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기진 (문단 편집) == 여담 == * 1930년대에 조선 사회에서 열풍이었던 금광 사업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들었으나 실패하고 만다. 자신이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금광 재벌 [[방응모]]가 인수하자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작 아이러니한건 김기진은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황금왕 방응모가 인수한 조선일보에서 일할수 없다면서 사표를 내고 뛰쳐나왔단 점이다.~~지식인의 내로남불~~] 당시의 농민, 노동자, 지식인을 가리지 않은 광풍과도 같은 금광 열풍은 [[김유정(소설가)|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에 잘 나타나 있다.[* 김유정도 금광 사업에 투자했다가 전재산을 털어먹었고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게 된다.] *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 문학가 [[김명순]]을 "성격이 이상하고 행실이 방탕했기 때문"이라며 비난한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김명순]] 항목 참조. * 그런데 이는 김명순 개인만 타깃으로 한 공격이 아니라 임노월을 포함한 유미주의 문학인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https://m.blog.naver.com/kwank99/30085241217|링크]] [[카프]] 활동 당시 김기진은 유미주의 문학을 퇴폐 문학이라 비판했는데, 유미주의 시인 중 하나인 임노월이 김명순과 연인 사이였다는 점을 트집 잡아서, 임노월 시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김명순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노월 시인은 20년대에 절필한 후 행적이 불분명해졌다. * [[이환경]]이 직접 집필한 [[야인시대]] 소설판에서 잠깐 등장한다. 인민재판을 받고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는데 당시 [[최동열]] 기자가 그 광경을 목격한다. * 김기진의 형 김복진(金復鎭, 1901. 4. 3 ~ 1940. 8. 18)[* 족보명 김도진(金燾鎭). 자식 없이 요절한 숙부 김학규(金鶴圭, 1866 ~ 1891. 1. 2)에 입양되었기에, 족보상으로는 김기진에게 4촌 형이 된다.]은 조각가였다. 김복진은 원래 문학도였으나 동생이 문학을 한다는 사실에 미술로 진로를 바꾸었다. 극단 토월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카프 활동을 하는 동생과 공산주의에 비관적이었으나 얼마 후 동생보다 더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1927년에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불교에 귀의했다. 이 때문에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고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말년에 [[법주사]] 불상 제작을 맡았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동생이 보관했으나 [[6.25 전쟁]] 중에 소실돼 남아 있는 작품이 극히 적다.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1903년 출생]][[분류:1985년 사망]][[분류:서원구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후)]] [[분류:배재고등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