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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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진
金基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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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김팔봉(金八峰)
창씨명
가네무라 야미네(金村八峯)

팔봉(八峰), 여덟뫼, 팔봉산인(八峰山人), 동초(東初), 구준의(具準儀)
출생
1903년 6월 29일
충청북도 청주군 남차이면 팔봉리[1]
사망
1985년 5월 8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
본관
장동 김씨[2]
학력
영동공립보통학교[3](졸업)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릿쿄대학 (영문과 / 중퇴)
등단
1920년 시 「가련아(可憐兒)」

1. 개요
2. 생애와 문학
3. 작품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비평가이자, 기자, 시인, 소설가, 친일반민족행위자.

필명인 김팔봉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카프의 이론가 겸 소설가로 초창기 계급문학을 주도하였다.


2. 생애와 문학[편집]


1903년 6월 29일 충청북도 청주군 남차이면 팔봉리[4]의 대지주 집안에서 아버지 김홍규(金鴻圭, 1871 ~ ?. 1. 15)와 어머니 광산 김씨(1868 ~ ?) 김영우(金永祐)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김상용의 11대손으로, 아버지 김홍규는 구한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종6품)를 시작으로,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한성부 재판소(漢城府裁判所) 등의 주사(主事)와 성진군·정평군·해미군·풍천군·보은군·진천군·면천군·황간군·춘천군·영춘군 등지의 군수(郡守)를 두루 역임한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유복하게 자라났다.

경성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여기서 카프의 맹우인 박영희를 만났다. 이들은 이후 교유하게 되면서 졸업 후에는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고, 그에게 계급주의 사상을 이식해 주게 된다.

일본 유학 초기에는 영국, 프랑스 상징주의에 경도되어 심미주의적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고, 박영희와 함께 <백조> 동인을 결성하였다. 1921년 릿쿄대학 예과 영문과에 입학하였는데, 이때부터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본격적 관심을 가지면서 계급문학을 예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923년 5월 릿쿄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이에 따라 <백조>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이때부터 <개벽> 지 등에 프롤레타리아 문학 관련 평문을 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시대가 시작된다. 1924년 박영희 등과 함께 계급주의 문학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하였고, 1925년 염군사와 파스큘라를 합병하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조직하였다.

카프의 이론가로서 김기진은 계급의식의 전달을 위해 기본적인 문학적 형상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꾸준히 견지하였다. 이는 유명한 박영희와의 내용 형식 논쟁과, 조중곤과의 '낙동강' 논쟁, 임화와의 대중화 논쟁 등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신경향파 문학에서 방향전환을 거쳐 볼셰비키 문학으로 넘어가면서 카프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서의 가치보다는 정치성과 대중 선동을 위한 도구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이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수준의 선동문구의 나열과 생경한 관념이 그대로 노출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김기진의 문제제기는 비교적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계급 의식이 선명하지 않은 자, 예술지상주의자, 현실추수주의자 등의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주도권을 잡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김기진의 계급소설은 객관 현실 묘사보다 이데올로기가 우선하여 관념적, 추상적 성격이 강한 임화가 분류하는 박영희적 경향에 해당한다. 이는 김기진을 비롯한 대다수 카프 작가들의 성장 배경과도 관련이 있고, 청년기의 낭만적 지향성이 현실로 육화되지 못한 채 일종의 도그마로 극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 생활과 평론가 생활을 하는 동시에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였다.

1931년 카프 1차 검거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고, 신건설사 사건으로 인해 임화와 함께 1935년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면서 계급문학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만다.

이후 김기진은 노골적인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44년에는 대동아문학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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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출판업에 종사하였으나 6.25 전쟁 당시 인쇄공들의 고발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즉결처분을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후는 반공주의, 친정권 문인으로 노선을 전환하였는데, 6.25전쟁 당시 종군작가단으로 참전하였고, 5.16 군사정변 직후 관제 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85년 5월 8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작품[편집]


  • 붉은 쥐
  •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 수호지(번역)[5]
  • 초한지(번역)


4. 여담[편집]


  • 1930년대에 조선 사회에서 열풍이었던 금광 사업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들었으나 실패하고 만다. 자신이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금광 재벌 방응모가 인수하자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6] 당시의 농민, 노동자, 지식인을 가리지 않은 광풍과도 같은 금광 열풍은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에 잘 나타나 있다.[7]

  •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 문학가 김명순을 "성격이 이상하고 행실이 방탕했기 때문"이라며 비난한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김명순 항목 참조.

  • 그런데 이는 김명순 개인만 타깃으로 한 공격이 아니라 임노월을 포함한 유미주의 문학인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링크 카프 활동 당시 김기진은 유미주의 문학을 퇴폐 문학이라 비판했는데, 유미주의 시인 중 하나인 임노월이 김명순과 연인 사이였다는 점을 트집 잡아서, 임노월 시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김명순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노월 시인은 20년대에 절필한 후 행적이 불분명해졌다.

  • 이환경이 직접 집필한 야인시대 소설판에서 잠깐 등장한다. 인민재판을 받고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는데 당시 최동열 기자가 그 광경을 목격한다.

  • 김기진의 형 김복진(金復鎭, 1901. 4. 3 ~ 1940. 8. 18)[8]은 조각가였다. 김복진은 원래 문학도였으나 동생이 문학을 한다는 사실에 미술로 진로를 바꾸었다. 극단 토월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카프 활동을 하는 동생과 공산주의에 비관적이었으나 얼마 후 동생보다 더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1927년에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불교에 귀의했다. 이 때문에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고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말년에 법주사 불상 제작을 맡았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동생이 보관했으나 6.25 전쟁 중에 소실돼 남아 있는 작품이 극히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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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2] 문충공파 26세 진(鎭) 항렬. 족보명은 김호진(金灝鎭).[3] 참고[4]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5] 164회 간본(양정견이 정리한 120회본에 진침의 수호후전을 합친 판본)의 번역본.[6] 정작 아이러니한건 김기진은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황금왕 방응모가 인수한 조선일보에서 일할수 없다면서 사표를 내고 뛰쳐나왔단 점이다.지식인의 내로남불[7] 김유정도 금광 사업에 투자했다가 전재산을 털어먹었고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게 된다.[8] 족보명 김도진(金燾鎭). 자식 없이 요절한 숙부 김학규(金鶴圭, 1866 ~ 1891. 1. 2)에 입양되었기에, 족보상으로는 김기진에게 4촌 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