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굴라크 (문단 편집) ==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소련]]의 굴라크 체제는 '''그야말로 [[도시전설]]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공화국]] 정부는 굴라크의 존재를 탐지하고 있었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전역에서 폴란드 공화국의 [[교민]]들이 [[내무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인민경찰(밀리치야)에 무더기로 잡혀갔는데,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주재 폴란드 [[외교공관|대사관]]이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공화국의 외무부에 보고한 덕택이다. 게다가 1940년에 [[폴란드 망명 정부]]가 [[자유 폴란드군]]을 결성하면서 [[폴란드군]] [[포로]]들이 [[이란]]과 [[터키]] 및 [[인도 제국]]과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귀환하고 [[영국]]과 [[프랑스]] 및 [[서독]]과 [[스위스]]에 정착하면서 그들을 구금한 굴라크의 실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의 경우는 그것을 운영한 체제가 완전히 사라졌고, 심판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상이 공개된 것이지만 소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었고, 2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서방과의 동맹 체제 때문에 오히려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를 서방에서는 모른 체한 면이 있다. 심지어 [[카틴 학살]]조차도 정황이나 여러 증거로 봐서 소련의 소행임이 분명함에도, 미국측에서 동맹을 의식해 그 사실을 [[독일]]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1940년대 말 들어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고 동유럽에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거 들어서자, 이에 발 맞춰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이슈화 되기시작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에서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실체가 드러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소련이 해빙기를 맞게 되면서 굴라크의 실상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 흐루쇼프가 쫓겨나고 보수화 된 브레즈네프 체제하에서부터는 서방도 고위 반체제 인사나 유명한 운동권 대학생의 굴라크 수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국가적인 항의를 하게 되었다. 80년대 유형생활을 한 핵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가 대표적인 케이스. 굴라크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체계적인 연구는 솔제니친의 르포 '[[수용소 군도]]'가 최초였고[* 한국에서는 1부만 70년대 발췌 번역되었고 소련 체제를 설명한 완역본은 80년대 후반에야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시중에서는 1부(정확히는 1부의 1~7장 부분)만 번역한 발췌본만 구할 수 있다. [[열린책들]]에서 발행한 완역본은 현재 절판 상태.], 소련 붕괴 후 여러 자료들을 모아 집필한 애플바움의 역작 [[굴락]]이 출간되었는데, 번역본은 [[불쏘시개]]다.[* 가히 최악의 번역이라 할 만하다. 애초에 번역 작업을 제대로된 번역가가 맡아서 하지 않고 GAGA통번역센터라는 번역 업체에서 했다. 각 챕터마다 고유명사의 한글 표기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당연하고 비문과 오역이 난무한다. 읽다 보면 탄식이 절로 나오는 수준. 심지어 책 첫 페이지의 '감사의 말'조차 번역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