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라크

덤프버전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상징
국기 · 국장 · 국호 · 노동자 마르세예즈 · 인터내셔널가 · 소련 찬가 · 낫과 망치 · 붉은 별
정치
정치 전반 · 소련 공산당 · 소련 공산당대회 · 크렘린 · 레닌 영묘 · 최고회의 · 소련 장관회의 · 헌법
블라디미르 레닌 · 이오시프 스탈린 · 니키타 흐루쇼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유리 안드로포프 · 콘스탄틴 체르넨코 ·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고지도자(서기장) · 국가수반 · 대통령
군사
소련군(장비 · 소련 육군 · 소련 해군 · 소련 공군 · 소련 방공군 · 소련 전략로켓군) · 스타프카 · 소련 국방장관 · 스페츠나츠 · 정치장교 · 바르샤바 조약기구 · 열병식
소련의 핵개발(RDS-1 · 차르 봄바 · 세미팔라틴스크) · 소련군 vs 미군 · 소련군 vs 자위대 · 대외전쟁
치안
소련경찰(Милиция) · 소련 내무군 · 비밀경찰(체카(펠릭스 제르진스키) · NKVD · KGB
경제
경제 · 경제사 · 소련 루블 ·
인문
민족 · 언어 · 종교
역사
역사 ·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신경제정책 · 대숙청 · 독소 폴란드 점령(카틴 학살) · 대조국전쟁 · 냉전(6.25 전쟁 · 스푸트니크 쇼크 · 쿠바 미사일 위기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1980 모스크바 올림픽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소련 존속 여부 국민투표 · 8월 쿠데타 · 소련 붕괴
외교
외교 · 미소관계 · 소련-유고슬라비아 관계(티토-스탈린 결별) · 중소관계(중국-소련 국경분쟁 · 중소결렬) · 독소관계(독소 불가침조약) · 독러관계 · 북소관계 · 한소관계 · 소련-대만 관계 · 친소 · 소비에트 제국 · 브레즈네프 독트린
문화
문화 · 사회주의 리얼리즘 · 사미즈다트
막심 고리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미하일 숄로호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스트루가츠키 형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 아람 하차투리안 · DDT(밴드) · 키노
소련 요리
우주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 세르게이 코롤료프 ·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 유리 가가린 ·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 알렉세이 레오노프
스푸트니크 · 소유즈 우주선 · 보스토크 계획 · 보스호드 계획 · 살류트 프로그램 · 미르 우주정거장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 소유즈-아폴로 테스트 프로젝트




1. 개요
2. 기원
3. 수감자의 종류
4. 수감자의 숫자
5. 노동과 생활
6. 석방?
7. 변화
8.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9. 손실 보상 및 구제
9.1. 소련의 경우
10. 현실의 굴라크
11. 매체에서의 굴라크
11.1. 게임에서의 굴라크
11.2. 소설 및 만화 매체에서의 굴라크
11.3. 영화에서의 굴라크
11.4. 네이버 카페 세계대전 떡밥 수용소(굴라크)


1. 개요[편집]


ГУЛАГ / GULAG

굴라크는 1930년부터 1959년까지 운영한 내무인민위원부 소속 노동교화소 본부[1]의 약자로,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소련정치범수용소 또는 노동교화소를 일컫는다.

'굴라그'로도 알려져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어말 자음이 무성음화된 '굴라크'이다. 러시아어로 '통합국가정치보안부[2] 교정노동수용소 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исправительно-трудовых лагерей ОГПУ, ГУЛаг)' 혹은 '수용소 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 ГУЛаг)'의 두문자어이다.


2. 기원[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Gulag_Location_Map.svg.png

1918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에서 운영되었던 굴라크들.[3][4]

러시아 제국시베리아를 개척하기 위해 정치범들을 동원해 도시와 생산 시설 건설, 벌목 같은 중노동을 시켰다. 원래는 일반인들을 시베리아 개척에 동원하려 했지만 워낙 사람들이 안 왔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죄수들을 시베리아로 보낸 것이다. 이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형벌이 소련의 굴라크 제도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굴라크는 러시아 내전 때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었고, 조직적이고 정교한 탄압은 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5] 러시아 제국 때에는 행정력이 미비하여 대도시나 군인들이 주둔한 곳을 제외하면 각 마을별로 경찰이 몇명 정도 배치되는 수준에 그친 데다가 전화같은 통신 시설도 열악했던지라 탈출이 어렵지 않았지만, 스탈린이 떵떵거리던 시절에는 시베리아 유형을 인프라의 확충과 병행해서 업그레이드했다. 우선 유형지에 전력망과 통신망을 깔면서 관리인력과 감시인력을 대거 늘렸으며, 철조망과 담장 같은 시설도 확충시켜놓았다. 따라서 경계도 자연히 삼엄해져서 탈출을 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조용하게 준비한다는 조건을 만족하면 비교적 쉽게 탈출할 수가 있었던 러시아 제국 시절과 달리 죄수들은 얄짤없이 형을 끝까지 마치게 되었고,[6] 시베리아의 열악한 자연환경도 몸소 만끽해야 했던지라 굴라크의 악명이 드높아진 것이다.[7] 물론 단순히 인프라 시설 확충만 원인이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굴라크에 수용되면서 1934년 51만 명이었던 수감자수가 1940년에 134만 명 가량으로 크게 늘어난 결과 상당수의 수용소가 과밀화된 데다가, 이들이 반역자와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으며 수감자들에 대한 처우가 덩달아 나빠진 영향이 컸다.

3. 수감자의 종류[편집]


  • 정치범
정말로 체제 비판자일 수도 있고, 높으신 분들의 비위에 맞지 않거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분 내지는 그의 가족들일 수도 있다. 사실 피해자 태반은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제국과 정교회 복구를 추구하며 소련정권에 반대하던 순수한 의미에서 '반동'이 아니라 소련과 공산권 내 권력 투쟁의 피해자거나 이런 저런 노선에서 반대한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훨씬 많았다. 대숙청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은 수감자로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8] 이런저런 일로 외국에 갔다가 오는 경우도 간첩 혐의로 몰려서 가는 일이 빈번했고.[9] 심지어 독소전쟁에서 취득한 독일 국방군의 장비나 훈장을 개인적인 기념으로 가지고 있다가 들켜서 난데없이 반동분자가 되어 굴라크로 향한 예도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제2차 세계 대전영국 해군에 연락 장교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여 전후 영국 해군 제독에게 기념품과 편지를 받은 소련 해군 장교도 굴라크로 간 이야기가 나온다.[10] 대숙청의 세밀한 역사적 면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에선 놀랄 법한 사실이지만 정치적 억압이 가장 극심했던 스탈린주의의 전성기, 30년대 후반 굴라그에 끌려온 정치범들은 태반이 바로 그 국가 보안기관, 정치경찰 그 자체인 NKVD 출신이었다. 애초에 조직 자체가 트로츠키가 만들었고, 이때 한창 소련 내에서 일국사회주의 노선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는지라 해외 파견 다니면서 다양한 국제 정치 집단들과 교류할 일이 많았던 NKVD가 집중 숙청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비공산 독립 좌파 세력 숙청을 주도하다 바로 본인도 소련 귀국하자마자 숙청당한 안토노프 오브셴코, 국제여단을 이끌며 한때 마드리드의 수호자라 칭송받은 '클레베르 장군'이란 가명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슈테른(Manfred Stern, 1896–1954) 같은 스페인파가 대표적인 토사구팽 피해자였고,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에서 모두 활약한 바실리 블류헤르, 미하일 보로딘 같은 중국파 공작원, 군무원들도 많은 수가 이때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귀국'당하자'마자 굴라그로 끌려가 최후를 맞았다.

  • 전쟁 포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적국에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사람들은 일단 비겁 내지는 간첩 혐의로 거의 전원 굴라크로 직행했다. 심지어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서 전선에 복귀한 사람도 간첩 혐의로 25년 굴라크 수감을 언도받는다.[11][12] 다행히도 이들은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정권 때 석방과 복권이 되었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독일국방군무장친위대원들도 시베리아 개척에 동원되었다. 이미 대전 말기에 독일군들의 구호가 Sieg oder Sibirien(승리 아니면 시베리아다.)일 지경이었다. 약 120만명이 그 곳에서 강제노역과 거친 환경 때문에 사망하였다. 1955년 9월 12일에 콘라트 아데나워니키타 흐루쇼프 사이의 치열한 논의 끝에 서독소련 사이에 국교정상화 협상이 타결되어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외국인
소련 치하의 폴란드인, 독일의 소련 점령 지구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체포된 독일인프랑스인들이나, 냉전 시기 소련 정찰 중 실종된 조종사들[13]이 여기에 수용되었다. 소련에서 스파이 혐의로 실종된 미국인[14]이나 스페인 내전 중 소련으로 건너간 스페인 공산당원들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15] 이들 중에서 공산당원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주로 대숙청 시기에 의심이 간다며 끌려간 사례들이었다. 또한 2차대전 전시 및 그 이후, 전시의 교전국가인 나치 독일의 포로들 역시 굴라크에 수용된다. 이들은 전후에 노동력이 부족했던 소련에서 유용한 노동력(...)으로 취급받으며 지냈는데, 이들 중 소련 체제에 협조적인 사람들은 1950년대에 석방되었지만, 대부분은 당사국이 소련과 수교할 때까지 억류됐다.

고려인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전후 상당히 많은 고려인들이 굴라크에 이송되었다. 김단야, 조명희 같은 재소련 독립운동가 상당수도 누명을 쓰고 숙청되었다.[16]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완역판에서도 고려인들이 수용된 이야기가 버젓이 실릴 정도였다. 해방 이후 소련군정에 반대한 인사들 중 상당수가 굴라크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스탈린 사후 북한 이송과 소련 잔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소련에 잔류한 사람들의 수용소 기록이 90년대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관동군에 복무하던 조선인 장병들 역시 굴라크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식민지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았고, 대부분 40~50년대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17] 남한에서 활동 중인 삭풍회(朔風會)라는 단체가 바로 구 일본군 출신 시베리아 유형자들의 전우회이다. 그들과 별개로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NKVD가 재빠르게 체포해 본토로 압송하여 굴라크에 구금했는데, 대부분은 못 나오고 거기서 매일같이 삽질하다가 죽었다. 게다가 반공을 표방한 독립운동가들도[18] 공산당원들이 친일파로 모함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구금되기도 했다. 소련군이 다스린 북한 땅에서 스메르시GRUNKVD가 수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을 잡아들여 북극, 연해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압송했는데, 사회단체를 결성한 죄로 소련군에 체포되어 연해주의 굴라크에 끌려갔다가 무죄로 석방되어 북한으로 돌아온 한교석(한양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기자회견,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주모자들을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압송한 사례를 깊이 다룬 기광서(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논문(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독소전쟁의 개막으로 날벼락을 맞았다. 1941년에 스탈린의 특명으로 NKVD소련군이 재빠르게 습격하여 체포되거나 끔살당했다.
정말로 사보타주일 수도 있지만 상습 지각[19]이나 근무 중에 졸았거나, 집단농장에서 기물을 파손했거나, 자기가 속한 특정 기관의 예산을 낭비[20]했다는 이런저런 혐의로 끌려갔다.

  • 일반 죄수
그야말로 살인, 강도, 강간, 레드 마피아 등의 강력범들도 굴라크 행이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수용소에서도 내부 조직을 만들어서 잘 먹고 잘 살고 간수들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지냈다. 위에 설명한 혐의로 들어온 일반인들은 식량, 금품, 목숨을 뺏기게 된다. 수용소 당국보다 가장 무서운 쪽이 바로 이런 죄수들이었다.[21]

  • 내무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인민경찰(밀리치야)의 할당량 때문에 끌려온 사람
대숙청, 형벌 부대 문서로.[22]

  • 종교인
국가 무신론의 영향으로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이슬람, 유대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를 믿은 종교인들도 수감되었다.


4. 수감자의 숫자[편집]


소련 붕괴 후 로버트 콩퀘스트스티븐 로즈필드의 연구에 따르면 1929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총 1400만 명이 굴라크를 거쳤으며, 이 중 16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소련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53년까지 전체적으로 760만명 가량이 다녀간것으로 되어있다. 소련 당국에서는 이 자료들을 소련말기까지 비공개했고, 이 때문에 서양 학자들은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 기록보관소에 접근하지 못해서 추정으로 어리짐작할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 공식기록에 의하면 사망자수와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해는 독소전쟁때인 1942년과 1943년도인데 수용소 수감자들이 대거 형벌부대 등으로 징집되었고, 이들 중 많은 수가 전투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이 160만명으로 집계된것도 결국은 전쟁때문이었고, 전쟁으로 죽은 사람을 제외하면 사망자수가 많이 줄어드는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1932년부터 1952년까지 2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평시에도 1년에 수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수감자들에 대한 처우가 나빴던것은 사실이다. 사망률이 가장 높았을때는 1933년도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여파를 제대로 맞아서이기 때문이고, 사망자수는 1938년이 가장 많고, 전시가 아닌 평시임에도 10만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대숙청의 영향으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도 처형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사망률과 사망자수 통계를 통해 수용자에 대한 대우수준이 어땠는지도 알수있다. 1930년대에는 평년도에도 사망률이 2~3%에도 달했을 정도로 가혹했고, 이러한 추세가 1948년까지 유지되었으나, 1950년에는 사망률이 1% 아래로 내려갔고, 1953년에는 굴라크에 수감되었던 수감자들이 대거 석방되면서 사망자수가 1만명 아래로 줄어들었으며, 1956년에는 사망자수가 3000명대까지 줄어들엇는데, 이를 통해 스탈린 사후에 수감자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줄어들고 대우도 상대적으로 나아졌다는것을 알수있다.

5. 노동과 생활[편집]


백해-발트해 운하,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의 건설과 시베리아 지역 개발, 콤소몰스크나아무레 등 극동 지역 개발, 2차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여기에서 나온 성과였다.

사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원조격 되는 노동 정치범수용소이기에 학살을 위한 장소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의외로 굴라크의 목적 자체는 노동력 충원이었고, 실제로 소련의 노동력 충원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라크가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라크의 주요 목적은 인구가 적고, 낙후된 시베리아를 개발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보너스로 그 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다.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다. 1차 5개년 계획으로 이동 된 죄수 집단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이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라크는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책임졌으며, 단순노동에만 투입됐을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엘리트 두뇌들도 상당수 굴라크에 투옥돼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의 인센티브는 주로 형량 감경. 조기전역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인센티브라고 할 수 있을지도. 스탈린 시절 소비에트 러시아는 문자 그대로 '수용소에서 공돌이가 갈려들어가는' 나라였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그 시절에 수학을 대단히 잘했다는 전력 때문에 잠시 이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얼마 뒤 벽돌을 날랐다. 그의 책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따르면 시베리아답게 영하 30도 정도는 따뜻한 날씨이며, 작업장 난로가 수감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품이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음식은 1끼 200g 정도의 빵과 너무 오래 끓여서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 국[23]이다. 강도 높은 처벌을 위해 '중영창'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갇히면 15일도 살아남기 힘들고 살아남더라도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 회복하기 힘들다고 한다. 수용소에 따라서는 외부로부터의 소포도 허용된 모양. 뇌물로 쓰인다.

과학자들이 주로 수용된 노동 수용소를 '샤라쉬카'라고 부르며, 유명한 과학자들도 상당수가 저 곳에 투옥되어 갈려들어갔다. 예를 들면 러시아 우주개발의 아버지 격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로켓엔진 설계자인 발렌틴 글루시코, 항공기 설계자인 안드레이 투폴레프[24] 페틀랴코프, 미야시시체프, 폴리카르포프 등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에도 이 굴라크의 인력을 동원했다. 단, 이 부분이 와전되어서 어차피 죽을 죄수들이니 방사능에 오염되는 위험한 일을 일부러 맡겼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냉전식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굴라크 죄수들이 동원된 건 주로 우라늄채굴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광산의 채굴 작업이 안전하고 편안한 일일 리는 없지만, 적어도 방사능 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자연 상태의 천연 우라늄은 방사능 수치가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큰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방사선 피폭의 위험이 큰 본격적인 핵연료 농축 가공 등의 작업은 애초에 고도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끌려온 죄수가 아니라 전문 노동자들이 따로 담당했다. 미국에서도 이런 천연 우라늄 채굴은 평범한 민간 광부들이 맡았다.

굴라크에서의 생활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에서 잘 표현돼 있다. 솔제니친이 훌륭한 작가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러한 곳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솔제니친 자신이 직접 그러한 수용소에서 오래 살아봤기 때문이다. 국가 반역죄인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스탈린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노땅, 꼰대류로 비하한 것이 발견되어서이다. 굴라크의 벽돌 노동자부터 지식 수용소 인원, 유형지 생활까지 죽는 거 제외하고는 상당한 코스를 밟았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한 뒤 소련 당국으로부터 귀국이 불허되어 이후 1994년까지 소련에 돌아오지 못했으며, 2008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예수회 신부 월터 치세크(Walter Ciszek)의 자서전인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에서도 굴라크의 생활과 출소 후의 소련 생활에 대해서 잘 묘사되어 있다.[25]

소련의 굴라크 또한 최악의 장소라고 생각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고, 굳이 비유하자면 북한 정치범수용소나치 독일아우슈비츠보다 덜한 정도였다. 그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원조도 굴라크이고, 논픽션 굴락의 저자 애플바움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구 소련의 그 곳과 가장 근접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 따르면 간수가 똥을 먹인다던가 하는 가혹행위 비인권적인 일등도 있다.

그러나 소련의 굴라크는 독일의 아유슈비츠와 근본적으로 차이점들이 있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로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갇힌 프리모 레비가 지적한 사안이다.(한국어판 p286)

한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30년대부터 노동자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누구나 경쟁하는 스타하노프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관련한 포상들 가운데 기묘한 것이 있었다. 우수한 실적을 올린 노동자는 여자 죄수 수용소에 위로휴가를 갈 수 있었다. 임신을 하면 3년을 감형시키는 소련 법률 때문에 여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검열삭제를 원했고 강간도 횡행했다고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간수에게 뇌물을 주면 원하는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포상도 해결할 수가 있고, 임신을 원하는 여자들을 대체 누가 임신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쓸데없는 고민도 해결할 수가 있고. 궁극적인 목표인 인구의 증가도 해결할 수가 있다.

6. 석방?[편집]


스탈린 시대에는 최고 유기징역형인 25년 징역형을[26] 마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없다. 대신 미개척지이거나 소외지인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에서 평생 유형 생활을 한다. 이곳은 비록 강제노동이나 수감, 고문 등의 행위는 없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감시받는[27] '시민'으로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28] 그나마 유형 생활 도중에 체포되거나, 집에 다시 갔다가 체포돼서 20년형을 받는 일도 많아졌는데... 스탈린 사후에는 이런 악습은 사라졌고,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에는 유형을 받은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29]


7. 변화[편집]


1953년 4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의사들의 음모' 사건과 '민그렐리야'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3년 9월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트로이카[30] 제도를 폐지했다.

1954년 4월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레닌그라드'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4년 4월부터 1956년 1월까지 소련 공산당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당에서 제명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1954년 5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은 반혁명 범죄로 기소한 사람들의 석방을 허용하면서 정치범들과 경제범들에 대하여 대규모로 사면을 베풀 수가 있는 길을 닦았다. 동시에 소련 공산당은 정치범들과 경제범들 가운데 '근거가 없는 정치적인 죄상을 이유로' 출당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때마침 노릴스크, 보르쿠타, 켄기르, 콜리마에서 죄수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수용소의 유지비가 광공업의 기계화자동화 비용을 초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북한도 아닌 나름 공산권의 수장이며 현대국가인 소련이 이들을 비밀리에 다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31] 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결단을 내려 사면을 베풀었다. 1956년 2월에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스탈린의 악행을 규탄하면서 희생자들의 복권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덕택에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신나게 까던 시절쯤에는 굴라크에서 강제노동의 비중도 줄었고, 석방한 다음에 재투옥하는 법제를 차례로 폐지했으며, 유형 생활자도 석방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이후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부터 안드로포프 정권 시기까지 다시 강화되었지만, 이 때는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굴라크의 실태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굴라크에 주요 정치범이 수용되었다는 소식이 서방에 알려지면 서방에서 지속적인 석방요구와 생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32]

물론 그렇다고 반대파를 놔둔 것은 아니다. 스탈린 사후의 소비에트 연방은 굴라크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는데, 정신병원에 수감하거나 출당 후 가택연금으로 아예 대외적인 활동을 물 샐 틈 없이 차단하는 술책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서방국가로 추방하고 현지에서 암살하는 방법도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제명이라고 불린 방식인데 브레즈네프 정권과 안드로포프 정권의 관점에서 고려해도 굴라크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술책을 편리하게 잘 쓰는 마당에 굴라크 체계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크게 만들어 본들 이미지만 나빠지고 또 인재라는 게 갑자기 필요할 때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유사시 필요하다 싶으면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당장 독소전쟁 때도 반대파 인사들 중에 쓸만한 사람들은 석방해서 독일과의 전쟁에 써먹은 전력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오지에 구금하는 수단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콜리마와 노릴스크페름에서 정치범과 경제범을 대규모로 구금하는 수용소를 운영했지만, 기본적으로 굴라크가 아니라 일반적인 교도소 수준이었고, 목적도 수용소에 가둬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가둬놓고 세뇌시키는 쪽에 더 가까웠다.

1990년대에 소비에트 연방동산부동산을 모두 인수한, 러시아 소비에트보리스 옐친 정권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한 뒤 정치적 이유로 갇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줬다.

또한 여러 곳의 구금 시설들을 현대화하여 연쇄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을 가두는 교도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NGC의 최악의 러시아 교도소라는 프로그램에서 교도소 내부를 제한적으로 공개했으며. 최근에 석유 재벌로 널리 알려진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구금한 교도소는 실제로 그렇게 개조한 곳이다. 그래도 그는 안락하게 살았다.


8. 세간에 알려지기까지[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소련의 굴라크 체제는 그야말로 도시전설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공화국 정부는 굴라크의 존재를 탐지하고 있었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전역에서 폴란드 공화국의 교민들이 내무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인민경찰(밀리치야)에 무더기로 잡혀갔는데,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주재 폴란드 대사관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공화국의 외무부에 보고한 덕택이다. 게다가 1940년에 폴란드 망명 정부자유 폴란드군을 결성하면서 폴란드군 포로들이 이란터키인도 제국영국령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귀환하고 영국프랑스서독스위스에 정착하면서 그들을 구금한 굴라크의 실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의 경우는 그것을 운영한 체제가 완전히 사라졌고, 심판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상이 공개된 것이지만 소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었고, 2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서방과의 동맹 체제 때문에 오히려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를 서방에서는 모른 체한 면이 있다. 심지어 카틴 학살조차도 정황이나 여러 증거로 봐서 소련의 소행임이 분명함에도, 미국측에서 동맹을 의식해 그 사실을 독일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1940년대 말 들어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고 동유럽에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거 들어서자, 이에 발 맞춰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이슈화 되기시작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에서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실체가 드러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소련이 해빙기를 맞게 되면서 굴라크의 실상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 흐루쇼프가 쫓겨나고 보수화 된 브레즈네프 체제하에서부터는 서방도 고위 반체제 인사나 유명한 운동권 대학생의 굴라크 수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국가적인 항의를 하게 되었다. 80년대 유형생활을 한 핵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가 대표적인 케이스.

굴라크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체계적인 연구는 솔제니친의 르포 '수용소 군도'가 최초였고[33], 소련 붕괴 후 여러 자료들을 모아 집필한 애플바움의 역작 굴락이 출간되었는데, 번역본은 불쏘시개다.[34]


9. 손실 보상 및 구제[편집]



9.1. 소련의 경우[편집]


  •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해마다 특정 사건들의 심리를 취소해 죄수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고,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해마다 사면을 베풀어 죄수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35]

  • 모든 생존자들은 구속한 날까지 당사자가 근무한 사업소에서 받은 월급을 기준으로 2월만큼의 임금퇴직금으로 받을 수가 있고, 교도소수용소에서 복역한 기간을 모두 더해 연금의 지급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에 합산하는 식으로 금액을 배가한 연금을 받을 수가 있음.

  • 1961년 1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화폐개혁(10:1)을 단행.[36]



  • 1989년에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에 따르면, 트로이카를 비롯한 초법적인 기관에서 내린 판결은 모두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그 재판을 받은 사람들을 복권함.




9.2. 러시아 연방의 경우[편집]


  • 1991년 10월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6개국 소비에트의 공화국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들은 정치적인 억압에 의한 희생자들의 복권을 다루고 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들을 대체함.[37]







10. 현실의 굴라크[편집]





11. 매체에서의 굴라크[편집]



11.1. 게임에서의 굴라크[편집]


  • 문명 6에서 산업단지를 설원이나 툰드라에 짓는 걸로 재현할 수 있다.

  • 보더랜드 2에서 The Dust에 끼어있는 맵인 Friendship Gulag(우정 굴라크). 정작 맵은 오픈월드 FPS답게 하이페리온 직원들과 로더들로 우글거린다. 블러드샷 요새에서 제때 롤랜드를 구출 못하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브퀘스트 모두 완수하는 도전과제를 달성하기 전에는 갈 일이 거의 없는 지역.[38] 애초에 구석에 처박혀있기도 하고.

  • 콜 오브 듀티 시리즈
    • 모던 워페어 2에서의 미션 "The Gulag" - 캄차카 반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폐쇄된 굴라크를 TF-141이 강습하는 것이 주 내용으로 이 굴라크에는 마카로프의 테러조직, 이너 서클이 억류 중인 627번 죄수가 있다. 이 죄수를 구출하는 것이 이 미션의 목적으로 이 죄수의 정체는... 미션 시작 전 브리핑 영상에서 소련 시절 사진이 삽입된다. 모던워페어의 리부트 시리즈에서도 비슷한 미션이 나오는데 모던워페어 III에서 국수주의파 PMC코니 그룹을 이끄는 마카로프가 원작과는 반대로 627번 죄수명으로 굴라크에 4년동안 갇혀있다고 나온다. 이후 코니 그룹 대원들이 굴라크에 침투하여 마카로프를 빼낸다.
    • 콜 오브 듀티: 워존 - 배틀로얄 모드에서 1회에 한해 사망 시 생포되어 굴라그로 간다. 굴라그에서는 수감자들끼리 1:1 매치를 벌이는데 이기는 사람은 굴라그를 탈출해 부활해서 전장에 재투입될 수 있다.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 두 번째 미션 "보르쿠타"의 배경. 여기서 주인공 알렉스 메이슨은 굴라크 안에서 친구가 된 빅토르 레즈노프와 함께 수 개월을 계획한 끝에 폭동을 일으키고, 레즈노프가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면서 펼친 방해공작 끝에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 트로피코 4의 Labor Camp : 기존의 들어가서 5년만 썩고 나오는 교도소와 달리 이쪽은 진짜 굴라크다. 죄수들은 프레지덴테가 석방해주고 싶으실 때까지 수용되어 그 안에서만 먹고 자며 강제노동으로 농사를 짓는다. 이 건물이 생기고 난 후 교도소는 안 짓고 이것만 짓는데, 수용인원도 훨씬 많고 영원히 가둬둘 수 있고 식량도 얻기 때문. 나이 20세에 들어와서 90세에 석방될 수도 있다

  • 팀 포트리스 2 : 다른 것들과는 달리 그냥 설정상으로만 등장한다. 코믹스에서 헤비가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했다고 언급되었다.


11.2. 소설 및 만화 매체에서의 굴라크[편집]


  • '굴라크' - 1985년작 영화로 KBS 방영 제목은 '수용소 군도 굴락'. 미국인 미식축구 선수가 여자를 잘못 만나서 소련의 계략으로 수용소에 수감돼서 겪는 일. 비중 있는 조연으로 맬컴 맥다월이 영국인 스파이로 나온다.

  • 마지막 한 걸음까지 - 2차대전 직후 독일군 포로가 시베리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굴라그[39]에서 탈출하여 수 년의 세월에 걸쳐 시베리아중앙아시아를 횡단하고 이란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작중 엄청난 집념으로 주인공을 쫓는 수용소장[40]의 모습과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해치려 하는 수많은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선 정식 개봉하진 않았으나 알음알음 인터넷 상에서 숨겨진 명작 취급을 받는 영화. 다만 좀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주인공이 굴라그에 끌려간 이유가 독일군 소속[41]으로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토벌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것 뿐이지만, 해당 국가들에게는 그저 침략국의 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 백야의 연인 - 원제 Ice Runner. CIA 요원인 주인공은 높으신 분들의 사정상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도 석방이 되지 않고 시베리아로 이송 중 같이 타고 있다 사고로 죽게 된 범죄자와 신분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 범죄자의 아내를 만나게 되고 둘이 사랑하게 되는데...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그의 정체가 탄로나서 석방될 기회가 생기지만, 공산주의에 투철한 소장은 주인공을 알래스카 근방의 북극권 수용소로 이송하고 그는 말 그대로 설원을 달려서 에스키모 마을로 탈출에 성공한다. KBS에서 방영된 바 있다.

  • 북극권의 탈출 - 원제 Born American. 핀란드 영화로 휴가를 맞아 핀란드에 사냥을 떠난 미국인 청년들이 술김에 국경을 넘어 난리를 치다가 소련군에 체포돼서 시베리아 굴라크로 이송된다.[42] 이후 하나는 살해당하고, 하나는 미쳐버리고, 나머지 주인공은 굴라크의 지하 지도자인 제독[43]을 통해 러시아 여인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게 된다.[44] 핀란드 영화 중에 당시로서는 제작비가 많이 들었던 작품이고[45], 척 노리스가 주연을 맡을 뻔했으나 아들인 마이크 노리스가 주연했다. 굴라크 수용소장 목이 꺾일 기세

  • 수용소 군도(Archipelag Gulag)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자신의 경험과 주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다큐멘터리 에세이이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씌어, 매우 신빙성 있고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책.

  • 숨그네 - 전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독일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가장 강조되는 감정은 배고픔으로, 죽음의 공포나 힘든 노역보다도 더한 굶주림이 배고픈 천사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체화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 싸이베리아 게임방 - 원제는 LOST IN SIBERIA. 영국인 고고학자가 이란에서 체포돼서[46] 고통 받는 이야기. 한국에서는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잔인한 장면은 없어도 구질구질하고 비참한 장면의 연속이라 보는 내내 고문을 받는 듯한 작품. 실제 수용소에서 10년을 보낸 감독의 경험이 녹아있다. 결말은 주인공이 이란의 의 도움으로 석방돼서 돌아간다고 하는데, 오오 팔레비 잘 보면 이 부분은 주인공이 죽기 전에 꾼 환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47] 칸 영화제 출품작.

  • 유녀전기 - 라게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러시아어로 캠프라는 뜻. 연방의 마도장교인 미켈 대령이 이곳에 수감되어 있다가 전쟁이 발발한 후 연방이 밀리자 풀려나서 참전한다. 또 4권 중간에 보면 굴라크를 비꼬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 일부를 가져와 보여주자면 '그것은 실드베리아(시베리아)에서 나무를 센다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자연으로 치유하면서 환경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산림욕을 하면서 밤에는 맑은 별 하늘을 바라보고...(후략)' 이런 식으로 나온다. 그 밖에도 소설 중간중간에 굴라크를 묘사한다.

  • 웨이 백 - 죽은 시인의 사회피터 위어 감독의 최신작.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는 폴란드 전쟁포로가 굴라크를 탈출해서 티벳인도를 거쳐 귀환하는 이야기이다.[48]


  • 캡틴 아메리카(마블 코믹스) 시리즈 - 캡틴 아메리카로 활동하던 버키 반즈가 과거 윈터 솔저로서 한 일들에 대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게 잘 끝난 직후에 러시아에서 버키를 굴라크로 집어넣는다. 명분은 윈터 솔저가 명령 외의 민간인을 죽였다는 거였지만, 알고 보니 죽은 두 사람 다 민간인이 아니었고, KGB의 잘못을 덮으려고 버키를 데려갔다는 게 드러난다. 버키는 굴라크에서 엄청 고생하다가[49] 블랙 위도우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


  • Coming Out of the Ice - 1920년대 포드사 공장 건설 때문에 소련으로 이주한 미국공산당원을 부모로 둔 주인공의 이야기. 이 사람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소련에서 낙하산 시범이나 노력 영웅으로 성공했지만 굴라크에 수용된다. 결국 1970년대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안정효의 책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반공특선으로 TV에 방영되었다고 한다.

  •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 - 원제는 With God In Russia. 미국 예수회 신부 월터 J. 취제크의 소련 억류 생활을 담은 회고록이다. 선교 목적으로 1년간 소련에 파견되었다가 바티칸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5년간 굴라그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형기가 끝난 이후에도 억류되어 있다가 1963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이 굴라그에서의 생활을 담고 있다.


11.3. 영화에서의 굴라크[편집]



  • 더 콘서트 - 멜라니 로랑의 부모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굴라크에 오고 거기서 사망하는 장면이 있다.

파일:external/images3.static-bluray.com/6398_18_large.jpg
파일:external/images.static-bluray.com/6398_16_large.jpg

  • 웨이 백 - 굴라크에 수용된 동유럽 출신 죄수들의 생활과 탈출 과정들을 다루고 있다



11.4. 네이버 카페 세계대전 떡밥 수용소(굴라크)[편집]


세계대전 떡밥 수용소 문서로.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4 14:10:30에 나무위키 굴라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한국에서는 법무부 소속 교정본부와 유사한 기관으로, 오늘날 러시아 내무부 소속 연방교정집행청(FSIN)에 해당한다.[2] 러시아어 정식 명칭은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산하 통합국가정치보안부(Объединённое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полити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при СНК СССР)'이다.[3] 러시아어로 쓰인 도시들은 왼쪽 위부터 무르만스크(Мурманск), 아르한겔스크(Архангельск), 탈린(Таллинн),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 리가(Рига),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 빌뉴스(Вильнюс), 민스크(Минск), 키예프(Киев), 키시뇨프(Кишинёв),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트빌리시(Тбилиси), 모스크바(Москва), 카잔(Казань), 페름(Пермь), 볼고그라드(Волгоград), 아스트라한(Астрахань), 바쿠(Баку), 아시하바트(Ашхабад), 보르쿠타(Воркута), 살레하르트(Салехард), 스베르들롭스크(Свердловск), 옴스크(Омск), 카라간다(Караганда), 프룬제(Фрунзе), 타시켄트(Ташкент), 두샨베(Душанбе), 알마아타(Алма-Ата), 노릴스크(Норильск), 노보시비르스크(Новосибирск), 크라스노야르스크(Красноярск),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 야쿠츠크(Якутск),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마가단(Магадан),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4] 상세 목록[5] 일단 러시아 내전기 당시에는 일반 노동교화소와 비슷하게 노가다 시키는 곳이었고, 기간이 다 되면 풀어주기는 했다.[6]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위조신분증으로 열차를 타면 그만이었지만 스탈린대에는 전신망과 전화망이 구축되었기 때문에 열차와 배에서 시군구 인민경찰(밀리치야)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소련은 물론 현재의 러시아에서도 사람이 사는 곳에서 일정 시간 이상 머무르려면 숙소나 관청에다가 기록을 남기도록 지정했고, 신분증이 없으면 이용하는 것조차 애를 먹게 만들었다. 결국 맨몸으로 시베리아 한복판을 지나가는 것이 탈출하는 방법인데, 물론 소련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는 널리고 널렸으니 NKVD와 인민경찰 및 스메르시와 소련군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 자체는 가능했지만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불곰이나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에게 물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시도하기에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7] 다만 그럼에도 일부 운 좋은 사람들은 빠져나오기는 했다. 0.01%의 확률에 베팅하는 꼴이지만(...). [8] NKVD 같은 기관의 고위급 간부가 아닌 중하위 간부나 말단 대원의 경우는 얼마 후 석방되어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으로 살 수 있었다. 물론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도 식량 부족 같은 걸로 고생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도 초반부에 간수실을 청소하는 주인공 옆에서 간수들이 식량 배급 문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9] 솔제니친수용소 군도에 의하면 소련 선박이 기상 악화로 스웨덴에 표착했고, 어느 정도 억류 생활을 한 후에 승조원 전원이 굴라크로 직행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10] 작중에서는 나오는 부이놉스키 중령. 매우 꼿꼿한 인물로 나오는데, 실존 인물이고 놀랍게도 굴라크에서 생존해서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고 한다.[11]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이 바로 이 혐의였다. 다만 형량은 10년이었고, 작중에선 약 8년을 보내고 2년 정도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작중 언급으론 형량이 개개인마다 다른게 아니라 시기별로, 일괄적으로 10년을 선고하거나, 25년을 선고했다고 나온다. 즉, 주인공은 일괄적으로 10년 때릴 때 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작중 시간대가 1951년 1월이니, 주인공은 역사대로라면 2년뒤 스탈린이 죽는 1953년에 석방되었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10년이다[12] 물론 포로 기간 중에 러시아 해방군 같은 곳에 자원했다면 굴라크고 뭐고 없다.[13] 이 경우는 당연히 의혹 수준이고 아직도 작전 중 실종으로 기록된다.[14] 이들 중 상당수는 경제 공황 전후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이민 간 미국계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이다[15]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인도 국민군의 영웅 찬드라 보스 역시 시베리아 사망설이 심도 있게 제기되고 있다.[16] 다만 이들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MBC에서 방영된 고려인 드라마에서 조명희는 굴라크 폭동에 연루돼서 사망한 것으로 그렸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재판 후 처형이었다.[17] 6.25 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약한 황학소의 경우도 이런 식으로 귀환한 케이스. 처음에는 북한으로 보내졌지만, 북한 당국도 고향이 이남이고 본인이 고향으로 가기를 원하면 그냥 38선 월경을 허가해주었다고 한다. 이들의 귀환은 6.25 전쟁 직전인 48~9년도경에 이루어졌는데, 그나마 이 때 송환 결정이 이루어졌기에 망정이지,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사할린 한인들처럼 소련에 발이 묶이거나 북한에 남아야 했을 수도 있다. 송환 후에 삼팔선까지 왔지만,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국군으로부터 오인 사격을 당하는 등, 고향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고생했다고 한다. 소련 억류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사해문집)"에 나온다.[18] 자유시 참변과 소련 지원금 횡령 사건 때문에, 소련과 친소련계를 싫어하는 독립운동가가 많았다.[19] 당대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지각시 20분당 징역 1년. 아래 할당량 항목에 해당하는 얘기인데, 각 지역의 인민경찰(밀리치야)이 할당량을 못 채운다면 근처 출근 버스를 덮친 다음 적당한 누명을 씌우고, 또 버스를 덮치고 연행한 시간들도 지각죄로 징역을 때렸다.[20] 횡령 혐의가 아니라 기술 개발 실패 등의 문제다. 투폴레프의 설립자인 안드레이 투폴레프가 바로 이 혐의로 굴라크에 갔다. 그는 1937년에 투옥되어 1944년에 석방되었다.[21] 애플바움의 굴락에 의하면 50년대 2명의 미국 조종사가 굴라크에 이송된 정황이 있었는데, 1명은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런 일반 죄수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22] 대한민국에서도 1980년대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삼청교육대 문서로.[23] 보통 생선이나 오래된 야채가 들어가는데, 때때로 식량이 부족할 때는 사료용 귀리, 심지어 들풀로도 국을 끓인다. 다른 작품에서는 '무만 넣고 끓인 맹탕 같은 수프' 가 나오기도 했다. 그냥 아무거나 넣고 끓이는 건가 보다.[24] 폭격기로 유명한 투폴레프 설계국의 설립자이자 수석설계자.[25] 이 사람은 폴란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부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있다가 바티칸 스파이로 지목되어 붙잡혀 15년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여러 굴라크를 돌아다니며 15년간 강제노동을 했고, 풀려난 뒤에도 감시와 거주 제한이 딸린 제한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63년 미국에 침입했다 잡힌 소련 첩보원 2명과의 교환 조건으로 소련에 억류된 2명의 미국인을 풀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월터 치세크는 이 기회를 통해 23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미국에서 종교활동에 전념하다가 1984년 사망했다.[26] 소비에트 연방소비에트 러시아형법에 따르면 사형, 25년 후 가석방이 가능한 무기징역, 25년 징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러시아 연방형법도 그대로 계승했는데, 사형이 사문화되면서 현재는 최대 25년 형과 무기징역으로 이원화되어 있다.[27] 박헌영의 전처 주세죽은 딸을 모스크바에 두고서도 유형 생활 때문에 가끔 방문만 허가 받았다.[28]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8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1953년 석방되었는데, 3월 2일 유형지인 카자흐스탄 남부 비를리크에 유배되어 나흘 뒤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종양이 도져 이듬해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로 유형지를 옮겨 치료를 받고(이 때의 경험이 바로 암병동이라는 소설에 나온다), 그 후 교사 노릇을 하는 유형 생활을 했다. 동물원에 주말에 놀러가거나 아플 때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갈 정도의 자유를 누리긴 했다. 군대에서는 외진이란 형태로 경험할 수 있다[29] 이런 케이스 중에 기구한 것은 북한 정권에 반대한 혐의로 투옥된 반공 인사들이다. 이들은 소련 군정에 의해서 체포돼서 굴라크에 수감되었는데 스탈린 사후 북한으로 송환되는 일을 겪는다. 물론 상당수는 중앙아시아 잔류를 택하지만... 다행이다[30] 소련 공산당지구당 서기, 지방검찰청의 검사장, 내무인민위원회의 지부장이 움직이는 3인조.[31] 애초에 반대파를 일가족까지 모조리 수용소 보내서 죽인다는 발상 자체가 북한 외에 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굳이 일시적인 사례를 찾자면 1970년대의 베트남캄보디아 등 아시아권 공산 국가들 중에 몇 있긴 하지만, 북한과 달리 전쟁 직후 혼란기였고 또 몇 년 가지 않았다.[32] 스탈린 시절에는 그런 거 없이 서방에서도 "설마 그런 게 있겠냐"는 도시전설 수준... 이었으나,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자유 폴란드군 장교들을 통해서 서방도 공식적으로 굴라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33] 한국에서는 1부만 70년대 발췌 번역되었고 소련 체제를 설명한 완역본은 80년대 후반에야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시중에서는 1부(정확히는 1부의 1~7장 부분)만 번역한 발췌본만 구할 수 있다. 열린책들에서 발행한 완역본은 현재 절판 상태.[34] 가히 최악의 번역이라 할 만하다. 애초에 번역 작업을 제대로된 번역가가 맡아서 하지 않고 GAGA통번역센터라는 번역 업체에서 했다. 각 챕터마다 고유명사의 한글 표기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당연하고 비문과 오역이 난무한다. 읽다 보면 탄식이 절로 나오는 수준. 심지어 책 첫 페이지의 '감사의 말'조차 번역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35] 안병직, 세계의 과거사 청산 ; 김남섭, 스탈린 체제와 러시아의 과거청산, 342쪽~354쪽.[36] 1960년에 옛돈으로 지급을 완료한 퇴직금연금의 금액 = 1961년에 새돈으로 지급을 고려한 퇴직금과 연금의 금액으로 규정.[37] 안병직, 세계의 과거사 청산 ; 김남섭, 스탈린 체제와 러시아의 과거청산, 355쪽~362쪽.[38] 서브퀘가 하나 존재한다.[39] 소름 끼치게도 알래스카와 마주보고 있다.[40] 전쟁영웅으로 진급이 보장된 전방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수용소에 전임 왔다. 자신의 감독하의 수용소를 탈주한 주인공을 잡아들이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기며, 상부에서 수색을 중단하라고 하자 근무지 이탈까지 하며 주인공을 여러 번 위험에 처하게 한다.[41] 정확히는 예비군으로 전쟁 말기에 급하게 징집됐다.[42] 미국 대사관에서 구하려 했지만 소련 당국이 제공한 성노예를 받고 입을 씻는다.[43] 놀랍게도 흑인이며 미국의 높으신 분들의 치부를 알고 있고 책으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고위 스파이라는 암시가 있다.[44] 제독은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행방을 감추고 은거했다고 자막에 나온다.[45] 막상 소련에 대한 비판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상영금지를 먹었다. 하지만 감독인 레니 할린은 이 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46] 진짜 스파이와 동명이인이었는데, KGB가 잘못을 알고도 그냥 시베리아로 보냈다.[47] 실제로 환영회 장면에서 수용소 친구들이 환상 속에서 갑툭튀하고, 남아있던 친구들이 굴라크 이송 중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고, 석방되어도 아직도 마음만은 굴라크에 살고 있다는 주인공의 나레이션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간다.[48] 다만 이 수기 부분은 이전부터 가짜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소련의 기록에 의하면 주인공은 석방돼서 자유 폴란드군에 인계되었다고 한다. 2007년 또 다른 폴란드 조종사 출신 장교가 그 경험은 자신의 경험이었고, 주인공은 자신의 경험을 도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인도 주둔 영국군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굴라크를 탈출해서 인도로 망명한 사람들이 존재하긴 한다고 한다.[49] 엄청난 크기의 곰이나 이마에서 무슨 불 같은 레이저가 나오는 사람과 강제 결투를 한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