를 다루며, 레이 맨시니와도 직접 인터뷰를 했다. 맨시니는 당시 경기를 하며 느꼈던 김득구의 투지에 찬사를 보내며 "그 순간만큼은 그의 약혼자, 어머니, 가장 친한 친구보다도 내가 그를 가장 잘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제작진이 "하늘에 가면 뭐라고 하며 만날 것 같으신가요?"라고 묻자, 맨시니는 "반갑네, 친구. 사랑한다네."라고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 김득구와 [[최요삼]]의 사례로 만든 제도라고 할 수가 있다. 다만 비극적이게도 모든 권투 경기에서 '닥터스톱'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결국 얼마 전에 열린 격투 경기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몽골 선수가 뛴 권투 경기에서는 '닥터스톱'은 커녕 '링 닥터'마저 없었다는 게 [[SBS 8 뉴스]]의 단독 취재로 드러났다. 심지어 권투계에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고 주최측인 한국권투위원회의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는 뻔뻔한 모습을 감안하면 [[인재]]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몽골 선수의 가족과 몽골 선수의 스승인 라크바 심까지 사태 파악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서 [[대한민국]]에 [[나라 망신|입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심지어 몽골에서는 그야말로 국가 영웅 급에 해당하는 라크바 심을 한국권투위원회가 [[무시|푸대접]]하며 외교 문제로 비하할 위험도 생겼다. [[https://youtu.be/-at1kgLFzZ0|출처]], [[https://youtu.be/Z9I2vfNkEfM|풀버전]],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1045741?sid=102|취재파일]] 참고로 라크바 심은 과거 선수 시절에도 최용수와 타이틀 매치를 위해 방한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연을 쌓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라크바 심 본인도 한국에게 꽤 많이 실망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권투위원회가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지도 못할 망정 라크바 심이라는 사람에게 한국에 대한 실망만 잔뜩 안겨주고 말았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