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본웅 (문단 편집) == 친일 행적 == [[1939년]] 18회 《조선미술전람회》를 평하면서 “[[내선일체]]의 현하에 있어 조선미전[* 조선미술전람회]을 일 변방의 사실로만 둘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중앙화단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 6. 13~16) 이듬해 [[1940년]] 7월 [[일본 제국]]의 신동아 건설론에 고무받아 쓴 「사변과 미술인」에서 “(…) 미술인은 또한 뜻과 기技를 다하여 국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온 것은 말할 바 없으며, 혹은 종군화가로서 [[중일전쟁|성전]]을 채취彩取하며, 혹은 시국을 말하는 화건畵巾을 지움으로써 뚜렷한 성전聖戰 미술을 날게까지 되어 온 것이 금일의 미술계이며 3년간의 미술 동향이었다. (…) 금일의 전쟁은 [[선전전]]이 큰 역할을 하는 터이라 (…) 미술이 가진 바 수단이 곧 [[프로파간다|일종의 무기화]]하는 감까지 있음은 미술인으로서 다행히 여기는 바이다. 미술인이여!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가진 바 기능을 다하여 군국(軍國)에 보(報)할 것이다”라 외치며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에 참전할 것을 권했다. [[8.15 광복]] 이후 41세이던 해에 구본웅은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참회한다. 하지만 이 글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은 구본웅의 [[1945년]] 미발표 유고로써, 공식적인 발표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내 나이 41, 생활의 대부분과 미술생활의 전부가 [[일제강점기|왜정]]의 그물 속에서 지냈다. 나의 미술적 수학 내지 수업이 왜정의 손끝에서 되었다. 고고히 나의 미술이 왜적倭的 감념感念이 없다고 그 어찌 선뜻 말하겠는가? … 나는 솔직히 말하노니, 나의 뇌수를 청소시키지 않고는 참다운 나를 찾지 못할 것이며, 그 청소는 쉽사리 일조일석에 완전치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에 대한 관점을 왜정식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왜정적 코스에서의 관념과 방법을 청산하자는 것이 나의 논조이다.” >---- >구본웅,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