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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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
金得九 | Kim Dukkoo[1]


출생
1956년 8월 10일
강원도 고성군
사망
1982년 11월 18일 (향년 26세)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68cm / 리치 165cm
가족
어머니 양선녀
배우자 이영미
아들 김지완(1983년생)[2]
종목
복싱
전적
20전 17승 (8KO) 2패 1무
수상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OPBF[3] 라이트급 챔피언
링크
Boxrec

1. 개요
2. 설명
3. 복싱 경력
3.1. 생애 마지막 경기
3.2. 밥 애럼 프로모터의 농간으로 인한 매치업
4. 사후
5. 미디어
6. 참조



1. 개요[편집]


모든 것은 최선의 연습뿐이다.

절제하고 억제하며 오직 열심히 연습을 하자

화끈한 승리를 위해 강한 정신력으로 참고 훈련하자

나에게는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대한민국의 前 권투 선수이다.

1956년 강원도 고성에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으나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해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다.


2. 설명[편집]


호적상으로 1955년 1월 8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되어 있다. 전산화되지 않은 과거에는 일일이 본적지에 방문해서만 호적 사무를 볼 수 있었기에 한참 늦게 신고하면서 출생일/출생지를 혼동하는 경우,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사망한 아이의 동생이 형의 호적을 물려받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 등 오류가 많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난하게 자랐으며,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7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했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했다.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해인 1982년 이영미와 약혼했다.


3. 복싱 경력[편집]


동아체육관에 입문해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대한민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는다.

이후 1982년 2월 28일 OPBF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 경기 결과로 인해 세계 복싱 협회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한다.

이후 같은 해에 네 번의 경기를 더 가지면서 OPBF타이틀도 3차 방어전까지 해냈지만, 그때까지도 비 동양권 선수와의 경기는커녕 아시아 내 원정 경기조차 단 한 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계랭킹 1위가 되었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서술한다.

이후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챔피언인 레이 "붐붐" 맨시니(Ray Mancini)와 타이틀전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김득구 측에서는 어렵게 생긴 기회인 만큼 필승을 다짐하며 맹훈련에 들어갔다.


3.1. 생애 마지막 경기[편집]


파일:득구.png

김득구의 1라운드 부터 14라운드 경기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타이틀전은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유명호텔인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렸다.

김득구는 비장한 각오로 관을 준비해 놓고 가서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 해당 인터뷰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이 경기는 기뻐하는 사람 없이 충격과 슬픔만이 가득한 비극만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맨시니가 유효타는 더 많았어도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10회 때부터 체력 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회에 걸쳐 계속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이 때 허용한 집중타로 김득구의 눈 주위가 크게 부어올랐다.

파일:김득구 맨시니 14라운드.png

운명의 14회.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김득구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공이 울리자 마자 맨시니에게 다시 달려들어 펀치를 섞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유효타를 날릴 수가 없었다. 이후 지칠 대로 지쳐 가드를 완벽하게 올리지 못한 김득구의 왼쪽 머리에 맨시니의 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다. 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사진이 바로 이 때 찍힌 장면이다. 이에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으나 맨시니의 따라붙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어지는 맨시니의 왼손 훅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으나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김득구는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스텝도 넓게 밟지 못해 안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달려들던 맨시니가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제대로 적중해 버렸다. 김득구는 이 충격만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운되고 말았다.

김득구는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고 결국 다시 일어서기까지 했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심판이 KO를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26세의 나이로 돌아오지 못할 영면(永眠)의 길을 떠났다.


3.2. 밥 애럼 프로모터의 농간으로 인한 매치업[편집]


앞서 서술하였듯 김득구는 전적은 괜찮았지만 세계무대 경력이 없어 세계 복싱계에선 무명인 선수였는데 WBA 세계랭킹 1위가 되고 동급 최강으로 평가받는 챔피언과 매치업이 이루어진 부분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이런 의아한 매치업이 이루어진 것은 매니 파퀴아오의 프로모터로도 유명한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4]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떡밥이나 다름없던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리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다.

레이 맨시니가 CBS 채널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사정 때문에 밥 애럼이 이런 무리수를 던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레이 맨시니가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배한다면 모처럼 맺은 TV 계약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뒤떨어지는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상대로 링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속 선수를 돈벌이 상품으로만 여기는 밥 애럼은 다음 상대로 또 다른 약체(미끼) 선수인 캔 보그너를 이미 내정해 놓은 상태였다.

밥 애럼은 검사 출신의 엘리트이지만, 뒷골목 범죄자 출신인 돈 킹보다 몇 배는 더 추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복싱계 이면의 추악한 비지니스가 김득구의 생명을 뺏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밥 애럼은 김득구의 죽음조차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김득구의 경기 이후 2개월간 본인의 프로모션에 큰 경기가 잡혀있지 않고, 라이벌인 돈 킹의 프로모션엔 3건의 큰 경기가 잡혀있다는 걸 파악한 밥 애럼은 돈 킹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이미지를 높이기위한 수단으로 2개월간 미국 전역의 프로복싱경기를 중지하자는 제안을 한다. 심지어 밥이 이용한 돈은 프로모터로는 라이벌이나 사적으론 친한 사이였다.

이처럼 무리하고 추악한 대진을 기획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린 밥 애럼은, 결과적으로 복싱계의 사정을 알고 있는 관련자들에게 약간의 비난만 받았을 뿐 실질적인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고 지금도 미국의 프로 권투계를 좌우하는 거물 행세를 하고 있다.

물론 밥 애럼이 김득구가 사망할 것을 미리 알고, 또는 김득구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서 사망에 이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런 매치업을 추진했을 리는 없다. 또한 평범한 매치업을 했더라도 당일 컨디션 조절 실패나 지명방어전 상황, 또는 해당 단체의 선수층이 얇은 상황 등에서는 얼마든지 기량차가 큰 경기가 나올 수 있기도 하다. 저런 상황에서 선수 보호를 위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경기 운영인데, 당시에는 2000년대 이후에 비해 선수를 보호하는 룰이 크게 부족했던 데다, 9라운드 이후 이미 승패는 판가름이 났음이 명백한 상황이 여러 차례 나왔는데도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부분이 김득구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다만 당시 선수 본인이 경기가 계속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심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주심은 경기를 계속할지 여부를 선수 본인에게 확인했고, 김득구는 명백하게 경기의 계속을 희망했다.


4. 사후[편집]


  • 사망후에 권투인으로써는 최초로 체육훈장이 추서되어 4등급인 체육훈장 백마장을 추서받았다.[5]

  • 그가 죽은지 몇 달 후인 1983년에 유복자 김지완이 출생했다. 아들 김지완은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 김득구의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만에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갈취당했다고 한다.

  • 김득구의 사망 이후 맨시니는 1983년 1월에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금년말 안에 한국을 방문해 "김득구의 모친을 만나 위로하고 김득구의 묘앞에 참배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얼마 뒤 김득구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호텔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맨시니의 대변인이 위 정보를 전면 부인하자 UPI통신은 허위보도를 한 이탈리아 언론을 탓하며 정정보도를 냈다.##

  •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고로 시합에서 심판 리처드 그린이 김득구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다는 것은 잘못된 루머다. 적어도 9라운드 이후부터는 누가 봐도 김득구의 열세였고 리처드의 문제점은 판정을 불리하게 내린 것이 아니라 이미 제대로 된 의식이 없음에도 정신력만으로 시합에 임하던 김득구를 계속 링에 올렸다는 점에 있었다. 외신에서도 선수 자신의 의사를 중시한다는 명목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진 선수를 끝까지 시합에 나서게 한 심판의 태도를 비판했지 판정이 편파적이었다고 문제삼지는 않았다.

  • 상대였던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도 알려졌으나, 실은 이탈리아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가짜 뉴스다.[6] 가제타 델 스포르는 맨시니가 김득구를 생각하여 묘지에 방문하여 기도를 올렸다고 하였으나 맨시니 본인이 거짓말이라고 밝혔으며, 이후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나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자 기자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고 답했다.[7] 이후에도 맨시니는 1984년까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지켰으나, 1984년 6월 1일 리빙스턴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상실했다. 1985년 2월 복수전에 실패한 뒤 잠정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해 1989년 헥터 카마초와 W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1992년 그렉 호건과 NABF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으나 모두 패한 뒤 최종 은퇴했다. 복싱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자기가 본래 하고파 했던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영화배우를 하지 못했던 건 복싱선수를 꿈꾸었던 아버지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장애인이 돼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복싱선수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지금도 활동 중인 것을 알 수 있다.

  • 하지만 위의 가짜 뉴스와는 별개로 리처드 그린처럼 김득구와의 시합은 레이 맨시니에게 있어 평생 씻어내지 못할 상처로 남았는데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에도 계속 복싱 선수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득구 사망 사건이 맨시니의 선수 생활에 큰 타격을 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전과 같은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한 채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경기심판과 김득구의 어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경기후에 3명이 사망했으니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였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또한 '살인 복서'로 낙인찍힌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였다.#

  • 2011년이 되어서야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한다.관련뉴스

  •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 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단축했다.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늘렸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다.

  • 김득구 사망사건은 마피아와 연계된 당대 최고의 복싱 프로모터 돈 킹을 추적하던 FBI의 수사가 엎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의 여담 항목 참고.

  • 2023년 1월 19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김득구의 이야기를 다루며, 레이 맨시니와도 직접 인터뷰를 했다. 맨시니는 당시 경기를 하며 느꼈던 김득구의 투지에 찬사를 보내며 "그 순간만큼은 그의 약혼자, 어머니, 가장 친한 친구보다도 내가 그를 가장 잘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제작진이 "하늘에 가면 뭐라고 하며 만날 것 같으신가요?"라고 묻자, 맨시니는 "반갑네, 친구. 사랑한다네."라고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 김득구와 최요삼의 사례로 만든 제도라고 할 수가 있다. 다만 비극적이게도 모든 권투 경기에서 '닥터스톱'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결국 얼마 전에 열린 격투 경기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몽골 선수가 뛴 권투 경기에서는 '닥터스톱'은 커녕 '링 닥터'마저 없었다는 게 SBS 8 뉴스의 단독 취재로 드러났다. 심지어 권투계에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고 주최측인 한국권투위원회의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는 뻔뻔한 모습을 감안하면 인재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몽골 선수의 가족과 몽골 선수의 스승인 라크바 심까지 사태 파악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서 대한민국입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심지어 몽골에서는 그야말로 국가 영웅 급에 해당하는 라크바 심을 한국권투위원회가 푸대접하며 외교 문제로 비하할 위험도 생겼다. 출처, 풀버전, 취재파일 참고로 라크바 심은 과거 선수 시절에도 최용수와 타이틀 매치를 위해 방한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연을 쌓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라크바 심 본인도 한국에게 꽤 많이 실망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권투위원회가 대한민국위상을 높이지도 못할 망정 라크바 심이라는 사람에게 한국에 대한 실망만 잔뜩 안겨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5. 미디어[편집]


  • 1984년 한국영화 '울지않는 호랑이'가 김득구를 다뤘다. 이계인이 김득구를 연기했으며 감독은 여곡성, 알바트로스의 이혁수다.

  • 2002년작인 곽경택이 감독을 맡은 한국영화 '챔피언'도 바로 김득구를 다룬 영화이다. 유오성이 김득구를 연기했다.

  • 개그콘서트에서 댄서 킴으로 유명했던 개그맨 김기수가 '복서 킴'이라는 이름으로 패러디했다.

  • 미국의 밴드 Sun Kil Moon[8]은 김득구 선수를 주제로 한 곡을 내기도 했다.# 밴드 멤버 중 하나인 마크 코즐렉이 김득구의 경기를 본 뒤 그를 소재로 한 'Duk Koo Kim'이라는 곡을 쓴 것. 이 이야기는 스펀지 120회 방송분에서 소개되었다.



  • CSI: Crime Scene Investigation 3기 7화가 권투를 배경으로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의 경기가 잠깐 언급된다.


6. 참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04:40:42에 나무위키 김득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Kim Deukkoo라고도 쓰인다. 복싱 선수 홈페이지에는 Kim Deukkoo라고 쓰여 있으나 김득구가 복싱 선수로 활동했을 당시에는 Kim Dukkoo라고 쓰였다. 대부분의 외국인들도 Kim Dukkoo라고 알고 있다.[2]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유복자이다. 현재는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3] 동양 태평양 복싱기구[4]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뉴욕 골든글러브 우승 경력이 있다.[5] 행정안전부와 권투계에 따르면 권투계에서 훈장을 받은 것은 총 5명으로 1983년 김득구를 시작으로 해서 1990년 12월 31일에 전 WBA 챔피언인 유명우가 받은 맹호장 (2등급)과 김득구와 인연이 깊은 프로복서 출신의 프로모터인 김현치가 받은 기린장 (5등급), 2008년 1월 3일에 추서된 최요삼의 백마장 (4등급), 2004년 아테네 하계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에서 웰터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김정주의 거상장 (3등급)이 있다.[6] 해외축구 등지에서도 각종 찌라시성 기사로 악명이 높은 그 언론사가 맞다. 이 때문에 가제타의 이러한 민낯을 알고 있는 팬 일부는 그 더 선보다도 더 치를 떨 정도.[7] "One paper said I was so distraught I went to a local cemetery and prayed over a grave because I was thinking of Kim,” Ray says. “Absolute lie. They didn’t care. They just made it up.” Finally, Ray confronted a reporter who had been friendly upon his arrival. “Giovanni,” he asked, “why did you do this?” “Ray, you must understand,” he said. “We are journalists. It makes a good story."#[8] 이름만 보면 한국 밴드로 보이겠지만 밴드 멤버는 모두 미국인이다. 이름의 모티브는 한국의 복서 문성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