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굴라크 (문단 편집) == 수감자의 종류 == * 정치범 정말로 체제 비판자일 수도 있고, [[높으신 분들]]의 비위에 맞지 않거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분 내지는 [[연좌제|그의 가족들]]일 수도 있다. 사실 피해자 태반은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제국과 정교회 복구를 추구하며 소련정권에 반대하던 순수한 의미에서 '반동'이 아니라 소련과 공산권 내 권력 투쟁의 피해자거나 이런 저런 노선에서 반대한 [[멘셰비키|다른]] [[아나키즘|사회주의자들]]이 훨씬 많았다. [[대숙청]]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은 수감자로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NKVD]] 같은 기관의 고위급 간부가 아닌 중하위 간부나 말단 대원의 경우는 얼마 후 석방되어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으로 살 수 있었다. 물론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도 식량 부족 같은 걸로 고생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도 초반부에 간수실을 청소하는 주인공 옆에서 간수들이 식량 배급 문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저런 일로 외국에 갔다가 오는 경우도 간첩 혐의로 몰려서 가는 일이 빈번했고.[*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의하면 소련 선박이 기상 악화로 [[스웨덴]]에 표착했고, 어느 정도 억류 생활을 한 후에 승조원 전원이 굴라크로 직행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독소전쟁]]에서 취득한 [[독일 국방군]]의 장비나 훈장을 개인적인 기념으로 가지고 있다가 들켜서 난데없이 [[반동분자]]가 되어 굴라크로 향한 예도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해군]]에 연락 장교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여 전후 영국 해군 제독에게 기념품과 편지를 받은 [[소련 해군]] 장교도 굴라크로 간 이야기가 나온다.[* 작중에서는 나오는 부이놉스키 중령. 매우 꼿꼿한 인물로 나오는데, 실존 인물이고 놀랍게도 굴라크에서 생존해서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대숙청의 세밀한 역사적 면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에선 놀랄 법한 사실이지만 정치적 억압이 가장 극심했던 스탈린주의의 전성기, 30년대 후반 굴라그에 끌려온 정치범들은 태반이 '''바로 그 국가 보안기관, 정치경찰 그 자체인 [[NKVD]] 출신'''이었다. 애초에 조직 자체가 트로츠키가 만들었고, 이때 한창 소련 내에서 일국사회주의 노선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는지라 해외 파견 다니면서 다양한 국제 정치 집단들과 교류할 일이 많았던 NKVD가 집중 숙청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비공산 독립 좌파 세력 숙청을 주도하다 바로 본인도 소련 귀국하자마자 숙청당한 안토노프 오브셴코, 국제여단을 이끌며 한때 마드리드의 수호자라 칭송받은 '클레베르 장군'이란 가명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슈테른(Manfred Stern, 1896–1954) 같은 스페인파가 대표적인 토사구팽 피해자였고,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에서 모두 활약한 [[바실리 블류헤르]], [[미하일 보로딘]] 같은 중국파 공작원, 군무원들도 많은 수가 이때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귀국'당하자'마자 굴라그로 끌려가 최후를 맞았다. * 전쟁 포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적국에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사람들은 일단 비겁 내지는 간첩 혐의로 거의 전원 굴라크로 직행했다. 심지어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서 전선에 복귀한 사람도 간첩 혐의로 25년 굴라크 수감을 언도받는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이 바로 이 혐의였다. 다만 형량은 10년이었고, 작중에선 약 8년을 보내고 2년 정도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작중 언급으론 형량이 개개인마다 다른게 아니라 시기별로, 일괄적으로 10년을 선고하거나, 25년을 선고했다고 나온다. 즉, 주인공은 일괄적으로 10년 때릴 때 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작중 시간대가 1951년 1월이니, 주인공은 역사대로라면 2년뒤 스탈린이 죽는 1953년에 석방되었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10년이다--][* 물론 포로 기간 중에 [[러시아 해방군]] 같은 곳에 자원했다면 굴라크고 뭐고 [[사형|없다]].] 다행히도 이들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정권 때 석방과 복권이 되었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독일국방군]]과 [[무장친위대]]원들도 시베리아 개척에 동원되었다. 이미 대전 말기에 독일군들의 구호가 '''Sieg oder Sibirien(승리 아니면 시베리아다.)'''일 지경이었다. 약 120만명이 그 곳에서 강제노역과 거친 환경 때문에 사망하였다. 1955년 9월 12일에 [[콘라트 아데나워]]와 [[니키타 흐루쇼프]] 사이의 치열한 논의 끝에 [[서독]]과 [[소련]] 사이에 국교정상화 협상이 타결되어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외국인 [[소련]] 치하의 [[폴란드인]], [[독일]]의 소련 점령 지구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체포된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이나, [[냉전]] 시기 소련 정찰 중 실종된 조종사들[* 이 경우는 당연히 의혹 수준이고 아직도 작전 중 실종으로 기록된다.]이 여기에 수용되었다. 소련에서 [[스파이]] 혐의로 실종된 [[미국인]]들[* 이들 중 상당수는 경제 공황 전후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이민 간''' 미국계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이다]이나 [[스페인 내전]] 중 소련으로 건너간 스페인 공산당원들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인도]] 국민군의 영웅 [[찬드라 보스]] 역시 시베리아 사망설이 심도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들 중에서 공산당원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주로 대숙청 시기에 의심이 간다며 끌려간 사례들이었다. 또한 2차대전 전시 및 그 이후, 전시의 교전국가인 [[나치 독일]]의 포로들 역시 굴라크에 수용된다. 이들은 전후에 노동력이 부족했던 소련에서 유용한 노동력(...)으로 취급받으며 지냈는데, 이들 중 소련 체제에 협조적인 사람들은 [[1950년대]]에 석방되었지만, 대부분은 당사국이 소련과 수교할 때까지 억류됐다. * [[고려인]]과 [[조선인]]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전후 상당히 많은 고려인들이 굴라크에 이송되었다. [[김단야]], [[조명희(시인)|조명희]] 같은 재소련 [[독립운동가]] 상당수도 누명을 쓰고 숙청되었다.[* 다만 이들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MBC]]에서 방영된 고려인 드라마에서 조명희는 굴라크 폭동에 연루돼서 사망한 것으로 그렸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재판 후 처형이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완역판에서도 고려인들이 수용된 이야기가 버젓이 실릴 정도였다. 해방 이후 소련군정에 반대한 인사들 중 상당수가 굴라크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스탈린]] 사후 [[북한]] 이송과 [[소련]] 잔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소련에 잔류한 사람들의 수용소 기록이 90년대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관동군]]에 복무하던 조선인 장병들 역시 굴라크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식민지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았고, 대부분 40~50년대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약한 황학소의 경우도 이런 식으로 귀환한 케이스. 처음에는 북한으로 보내졌지만, 북한 당국도 고향이 이남이고 본인이 고향으로 가기를 원하면 그냥 38선 월경을 허가해주었다고 한다. 이들의 귀환은 [[6.25 전쟁]] 직전인 48~9년도경에 이루어졌는데, 그나마 이 때 송환 결정이 이루어졌기에 망정이지,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사할린 한인]]들처럼 소련에 발이 묶이거나 북한에 남아야 했을 수도 있다. 송환 후에 [[삼팔선]]까지 왔지만,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국군]]으로부터 오인 사격을 당하는 등, 고향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고생했다고 한다. 소련 억류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사해문집)"에 나온다.] 남한에서 활동 중인 삭풍회(朔風會)라는 단체가 바로 구 [[일본군]] 출신 시베리아 유형자들의 전우회이다. 그들과 별개로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과 [[NKVD]]가 재빠르게 체포해 본토로 압송하여 굴라크에 구금했는데, 대부분은 못 나오고 거기서 매일같이 삽질하다가 죽었다. 게다가 반공을 표방한 독립운동가들도[* 자유시 참변과 소련 지원금 횡령 사건 때문에, 소련과 친소련계를 싫어하는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공산당원들이 친일파로 모함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구금되기도 했다. [[소련군정|소련군이 다스린 북한 땅]]에서 [[스메르시]]와 [[GRU]]와 [[NKVD]]가 수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을 잡아들여 [[북극]], [[연해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압송했는데,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195423/1|사회단체를 결성한 죄로]] 소련군에 체포되어 [[연해주]]의 굴라크에 끌려갔다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304010020921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4-01&officeId=00020&pageNo=13&printNo=18921&publishType=00020|무죄로 석방되어 북한으로 돌아온]]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05/2009030500083.html|한교석]]([[한양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기자회견]],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주모자들을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압송한 사례를 깊이 다룬 기광서([[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논문(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독일계 러시아인]] [[독소전쟁]]의 개막으로 날벼락을 맞았다. 1941년에 '''스탈린의 특명으로''' [[NKVD]]와 [[소련군]]이 재빠르게 습격하여 [[체포]]되거나 [[끔살]]당했다. * [[사보타주]] 정말로 사보타주일 수도 있지만 상습 지각[* 당대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지각시 20분당 징역 1년. 아래 할당량 항목에 해당하는 얘기인데, 각 지역의 인민경찰(밀리치야)이 할당량을 못 채운다면 근처 출근 버스를 덮친 다음 적당한 누명을 씌우고, 또 버스를 덮치고 연행한 시간들도 지각죄로 징역을 때렸다.]이나 근무 중에 졸았거나, 집단농장에서 기물을 파손했거나, 자기가 속한 특정 기관의 예산을 낭비[* 횡령 혐의가 아니라 기술 개발 실패 등의 문제다. [[투폴레프]]의 설립자인 안드레이 투폴레프가 바로 이 혐의로 굴라크에 갔다. 그는 1937년에 투옥되어 1944년에 석방되었다.]했다는 이런저런 혐의로 끌려갔다. * 일반 죄수 그야말로 [[살인]], [[강도]], [[강간]], [[레드 마피아]] 등의 강력범들도 굴라크 행이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수용소에서도 내부 조직을 만들어서 잘 먹고 잘 살고 간수들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지냈다. 위에 설명한 혐의로 들어온 일반인들은 식량, 금품, 목숨을 뺏기게 된다. 수용소 당국보다 가장 무서운 쪽이 바로 이런 죄수들이었다.[* 애플바움의 [[굴락]]에 의하면 50년대 2명의 [[미국]] 조종사가 굴라크에 이송된 정황이 있었는데, 1명은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런 일반 죄수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 [[내무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인민경찰(밀리치야)의 '''할당량''' 때문에 끌려온 사람 [[대숙청]], [[형벌 부대]] 문서로.[* [[대한민국]]에서도 1980년대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삼청교육대]] 문서로.] * 종교인 [[국가 무신론]]의 영향으로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이슬람]], [[유대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를 믿은 종교인들도 수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