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굴라크 (문단 편집) == 변화 == 1953년 4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의사들의 음모' 사건과 '민그렐리야'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3년 9월에는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트로이카[* [[소련 공산당]]의 [[지구당]] 서기, [[검찰|지방검찰청]]의 검사장, [[내무인민위원회]]의 지부장이 움직이는 3인조.] 제도를 폐지했다. 1954년 4월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레닌그라드'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4년 4월부터 1956년 1월까지 [[소련 공산당]]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당에서 제명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1954년 5월에 [[소련 최고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은 반혁명 범죄로 기소한 사람들의 석방을 허용하면서 정치범들과 경제범들에 대하여 대규모로 [[사면]]을 베풀 수가 있는 길을 닦았다. 동시에 [[소련 공산당]]은 정치범들과 경제범들 가운데 '근거가 없는 정치적인 죄상을 이유로' 출당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때마침 [[노릴스크]], [[보르쿠타]], 켄기르, 콜리마에서 죄수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수용소의 [[유지비]]가 광공업의 [[기계화]]와 [[자동화]] 비용을 초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북한]]도 아닌 나름 공산권의 수장이며 현대국가인 소련이 이들을 비밀리에 다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애초에 반대파를 일가족까지 모조리 수용소 보내서 죽인다는 발상 자체가 [[북한]] 외에 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굳이 일시적인 사례를 찾자면 1970년대의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아시아권 공산 국가들 중에 몇 있긴 하지만, 북한과 달리 전쟁 직후 혼란기였고 또 몇 년 가지 않았다.]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결단을 내려 [[사면]]을 베풀었다. 1956년 2월에 열린 [[소련 공산당대회|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악행을 규탄하면서 희생자들의 복권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덕택에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신나게 까던 시절쯤에는 굴라크에서 강제노동의 비중도 줄었고, 석방한 다음에 재투옥하는 법제를 차례로 폐지했으며, 유형 생활자도 석방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 정권 시기부터 [[유리 안드로포프|안드로포프]] 정권 시기까지 다시 강화되었지만, 이 때는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굴라크의 실태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굴라크에 주요 정치범이 수용되었다는 소식이 서방에 알려지면 '''서방에서 지속적인 석방요구'''와 생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에는 그런 거 없이 서방에서도 "설마 그런 게 있겠냐"는 [[도시전설]] 수준... 이었으나,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자유 폴란드군]] 장교들을 통해서 서방도 공식적으로 굴라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반대파를 놔둔 것은 아니다. 스탈린 사후의 [[소비에트 연방]]은 굴라크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는데, [[정신병원]]에 수감하거나 출당 후 가택연금으로 아예 대외적인 활동을 물 샐 틈 없이 차단하는 술책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서방국가로 [[추방]]하고 현지에서 [[암살]]하는 방법도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제명이라고 불린 방식인데 브레즈네프 정권과 안드로포프 정권의 관점에서 고려해도 굴라크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술책을 편리하게 잘 쓰는 마당에 굴라크 체계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크게 만들어 본들 이미지만 나빠지고 또 인재라는 게 갑자기 필요할 때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유사시 필요하다 싶으면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당장 독소전쟁 때도 반대파 인사들 중에 쓸만한 사람들은 석방해서 독일과의 전쟁에 써먹은 전력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오지에 구금하는 수단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콜리마와 [[노릴스크]]와 [[페름]]에서 정치범과 경제범을 대규모로 구금하는 수용소를 운영했지만, 기본적으로 굴라크가 아니라 일반적인 교도소 수준이었고, 목적도 수용소에 가둬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가둬놓고 세뇌시키는 쪽에 더 가까웠다. 1990년대에 [[소비에트 연방]]의 [[동산]]과 [[부동산]]을 모두 인수한, [[RSFSR|러시아 소비에트]]의 [[보리스 옐친]] 정권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한 뒤 정치적 이유로 갇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줬다. 또한 여러 곳의 구금 시설들을 현대화하여 연쇄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을 가두는 [[교도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NGC의 최악의 러시아 교도소라는 프로그램에서 교도소 내부를 제한적으로 공개했으며. 최근에 석유 [[재벌]]로 널리 알려진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Khodorkovsky|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구금한 교도소는 실제로 그렇게 개조한 곳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s-4|그래도 그는 안락하게 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